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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의 섬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1월
평점 :
품절
책을 읽고 나서 뿌듯한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과연 이 마지막 장을 덮어도 될는지 고민이 되는 책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전날의 섬'은 후자쪽이다. 에코의 소설을 읽을 때면 늘 중도에 그만두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무지를 부끄럽게 만드는 에코의 다방면에 걸친 배경지식의 홍수와 조금만 정신을 다른 곳에 쏟아도 다음 문장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현란한 문장들 때문이다.
'전날의 섬'에서도 탐험의 시대를 아우르는 사회사상적 배경이나 그 시대의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한 에코와 나의 지식수준 사이의 메꿀 수 없는 간격은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코의 책을 중도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노력해서 읽어나가는 만큼 더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경도의 위치를 찾기 위한 모험이 기본적인 줄거리이긴 하지만,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로베르또의 생각을 좇다 보면 공간과 시간의 개념, 무한성에 관한 논쟁 등에 대한 흥미로운 의견들을 접할 수 있다. 특히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 '페란떼'의 이야기에 많은 흥미를 느꼈다. 어린 시절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또 하나의 나' 혹은 '나의 그림자'에 해당하는 페란떼는 어린 로베르또의 상상속의 인물로 탄생하지만 로베르또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으며 결국 최후까지 그와 함께 한다. 페란떼를 만든 것은 로베르또지만 나중에는 로베르또 스스로가 페란떼가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페란떼에 대한 소설을 쓰면서 그 속에 동화되어 가는 로베르또의 최후를 보면서 나는 이 책이 정신분석학적 혹은 심리적 소설로서의 분석가치도 충분하다고 느꼈다.
작가가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라면 에코의 이 작품은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생 사벵을 통해, 페란떼가 도착한 지옥의 풍경을 통해, 그리고 그 외 많은 등장인물을 통해 에코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부수적인 아쉬움을 들자면 본문의 오타가 너무 많아 참을 수 있는 한도를 간간히 넘어섰다는 것과, 이윤기씨의 번역이 가끔은 실망스러웠다는 것 정도이다. 좋은 작품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좀 더 세심한 배려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