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 담쟁이 문고
이순원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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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1.

 얼마 전에 소규모 제작비에 비해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영화 <워낭소리> 덕분인지 '워낭' 이라는 단어가 낯설지는 않았다. 오히려 구수함마저 갖게 하는 고향의 단어로 탈바꿈해 버렸다. 그런 이미지에 맞물려 책을 집어 들었는지 모르겠다.
 도시에 자란 나에게 농촌의 생활, 소가 풀을 뜯고 밭일을 하는 풍경을 사회 교과서나 다큐멘터리에서 봤을 뿐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동화 속 이상향이었다. 워낭이라는 단어는 그런 전원에서의 갈망을 묘하게 자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중에 부산의 Y서점에서 <워낭>으로 독서토론회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정작 독서토론회가 있는 날엔 참석하지 못했다. 공연 이벤트에 당첨되어 뮤지컬을 보러 갔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무엇보다 토론회에 참석하고 싶을 만큼의 구미를 끌어당기지 못했다.
 소를 중심으로 꾸려가는 이야기가 평면적인데다 지나치게 빠른 전개가 소설이라기보다는 동화책을 보는 듯 심플했다. 여백이 풍부한 한국화를 보는듯한 간결함이 소를 묘사하는데 적절히 사용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소설이라는 측면에서 보기에는 뭔가 2% 부족해 보였다.
 우추리 차무집에서 몇 대를 이어오며 가족처럼 살고 있는 소를 중심으로 조선 말기부터 한일합방, 해방, 한국전쟁과 같이 급변하는 역사를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소설 속에 나타난 역사를 따라가기에는 소설의 깊이나 분량이 얕아 보인다. 역사에 무심한 듯 살아왔지만 정작 자유로울 수 없었던 우리 민초들에 대해 좀 더 차분한 접근이 있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세대를 이어온 소의 삶과 질곡 많았던 우리 역사를 연결할 수 있는 다양한 고리를 통해 우리의 삶을 둘러볼 수 있었으면 더 좋았지 싶다. 소가 단지 연극무대의 소품쯤으로 가볍게 치부되어버린 것 같아 조금은 아쉽다.


# 2.

 글을 적고 생각해보니 이상하게 부정적으로 흘러버렸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나쁘게 읽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빠른 전개, 심플함, 가벼움이 어쩌면 이 책을 특징짓는 최고의 장점일 수도 있는데 내 눈엔 왜 하나같이 단점으로 느껴졌을까.
어쩌면 독서토론회(이하 독토)를 놓쳐버린 심술의 발로일수도, 중고로 구입한 <워낭>에 대한 홀대인지도 모르겠다. 독토를 겨냥해 한 달 전부터 벼르고 읽었던 책이라 그 토라짐이 더 컸을 테고, 특별한 기대 없이 중고로 구입한 책이기에 그 애착이 다른 책에 비해 떨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머릿속을 떠나버린 생각은 글이 되어 남아버렸고, 뭔가 부족하고 미안한 마음에 마음 한구석이 계속 찜찜했다. 그러던 중 인터넷에서 <워낭>에 대해 쓴 글을 하나 읽었다. 그 글 속에는 투정 이전의 내가 어렴풋이나마 느꼈던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었다.

"<워낭>은 그런 소설이다. 역사의 맥을 짚으면서도 절대 앞세우지 않고, 소를 화자로 내세우면서도 절대 투정하지(여태 못했던) 않고, 인간의 소살림을 전혀 가엾이 여기지 않는 아주 자존심이 센 놈이다. 독자도 눈을 낮출 필요없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게 하는 그런 책이다. 소의 내력이 바코드로 축약되는 지금에 그간 소들은 모두 금우궁으로 멀어져 갔지만 결코 아까워할 이야기가 아니다"
- 연필 한다스(http://motherstory.tistory.com/528)의 글 중에서

“역사의 맥을 짚으면서도 절대 앞세우지 않고”라는 말이 기막히게 다가온다. 연필 한다스님의 혜안을 보며 이상하게 꼬여버린 내 글을 되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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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워낭 -산을 통째로 가는 무명
    from 프요일, 연필 한다스의 책담기 2010-03-27 08:02 
    워낭/이순원/실천문학사/2010.1 그건 소가 사람처럼 대접받던 시절의 일이 아니라 나무가 나무로 대접받고 소가 소로 대접받던, 지금으로부터 두 갑자 전 갑신·을유·병술 연간의 일이었다. '소가 들려주는 그들의 내력'임을 이미 얼핏 듣고 책을 펼쳤다. 난 흙과 풀, 그리고 소에 관심이 많은 황소자리다. 읽은지 얼마되지 않아 등장한 위의 문장에 완독을 결정한다.(여차하면 덮어버리는게 독서 습관이다) 도리없는 휴머니티나 생태주의쯤으로 흐르지 않으리라는..
 
 
연필 한다스 2010-03-27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놓친 부분을 여기서 발견했으니 이 어디 좋지 않은 소통인가요!
 
커피프린스 1호점
이선미 지음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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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 53. 

 <커피프린스 1호점>을 읽고 있다.
 드라마로 만들어져 꽤 인기를 끌었던 소설이었는데 인터넷에 검색해 알아보니 2007년도에 방송된 작품이란다. 내가 이 책을 드라마가 종영될 쯤 구입했으니 먼지 낀 책장 속에서 만3년을 버텨낸 놈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 읽으려고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쉽게 손이 가지는 않았다. 드라마의 인기에 편승해 구입한 소설인지라 방송이 끝나자 그 관심도 시들해졌을 뿐더러 얼핏 들었던 드라마의 분위기가 그다지 매혹적이질 못했다. 커피 가게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젊은이의 사랑놀이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고, 결혼과 함께 점점 들어가는 내 나이도 이런 청춘물을 대하기에는 조금 간지럽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책장에 처박혀있던 소설을 이제야 집어 들었다. 외출에 앞서 2~30분을 타고 가야하는 지하철에서 읽을, 머리 아프지 않고 쉽게 넘어가는 책을 고르던 중이었는데 일반크기의 책 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의 아담한 책을 발견했었다. 다름 아닌 <커피프린스 1호점>.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다지 땡기는 책은 아니었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면 더욱 더 읽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읽기 시작했다.

 412페이지나 되는 제법 두툼한 책인데 어제와 오늘, 53페이지까지 읽은 상황이다. 남녀 한 쌍이 창 넓은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는, 화려하게 일러스트 된 책 표지처럼 가벼우면서 발랄한 느낌이 강하다. 물론 처음에 생각한 내 느낌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빠른 전개와 감각적인 문장은 아무런 고민 없이 책장을 넘기게 했고 외모와 인간성을 두루 갖춘 주인공의 이야기가 권선징악의 옛 글들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의 모습과 오버액션은 만화책을 보는듯한 착각을 일으켰고 즉흥적이고 간결하게 받아치는 대화가 소설의 깊이를 떨어뜨렸다.
 문득, 군대에서 <폴리스>라는 단행본 소설책이 생각났다. 이현세님의 인기 만화 <폴리스>가 드라마로 만들어져 인기를 얻자 이번에는 소설 형식으로 재출판 책으로 기억된다. 이현세가 누구던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만화가 아니던가. 드라마를 열성적으로 시청한 것이 아니어서 소설을 통해서나마 이현세를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기대가 커서인지 실망도 만만찮았다. 대하소설로 꾸며도 될 만큼의 풍부한 이야기꺼리를 두 권의 책으로 묶다보니 이건 뭐, 주인공의 행적을 서술한 사건일지를 보는 듯 밋밋했다. 소설이 갖고 있는 심도 깊은 묘사나 인물들 간의 미묘한 심리변화 없이 표면적인 사건만을 전달하기에 바빴다. 그림이 빠져버린 만화책 같다고나 할까.
 <커피프린스 1호점>을 아직 1/3도 읽지 않은 상황에서 주제넘은 이야기를 쏟아 부은 느낌이다. 글을 쓰는 작가의 엄청난 준비와 노력을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조심스럽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솔직한 내 마음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나저나 이 책을 계속 읽어야 되느냐 하는 문제에 다시 직면한다. 빠르게 넘어가는 재미는 있지만 머릿속에 남는 것이 없다. 눈앞에 놓인 뻥튀기처럼 딱히 먹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습관적으로 손이 간다. 그렇다고 아직 한가득 남은 뻥튀기를 냉장고에 넣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안 먹자니 입이 무료하고...
 아무튼, 이율배반적인 이런 갈등 상황에서도 <커피프린스 1호점> 읽기를 계속하고 있다. 어찌할꺼나~


# 72.

 빠른 이야기 전개가 싫지만은 않다. 머리 쓰지 않아도 되는 단순함이 계속해서 책장을 넘기게 한다. 갑부 집 아들과 미소녀의 사랑이라는 틀에 박힌 공식, 그런 뻔한 스토리라는 걸 알면서 계속해서 읽고 있는 난 뭐지? 깊이가 없다는 둥, 만화 같다는 둥 투덜거리면서도 책을 놓지 못하는 내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 134.

 일단 보류, 유치함을 둘째 치고 며칠 앞으로 다가온 독서토론회를 참석하기 위해 이순영님의 <워낭>을 펼쳐든다. 소 울음소리에 커피향이 묻혀버린 걸까. 귓가를 맴도는 커피왕자의 간지러움 보다는 둔탁하게 들려오는 워낭소리에 더 마음이 가는 게 사실이다. "음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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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콘서트 1 - 노자의 <도덕경>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위대한 사상가 10인과 함께하는 철학의 대향연 철학 콘서트 1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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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학’이라고 하면 일단 어렵고, 난해한데다 일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구름 속의 학문’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내가 심취했던 몇 권의 명상 관련 도서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그저 교과서에나 한번 나올법한 먼 나라 이야기로 치부하고 막연하게 흘려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었다. 동서양의 철학과 사상을 쉽게 풀어놓았다는 소개 글을 보고 초보적인 인문학 공부는 물론이고 <자본론>과 같은 고전에 대한 기초지식도 쌓을 겸 구입했었다.

 <철학 콘서트>에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석가, 공자, 예수, 노자, 마르크스 등 이름만으로 우리를 위축되게 만드는 사상가들이 많이 등장한다. 시험을 위해 외웠던 철학자와 저서가 머릿속에서 남아있기에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각 철학자의 주장과 사회적 배경을 듣자 내가 너무 철학을 막연하게만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지 되짚어보게 되었다.
 여기서는 철학자의 저서와 그들이 살았던 시대상황을 통해 그가 주장한 핵심내용에 접근한다. 한 시대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개선하려는 노력 가운데 등장한 것이 철학이고 사상인데, 그런 통찰 없이 이해하려다보니 철학이 어렵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또한,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철학서, 사회학 혹은 경제학 관련 전문서적들도 줄줄이 만나볼 수 있다. 물론 <도덕경>(노자)처럼 해설서로나마 읽은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초면이다. <논어>(공자)는 한문 수업에 조금 공부했던 기억이 있지만,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향연>, <크리톤>, <파이돈>, <국가>나 <반야심경>(석가), <성서>(예수), <성학십도>(이황), <유토피아>(토마스 모어), <국부론>(애덤 스미스), <자본론>(마르크스)과 같은 경우는 교과서나 텔레비전 퀴즈쇼에서나 들어봤던,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난해한 '경전'과도 같았다.

 하지만 <철학 콘서트>를 읽으면서 고전에 대한 중압감은 점점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간단 명로하고 재치 있는 말투는 철학이라는 어려움을 일상의 언어로 쉽게 풀어낸다. 독자는 그저 흐르는 계곡에 띄어진 낙엽처럼 몸을 맡기면 그만이다. 주변으로 스쳐지나가는 철학의 언저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공부가 된다.
 책을 읽을수록 저자 황광우 님에 대해 생각해본다. 책 뒤표지에 보면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다는데 어디서 이런 통찰이 나왔는지 궁금했다. 거기다 자신의 머릿속에 담긴 생각들을 이토록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하고 설명할 수 있는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알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가 다 이를 설명할 수는 없을 진데 저자는 이를 자연스럽게 해치워버렸다. 오랜 관심과 노력으로 이룩한 그이 해안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여전히 어렵긴 어렵다. 글은 쉽지만 철학이 갖고 있는 원리를 이해하기는 나의 무지가 너무 크다. 수백 페이지의 형이상학적 언어로 구성된 철학서를 몇 페이지의 해설서로 마스터한다는 것은 너무 배부른 소린가?
 어쩌면 한번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철학이라면 그 깊이는 지금과 같이 않았으리라. 도달할 수 없는 더 깊은 곳으로의 사유, 그 사유 속에 철학이, 인생의 깊이가 숨어있지 싶다.
철학,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흘려보내기에는 소중한 울림이 너무 많다. 비록 당장의 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는 세상과 물질, 우리와 나를 둘러볼 수 있는 지혜가 담겨 있지 않을까. 깊은 사유 속으로 나를 던져 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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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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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비야 님의 책은 처음이다. 텔레비전이나 신문, 인터넷을 통해 그 존재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번처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다. 눈앞에서 커피를 한잔 나누며 만났던 것은 아니었지만 글 속에 담겨있는 소소한 일상들은 그녀를 통해 직접 듣는 이야기처럼 진솔했다. 두고두고 읽으며 음미하고 되새기고픈 내용들이 책 속에 가득했다.

 사실 ‘한비야’라는 이름 속에서 느껴지는 오지여행가, 도보여행가, 구호팀장, 강철여성 등 여러 이미지들 때문에 책 읽기를 꺼리기도 했었다. 여성이지만 남성 못지않은 활동을 펼쳐보이던 모습은 일반인들이 범접하기 어려운 고난이도의 인생사처럼 다가왔다. 더욱이 언론이라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비친 모습 때문인지 지나친 명예욕에 사로잡힌 위인쯤으로나 치부해버리고 말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산문집을 읽고 나서는 그런 오해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아니 오해를 넘어 그녀의 '발꼬락 때'까지도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험난하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받는 구호현장을 통해 이를 실천해왔다. 틈틈이 일기를 쓰고 기록을 남기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들이 모여 억척스러워 보이던 그녀의 얼굴을 미소 짓는 천사처럼 보이게 했나보다.

 작년 연말, 화장실에 꽂아두고 틈틈이 보던 것이 벌써 두 번째 다시 읽고 있다. 나를 비워내고 털어내면서 그녀를 만난다. 그 어떤 법문이나 처세술보다 강한 끌림으로 나를 이끌었다.
 한동안 한비야의 매력에서 벗어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한 작가의 책을 몽땅 읽는다는 '전작주의자'처럼, 어느새 나는 한비야 전작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언제고 그녀의 책들을, 아니 그녀의 생각을 꼼꼼히 읽어봐야겠다.
 오늘도 <그건 사랑이었네>을 구입했다. 이번에는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기 위해 구매 버튼을 클릭한다. 비야누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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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박한 공기 속으로
존 크라카우어 지음, 김훈 옮김 / 민음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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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 티베트에서 네팔로 넘어가는 길목에 EBC(에베레스트베이스캠프)를 들른 기억이 난다. 히말라야 산맥의 북쪽, 롱북에서 한참을 들어간 곳에 위치한 그곳은 빙하에서 녹아내린 물이 계곡을 이루며 자갈밭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그 자갈 역시 오랜 시간을 두고 얼음과 물, 바람에 깎여 여기에 이르렀으리라.
 고개를 들자 허연 구름 속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에베레스트가 보였다. 허연 수염이 날리듯 정상을 휘감고 있는 구름은 신비롭다 못해 비장해 보였다. 아, 저기가 바로 인간이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높이, 에베레스트란 말인가!

 에베레스트(8848m)는 1953년 5월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게이(셰르파)가 처음으로 등정한 이래 1970년에는 라인홀트 메스너와 페터 하벨러가 산소호흡기 없이 등정에 성공했고 우리나라는 1977년에 고상돈 대원이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다.
 희박한 공기와 칼바람으로 에워싼 이곳은 수많은 산악인에게 고산등반의 기준점이 되어왔고 지금도 수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에베레스트는 이 모든 도전을 순순히 받아들이진 않았다. 희박한 산소로 인한 고산병과 제트기류를 동반한 눈 폭풍이 많은 이들의 도전의지를 시험했으며 이들 중 몇몇은 얼음산에 묻힌 체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난제들을 하나씩 극복하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도전과 좌절을 통해 등산루트를 개발하고 첨단기술을 통해 장비를 발전시켰다. 특히, 정상까지 안내해주는 상업등반대가 생겨 수천만 원에 이르는 경제적 능력과 고도적응에 필요한 몇 계월간의 시간만 뒷받침 된다면 일반인도 정상에 올라설 수 있게 되었다. 신성해야 할 에베레스트가 자본주의의에 의해 타락되고 있다고 경고한 힐러리의 말처럼, 정직과 끈기를 통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마저도 돈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에베레스트에서 대규모 조난사건이 일어난다. 에베레스트의 대중화와 맞물려 차츰 곪아오던 상업등반대의 문제가 한순간에 터진 것이다.
 “정상에 오른 다섯 명의 동료들 가운데 홀을 포함한 네 사람이 우리가 아직 그 봉우리 높은 데 있는 동안 아무 예고 없이 불어 닥쳐 온 맹렬한 폭풍 속에서 사망했다. 내가 베이스캠프로 내려올 즈음 네 팀의 등반대에서 아홉 명이 사망했으며, 그 달이 가기 전에 다시 세 명이 더 사망했다.” (p17, 머릿말)
 그 현장에 기자로 동행했던 존 크라카우어는 <아웃사이드>에 발표한 내용을 보완하고 정리해 <희박한 공기 속으로>를 엮었다.


 매연 가득한 서울의 거리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KTX에 앉아 칼날같이 차가운 대기 속으로 출발했다. 자동차와 사람이 가득 찬 도심은 이미 에베레스트 남쪽 사면을 내려오는 쿰부빙하로 바뀌어 있었고 몇 페이지를 더 넘긴 뒤에는 새하얀 설빙 속에 숨은 크레바스가 나타났다. 시커먼 속살을 숨긴 하얀 칼자국 위로 가이드와 셰르파들이 설치한 사다리가 보였다.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제1캠프(5,944m), 제2캠프(6,492m), 제3캠프(7,315m)를 거쳐 정상도전의 최종기지 격인 제4캠프(7,925m)에 도착한 우리는 몇 달 전부터 계속된 고도적응훈련에도 불구하고 호흡은 한층 거칠어졌고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차를 마시고 장비를 착용하는 동안 사람들은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이 순간이 오기까지 실로 엄청난 고통을 겪어왔다. 나 역시 더그와 마찬가지로 이틀 전에 제2캠프를 떠난 뒤로 거의 먹지 못했고 자지 못했다. 기침을 할 때마다 가슴의 연골 조직에서는 마치 누군가가 그곳을 칼로 푹 쑤시는 것 같은 격렬한 통증이 일었고 그와 더불어 그런 고통들을 무시해 버리고 계속 오를 수밖에 없었다.” (p238)

 이렇게 시작된 에베레스트 등정은 산 정상에서 수직으로 70m 아래에 있는 힐러리 스텝을 만나면서부터 꼬여들기 시작했다. 힐러리 스텝은 에베레스트 남동루트에서 정상을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15m 높이의 수직암벽으로 고정밧줄도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데다 여러 팀들이 일시에 모이는 바람에 극심한 정체현상이 빚어지고 있었다. 정상 등정시간과 하산시간, 변화무쌍한 산 날씨를 감안한다면 여기서 벗어나 하산하는 길이 최고의 선택이었지만 여기에 모인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기 몸에 닥친 고통과 피로를 무시하고 무조건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종종 심각한 위험이 닥쳐오리라는 걸 예고해주는 징조들도 역시 소홀히 봐 넘기는 경향이 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부딪칠 수밖에 없는 딜레마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혹독하게 밀어붙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면 죽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8,000미터 위에서는 적절한 열정과 무모한 정상 정복열의 경계선이 아주 모호해져 버린다. 그리하여 에베레스트 산비탈에는 시체들이 즐비하다.” (p257)

 결국 사소한 착오와 실수들이 모여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고 말았다. 하지만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당당히 맞서고자 했던 대원들을 보니 나의 삶이, 우리의 삶이 너무 나약하게 느껴졌다. 삶에 대한 끈질긴 애착과 불굴의 투지가 에베레스트의 눈보라를 헤치며 책장 속에 날아든다.
 죽음 앞에서도 가이드로서 자신의 책임감을 잃지 않았던 로브 홀, 스콧 피셔, 앤디 해리스, 그리고 여기선 비록 악역을 담당하고 있지만 후에 미국산악회가 용감한 산악인에게 수여하는 ‘데이비드 솔즈’ 상을 수상해 복권된 브크레예프 역시,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던 산악인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어려움을 헤쳐나간 셰르파들에게도 그 명예를 더하고 싶다.
 특히 8,000m 능선의 희박한 공기와 혹독한 추위를 강인한 정신력으로 싸워 이긴 벡 웨더스에게 박수를 보내며 비록 살아서 내려오진 못했지만 끊임없는 도전으로 자신을 단련했던 더그 한센, 남바 야스코에게도 조의를 표한다.


 어쩌면 여기서 남겨진 이야기는 에베레스트 등반과정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장에 동행했던 기자(존 크라카우어)가 자신의 기억과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사실적으로 적었다지만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날씨와 산소부족으로 인한 환각, 환청으로 인해 다소 왜곡되었을 수도 있으리라. 인터뷰를 했던 생존자과 관련자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데다 몇 달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한 가이드와 동료, 친구들을 평가하는 일이었기에 더없이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탄생한 글이기에 그 가치가 높아지지 않았나 싶다.
 얼마 전 뉴스에서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상업등반대가 출범해 에베레스트로 떠난다고 한다. 아직도 상업등반대에 대한 찬반이 엇갈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이 갖고 있는 존엄성만은 영원히 지켜져야 할 것 같다. 목숨을 담보로 한 모험에 도전하기에 앞서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돌아보고, 죽음과 직면했을 때 당당히 맞설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자문해봐야 하겠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용기는 인간만이 가진 위대함이리라. 그 끝없는 용기에 힘찬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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