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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영구 옮김 / 푸른숲 / 1998년 4월
평점 :
품절
괴테와 이탈리아, 그리고 여행. 어느 것 하나 마음 설레지 않는 단어가 없는 이 책의 제목은 일상에 지쳐버려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지는 바로 그 순간 손에 쥐어야 할 단 한 권의 책이다. 괴테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고위관직에 오르면서 그토록 사랑하던 문학과 예술로부터 멀어져 가고 정치사와 밀려드는 업무에 지쳐갈 무렵, 괴테 자신의 말에 따르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너무나 괴로워져서 이탈리아 경치를 그린 그림 한장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던 그 때 괴테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홀연히 이탈리아로 떠났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변함없는 세계의 수도, 로마가 숨쉬고 있는 그 땅으로 말이다. 그리고 처음 예정보다 점점 길어져버려 결국 1년 9개월여에 달하게 된 여행의 기록을 자신의 언어로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이 이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보통의 여행입문서와는 다르다. 단순한 기행문도 아니며, 이탈리아의 명소를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괴테의 말과 생각으로 로마의 거리를 함께 걷게 되는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파우스트"와 같은 명작의 작가로서 대문호인 그에게 기대할 법한 현란한 수사법이나 심금을 울리는 대사같은 것은 없다. 대신 우리는 괴테라는 사람이 왜 위대한 인물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위대한 예술가는 자연 그 자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라는 어떤 말처럼, 괴테에게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정에서조차 모든 것이 관찰의 대상이요, 찬미의 대상이고 생각의 도구이다. 날씨, 식물, 암석, 지형, 그 곳의 사람들, 그들의 행색, 풍습, 기질.... 괴테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그 모든 대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오늘날처럼 바쁘게 스쳐지나가듯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예술가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자연을 모방하는 방법을 배우고, 여러 편의 작품을 개작했으며, 희귀한 식물에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직접 재배하기도 하고, 후에는 인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로 마음먹기도 한다. 흔히 생각하는 기준으로는 그는 전혀 "여행"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저 다른 종류의 일을 훨씬 더 열정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괴테의 고백처럼, 이 모든 열정과 즐거움은 그의 마음에서 온전히 우러나온 것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은 바로 이탈리아 특히 로마라는 공간이었다. 자기 자신이 생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예술을 가능케 해 주는 로마야말로 그가 꿈꾸던 곳이었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알찬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로마와 사랑에 빠진 이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 새 나도 로마의 어디쯤을 걷게 된다.
비록 여행입문서는 아니지만, 언젠가 이탈리아를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혹은 로마의 거리를 직접 걸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한다. 눈 돌리는 곳 어디나 유적이 있고, 계단 한 층 돌조각 한 개도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이탈리아라는 나라, 로마라는 도시를 혼자서는 생각치 못할 방식으로 느껴보고 싶다면 말이다. 괴테의 글을 읽으면서 짧은 생각이나마 예술가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현재에 살고 있으나 수 천년 전 조상들이 남겨준 유품들에 감사하고 그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진심으로 감상할 줄 알며 앞으로 남겨질 후세를 위해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 하지만 현재의 소중함을 잘 알고 순간을 값지게 보낼 줄 아는 사람들도 그들이 아닐까 싶다. <"....제가 지난 일 년 동안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며 주목하여 찾아낸 것도, 정말로 현명한 사람들은 모두 다소간 섬세하든 투박하든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고 이것을 견지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모든 것은 순간이며, 삶이 순간에 의해 좌우되는 한, 자신의 삶이 합리적이고 행복한 순간을 가능한 한 많이 갖도록 행동하는 것이 이성적인 인간의 장점이라고 말입니다.."...p.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