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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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나의 내부에 한 그루 나무를 키우려 합니다. 숲이 아님은 물론이고, 정정한 상록수가 못됨도 사실입니다. 비옥한 토양도 못되고 거두어줄 손길도 창백합니다. 염천과 폭우, 엄동한설을 어떻게 견뎌나갈지 아직 걱정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 이 남는 나의 내부에 심은 나무이지만 언젠가는 나의 가슴을 헤치고 외부를 향하여 가지 뻗어야 할 나무입니다.“ (p59)

 통일혁명당 사건(1968)으로 무기징역을 선도 받고 복역(20년 20일)한 신영복 교수님의 옥중 서신으로 옥중에서 하루일과를 통해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려 했던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는 달리 20년의 옥중생활을 시간 순으로 엮어놓았다.
 여기에는 수감생활의 갑갑함이나 반복적인 일상은 물론 부모, 형제에 대한 애틋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또한 사색과 독서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편지글을 통해 세상과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의 모습을 생생히 지켜볼 수 있다.

 하지만 통일혁명당 사건이 정부에 의해 조작된 대표적인 조작사건이 밝혀졌음에도 이에 대한 억울함이나 서운함, 사회에 대한 원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교도소에서 보내온 검열을 거친 서신이라 어느 정도의 제약이 있겠지만 이정도 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감옥이 아니라 어디 산천을 주유하고 돌아온, 20년 동안의 수형생활이 아닌 이 삼일간의 야유회를 다녀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뒤집어놓고 생각하면 수도자 같은 신영복 교수님의 이런 면모가 더욱 책을 빛내는 것 같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하소연 보다는 현재의 생활에 충실함으로써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이 인상 깊다. 사회에 대한 복수심보다는 자신과 가족, 동료에 대한 애정으로 옥살이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과연 나 같았으면 어떻게 보냈을까. 세상과 현실을 저주하며 20년을 보내지는 않았을까. 가족이나 친구는 꼴도 보기 싫고 삶 자체에 대한 회의로 하루하루의 삶도 지탱해나가기 어려웠을 것 같다.

 또한 각각의 편지들은 한편의 시조를 보는 듯 기품이 있고 아름다웠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나 운동장 모퉁이 핀 들꽃, 쇠창살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노래하는 모습은 제한된 공간에 갇힌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옥중생활의 단순함마저도 인간의 품성을 수양하는 도장처럼 느껴질 정도니 말이다.
 유려한 글 못지않게 “정말 효자구나~”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몸은 멀리 철창 속에 유배되어 있을지언정 마음은 언제나 부모님과 형제 곁을 맴돌았다. 아버님께, 어머님께, 형수님께, 계수님께, 동생에게 라는 수신인만 보더라도 그의 관심과 사랑이 온전하게 느껴진다. 겉으로만 부모를 공양하는 것이 아닌 몸속에서 채득된, 이미 삶 자체가 되어버린 듯 했다. 그의 편지는 어쩌면 자신을 돌아보는 글이기에 앞서 부모님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자 하는 극진함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문득 자유로운 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투정과 짜증으로 부모님에 대해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신영복 교수님은 몇 줄의 글로 내 생활 깊숙한 곳에 숨겨진 부끄러움을 일깨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조금 밋밋한 감도 없질 않다. 20년간의 수형생활이 그렇겠지만 삼백여 페이지를 가득 채운 대동소이한 내용들이 읽는 이를 힘들게 했다. 물론 그의 정신이나 책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극적인 매체에 길들여진 탓인지 집중도가 오래가지 못했다.
 그래서 단번에 내쳐 읽기 보다는 몇 달의 기간을 두고,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하지 싶다. 교도소의 단조로움을 통해 일상의 번잡함을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쉬엄쉬엄 읽어야 이 책의 참맛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조금 난해한 문구들도 많이 보인다.
 “저는 새 교도소에 와서 느끼는 이 가등과 긴장을 교도소 특유의 어떤 것, 또는 제 개인의 특별한 경험 내용에서 연유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사물의 모든 관계 속에 항상 있어온 ‘관계 일반의 본질’이 우연한 계기를 만나 잠시 표출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긴장과 갈등을 그것 자체로서 독립된 대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도리어 이것을 통하여 관계 일반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시점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글자에 깃든 의미를 되새겨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이렇게 한참을 궁리해서 들여다보면 그만 이전 글에서 느꼈던 감흥이나 내용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아직은 그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못되는 것 같다.

 1988년 5월 31일 발송된 마지막 편지로 책은 마무리된다. 그가 출소하던 날이 8월 15일이었으니 대략 70여일 전인 샘이다. 책에 실리지 않은 편지글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묘한 감상에 젓게 한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라 눈에 잡힐 듯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던 흑백사진처럼 아련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그의 수감생활이 개인적인 위법행위에 의한 결과물이 아니라 분단이라는 사회적 현실로부터 생겨난 부산물이기에 더욱 그렇지 싶다.
 끝으로 지금도 꾸준하게 활동하고 계시는 신영복 교수님의 건강을 빌어본다.


 ( freeism.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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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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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하게 보이는 일상.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친구의 집에서 본 흉측한 치형(이빨을 교정하기 위해 만든 모형)과 못생긴 아기, 그리고 새 같지 않게 조숙한 공작, 그 속에서 식사를 하는 두 쌍의 부부가 등장하는 <깃털들>.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 함께 있었지만 뭔가 어색하고 단절된 듯 한 분위기다. 이체로움을 넘어선 모호함.
 이어지는 <보존>, <칸막이 객실>은 더욱 아리송하다.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에서 한 부분을 오려낸 것처럼 알듯말듯한 상황만 남긴 체 끝나버린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 작가의 의도는 물론이고 이 책을 옮긴 김연수 님의 생각마저도 궁금해진다. 혹시 놓쳐버린 내용이 있을까 다시 읽어봐도 역시 마찬가지. "뭐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는 아들의 생일날 쓰일 케이크를 주문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며칠 뒤 아들은 뺑소니차에 치어 의식을 잃었고 결국 죽게 된다. 이를 모르는 빵집주인은 케이크를 찾아가라며 아빠와 엄마에게 계속 전화를 해댄다.
 박완서 님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통해 대략적인 줄거리는 알고 있었기에 특별히 새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들을 잃게 된 부부의 먹먹함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정지된 화면을 보는 것 같은 이 느낌은 특정 순간을 치밀하게 묘사해 내는 작가(레이먼드 카버)의 스타일이지 싶었다.

 이런 새로움도 잠시, <비타민>, <조심>, <내가 전화를 거는 곳>, <기차>에서는 작가의 의도를 전혀 종잡을 수 없었다.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은 먹먹함이랄까. 이해할 수 없는 텍스트에 갇혀버린 것 같이 가슴을 무겁다.
 그래서일까. 글자들이 눈을 스쳐지나 갔지만 제대로 읽혀지지는 않는다. 결국 띄엄띄엄 읽어가며 곁눈질로 페이지를 넘겨버렸다. <열>, <굴레>, <대성당> 이렇게 세 단편이 남아있지만 이걸 다 읽어야 하나 하는 한숨부터 나왔다. “그래 글자만 따라갈 바에 더 읽어서 뭐해! 그렇다고 여기서 덮어버리긴 너무 아깝잖아.”
 더는 못 참고 두 편을 건너 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 이 두 단편이 살아남는다면 제가 행복할 겁니다"라고 작가도 말했듯 <대성당>만큼은 좀 틀리겠지 기대하면서...

 <대성당>에서는 아내의 오래된 남자 친구가 찾아온다. 그가 맹인이라는 점과 그녀의 오랜된 친구라는 점에서 영 탐탁치 못했다. 어색해진 저녁 시간, 나는 맹인에게 텔레비전에서 소개되고 있는 대성당을 설명하게 되었고 결국 대성당을 함께 그려보게 되었다. 맹인의 손을 자신에 손에 포개놓은 체. 그리고 맹인의 말에 따라 눈을 감고 그려본다. 그러자 대성당에 와 있기라도 한 듯 신기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전작에 비해 비교적 스토리 라인이 분명해 그나마 다행이다. 뭐랄까, 내 여자의 친구라거나 앞을 못 보는 맹인이라는 선입관이 작은 그림 한 장으로 무너져 내린다. 아니 그 이상의 '소통'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는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도가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이외수 님이 즐겨 말해오던 '심안', 육안을 넘어선 영혼의 눈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눈이라는 허상에 가려 볼 수 없었던 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아름답고 부러운 일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대성당>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난해했다. 미국 문화에 대한 이질감도 약간 느껴진다. 아무튼 잘 이해되지 않는 단편들이었다. 하지만 서술 방식이나 상황 묘사는 미국 소시민의 삶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는, "리얼리즘"의 대가라는 점을 확신시켜 주었다.
 노랑 바탕에 띄엄띄엄 채색된 붉은 색 지붕처럼 짧지만 강한 인상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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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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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그곳은 인간을 몰아낸 동물들의 '해방특구'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이 꿈꿔온 이상과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동물농장을 이끌게 된 나폴레옹(돼지)은 권력이라는 달콤함에 점차 길들여졌고 자신들이 그렇게나 증오했던 인간들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몇몇 동물들을 제외하고는 회초리를 든 대상과 그럴듯한 ‘주의’만 달라졌을 뿐 고되게 반복되는 노동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담긴 미래의 그림이 있었다면 그것은 굶주림과 회초리에서 벗어난 동물들의 사회, 모든 동물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 메이저의 연설이 있던 그날 밤 그녀가 오리새끼들을 보호해 주었듯 강자가 약가를 보호해 주는 그런 사회였다. 그런데 그 사회 대신 찾아온 것은, 아무도 자기 생각을 감히 꺼내놓지 못하고 사나운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돌아다니고 동물들이 무서운 죄를 자백한 다음 갈가리 찢겨죽는 꼴을 보아야 하는 사회였다.” (p78)

 마르크스의 이론으로 무장한 레닌과 스탈린. 그들은 노동자의 힘에 의해 소비에트를 세울 수 있었다. 자본가들의 억압과 수탈로부터 벗어나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같이 일해서 나눠먹는 사회주의를 이룩했다. 하지만 ‘인민해방’은 정치권력을 비호하는 구호에 머물렀을 뿐 인민의 배를 채워주지 못했고 더 많은 노동과 착취를 안겨줬다. 결국 반세기의 시간을 거치면서 쇠락을 거듭했고 종국에는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동물농장>은 한마디로 소련의 생멸과정을 보는 파노라마였다.

 소련은 사라졌지만 우리에게는 '북한'이라는 <동물농장>이 여전히 존재한다. 김일성으로부터 이어지는 3대의 독재는 <동물농장>에 나오는 나폴레옹(돼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본가의 착취로부터 인민을 해방시키겠다는 당초의 목표는 권력의 맛에 길들여진 독재의 그늘 속으로 숨어버렸고 이를 호위하는 집권층의 기득권과 맞물려 철옹성의 권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인민해방'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어떠한 방해물도 용납될 수 없었다.
 앞날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조성해 권력을 유지해 나갔던 나폴레옹의 경우처럼 오늘의 북한 역시 전쟁이라는 심지를 건드리며 우리를, 세계를 자극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보도되고 있는 북한 내의 여러 징후들을 보면 소련과 같은 단계를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권력 누수의 마지막에 있을 무모함이 아닐까. 그렇기에 <동물농장>의 일들이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사회주의자였다는 오웰. 그의 입에서 듣는 비판은 단호하고 냉정했다. 인민 위의 권력은 존재할 수 있는가. 권력을 썩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고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가 추구했다는 ‘진보적 사회주의’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어쩌면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특정 주의(ism)에 대한 문제 보다는 대중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의 속성과 집단주의적 사회현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럼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동물농장>은 없을까? 정치인들의 말 바꾸기와 담함, 온갖 비리와 은폐는 나폴레옹의 독재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지는 않음을 보여준다. 비록 과거와 같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직접적으로 제한하지는 않더라도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삶을 조종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과 복종은 내 자신 속에 감추어진 또 하나의 '동물농장'인지도 알 수 없다.
 권력과 돈, 힘의 논리에 휘둘리는 돼지는 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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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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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염병을 앞세우고 가투에 몸 던졌던 그때 군부독재를 물리치는 '정치민주화'만 꿈꾸었던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고루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경제민주화'도 함께 꿈꾸었다. 노동자들의 열성적인 노동에 힘입어 기업들이 성장하고, 기업들은 양심적으로 투명경영을 하고, 성실하게 세금을 내서 복지 제도와 함께 분배가 잘 이루어져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랐다." (p250)
 하지만 그런 세상은 요원하기만 했다. 기업들은 각종 편법을 동원해 수 천, 수 조원의 비자금을 만들었고 이는 판사와 검사, 국회의원, 공무원, 신문기자에게 들어가 기업의 각종 특혜를 도와주었다. 뇌물의 순환 고리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 몸집을 키워가며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었다.
 "그 탈세한 검은 돈을 이 나라의 모든 권력 기관에다 뿌렸다. 정치인, 법조인, 정부 관료들은 물론이고 언론인, 학자들까지도 그 돈을 받아먹었다. 그러나 놀라지 마라. 재벌을 감시 감독해야 하는 검찰, 국세청, 공정위, 금융감독기관도 모두 그 돈을 달게 먹었다. 이 사태는 무엇을 말하는가. 국가의 모든 권력이 재벌의 손아귀에 들어가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p324)

 <허수아비춤>서 보여지는 기업의 횡포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너무 터무니없어 보였다. '억'이니 '조'니 하는 돈이 수시로 왔다 가는데다, 타인의 모범이 되어야 할 공직자들까지도 그들과 한통속이라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간에서 일어난 뉴스 조각들을 맞춰본다면 <허수아비춤>의 '터무니없는' 그림과 너무도 닮아 있음에 놀라게 된다. 아닐 꺼야, 그렇지는 않겠지 하며 애써 외면해왔던 우리사회의 모순들을 한꺼번에 직면해 버렸다.
 그들은 수익성 좋은 고급 아파트 단지를 짓기 위해서 그곳에 거주하는 영세민들부터 몰아내야했다. 하지만 제시한 보상비로는 다른 곳에 집을 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협상은 진전이 없었고 철거 시한은 점점 다가왔다. 생활터전을 잃게 된 주민들은 임시 막사를 지어 강제철거에 맞섰다. 하지만 공권력까지 동원한 건설사에 맞서기란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가까웠다...
 지역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아닐까싶다. 이런 비상식적인 일들이 현실에서도 엄연히 존재하다 보니 소설 속의 모습의 이야기도 현실적인 모습으로 와 닿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몇 해 전에 김용철 변호사에 의해 불거진 '삼성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삼성이 관리하고 있는 천문학적인 비자금과 삼성 가(家)의 각종 의혹에 대해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사건의 흐름과 전체적인 분위기는 굉장히 유사했다. 아마도 조정래 작가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 특히 경제 분야를 지배하고 있는 어두운 공생관계를 파헤쳐보고자 하지 않았나 싶다.

 조정래 작가는 그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시민단체에서 찾고자 했다.
 "수수 많은 눈들로 정치권을 감시하고, 경제권을 감독하고, 법조계와 공직 사회와 언론계를 눈 부릅뜨고 지켜야만 비로소 전 사회는 맑고 깨끗해져 선진국의 문이 열리게 된다. 시민단체들의 활성화만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열리는 유일한 길이요, 희망이다." (p376)
 이는 자본주의에 단맛에 길들여진 국민 각자의 각성이 전재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리라.
 "세상 사람들 모두가 더욱 잘살기를 바라고, 그래서 '기업이 잘되어야 우리가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 꿈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기업에 대한 관대한 법적 조처에 대해서 별다른 불만이나 저항감 없이 그저 묵묵히 묵인하고 침묵하며 넘어가는 것입니다. (중략) 인간의 마음에서 재물욕이 생생히 살아 있는 한 세상 사람들은 우리 세력에게 충성스럽게 자발적 복종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p416)
 그들의 음흉한 독백처럼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의 생각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해버린 것은 아닐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주의의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돈의 척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던가.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를 생각하니 앞길이 멀게만 보인다. 국민들의 깨어있는 비판정신과 시민단체의 응집된 힘만이 우리사회를 좀 더 건전하게 만들 수 있겠다.

 하지만 사실 나는 시민단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사회적으로 인정된, 교과서에서 봐왔던 기억을 더듬는 수준이었지 그다지 절실하게 느껴보지는 못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갖고 있는 기득권에 대한 일종의 보호심리는 아니었을까. 남들보다 안적적인 가정에서 자라 무리 없이 대학과 직장, 거기다 사회적 지위까지 얻은 지금의 모습을 생각해보더라도 평균 이상의, 상당한 해택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기득권의 수해를 톡톡히 받아온 나에게는 사회비판적인 이런 글들, 특히 기득권층을 강하게 부정하는 글을 어느 정도는 불안정한 심정으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무신경하게 걸어온 삶들이 몇몇 사람들에게는 '권력 세습'이라는 무서운 말로 다가왔을 수도 있었겠다.
 40년 가까이 살아온 나의 생활을 한순간에 바꿀 수야 없겠지만 조금씩이라도 시야를 넓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장을 남겨둔 지금, 미묘하고 복잡한 심정이 스쳐간다...

 <허수아비춤>은 최근에 읽은 황석영 님의 <강남몽>의 경제 발전을 다룬 부분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성장이라는 매개를 통해 일어나는 각종 사건을 파노라마식으로 보여주니 말이다.
 하지만 대기업의 부도덕성에 대한 단초를 제공했던 것에 비해 소설로서는 조금 밋밋했지 싶다. 신문이나 뉴스, 인터넷을 통해 간간히 폭로되는 '그들만의 리그'를 연속선상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은 좋았지만 태백산맥이나 여타 소설에서 보여줬던 인물이나 사건의 깊이는 조금 부족했던 것 같다.
 바람이 불자 허수아비가 춤을 춘다. 여기 저기 누더기로 기워 입은 옷이 어색하고 요란하기만 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화려한 성장 앞에 '주책없이' 흔들리는 서글픈 허수아비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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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 나의 자서전
찰리 채플린 지음, 류현 옮김 / 김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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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방대한 분량이라 첫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었다. 채플린이라는 인물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들고 다니기가 불편하니 쉽게 손이 가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조금씩 뒤로 밀려버린 책이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잠시 들여다보자 이내 빠져버리고 말았다.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책장에 모셔두었던 시간들을 보상이나 하듯이 그의 시간 속으로, 1900년 대 초반의 영화사로 나를 끌어들였다.

 어려웠던 유년기의 시절은 흩어졌던 기억들을 모아 단편적으로 엮어져있다. 그래서 조금 지루한 감도 있었지만 앞으로의 화려한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기에 소홀히 넘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유년 시절을 거치고 두 번째 미국행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좀 더 세밀하게 그를 지켜볼 수 있었다.
 특히 채플린만의 색깔을 지닐 수 있도록 했던 ‘뜨내기 신사’의 탄생 과정이 인상 깊다.
 “의상실로 향하면서 나는 헐렁한 바지, 커다란 구두, 지팡이 그리고 중산모자를 써볼 참이었다. 나는 전체적으로 부조화스러운 것을 생각했다. 헐렁한 바지에 꽉 끼는 상의, 작은 모자에 큼지막한 구두가 좋을 것 같았다.” (p298)
 옛날 어떤 글에서는 그의 뜨내기 콘셉트를 우연의 산물로 매도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는 그의 희극에 대한 열정을 몰라서 하는 소린 것 같다. 배역은 물론 상황과 소품, 카메라 작업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관심과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랜 노력이라는 트레이닝이 그와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냈지 싶다. 
 
“이 인물에 대해 설명드릴 것 같으면, 정말 다재다능한 사람입니다. 뜨내기이면서 신사, 시인, 몽상가인가 하면 외톨이이기도 하죠. 항상 로맨스와 모험을 꿈꿉니다. 그리고 남이 자신을 과학자, 음악가, 공자, 폴로 선수로 알아주었으면 하지요. 그렇지만 겨우 한다는 짓이 담배꽁초나 주워 피우거나 아이들 코 묻은 사탕이나 뺏어 먹는 거예요. 그리고 가끔이기는 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면 부인의 궁둥이도 서슴지 않고 걷어찹니다.” (p300)
 채플린의 인생 역시 그가 창조해낸 뜨내기와 닮아 있었다. 극심했던 가난과 부모님의 이혼, 그리고 어머니의 정신질환, 정착하기 힘든 가난한 극단생활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작은 상의와 헐렁한 바지처럼 궁핍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현실을 거부하지 않았다.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희극배우라는 꿈을 앉고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시켰다.

 미국에서의 영화는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찍는 영화마다 관객들은 웃다가 쓰러졌다. 영화사는 그와 계약하기 위해 엄청난 계약금을 들고 줄을 섰다. 청년 채플린은 순식간에 미국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채플린은 순식간에 획득한 부와 명예가 어색하기만 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알아보는 것 같은데 나만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이 쓸쓸해했다. 카메라 앞에서는 즐거웠지만 대중 앞에서는 언제나 부담스러웠다.
 오히려 이런 모습에 더 애착이 간다. 그의 영화에서 느꼈던 연민이 그의 삶 속에 녹아 있는 것 같아 ‘스타’라는 수식어 뒤에 숨어 있는 인간 채플린을 떠올리게 했다. 대중 속에 외로워했던 그의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는 직장이나 집에서 어떻게든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참담했다. 세상과 아등바등 싸워나갈수록 나를 둘러싼 관계가 하나 둘 단절되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홀로 남겨져 버렸다... 현대를 살아가는 고독이 채플린의 가냘픈 지팡이처럼 위태로웠기에 사람들은 아직 채플린을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화려한 성공 속에서도 좌절의 눈물을 볼 수 있었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지 않았나 싶다.

 <키드>, <황금광 시대>, <서커스>, <시티 라이트> 등을 히트시키며 세기의 아이콘으로 뛰어오른 채플린. 하지만 그를 세계의 스타로 만들었던 무성영화는 점차 유성영화(토키영화)에 밀려 구시대의 유물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물론 그가 만든 작품이 여전히 유성영화를 넘어선 인기를 끌고는 있었지만 시대의 흐름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유성영화는 이미 대세가 되어버렸고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고 있었다. 물론 채플린도 유성영화를 만들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뜨내기가 말을 하는 순간 그는 전혀 딴 사람으로" 바뀔게 뻔했기에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었다.
 유성영화의 위력 앞에 방황하는 채플린. 우여곡절 끝에 제작한 <모던 타임스>가 성공하긴 했지만 무성영화는 여전히 큰 모험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위대한 독재자>의 흥행이 그의 앞길을 열어주는가 했지만 이네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소신과 양심으로 행했던 일들이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왔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조차 모호한 공산주의자라는 모함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파벌주의에 휩쓸려 '미국 추방'이라는 모욕적인 결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우나 오닐과의 결혼(통산 네 번째 결혼)을 통해 삶의 안식을 구하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를 스쳐갔던 수많은 인연들은 순간의 즐거움에 불과했다면 우나와의 만남은 나이나 명예, 돈과는 거리가 먼 깊은 안식이었다. 결국 찰리 채플린이 인생 후반기에 겪게 되는 어려움을 함께 짊어진 우나는 찰리의 죽음까지 지킨 마지막 여인이 되었다.
 화려한 명성과 엄청난 부를 쌓았음에도 늘 허전했던 그가 결국 찾아 헤맨 것은 무성영화의 부활도, 세상에 길이 남을 명작을 만드는 것도 아닌, 어머니 같은 한 여인의 포근한 품속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그가 이룬 업적을 한낮 '모성 회기'라는 정신적인 결과물이라 폄하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자서전이나 평전들을 살펴보더라도 온전한 가정의 따뜻함이 없었던 위인의 삶이 늘 불행하게 마무리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 무리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다.

 찰리 채플린, 그의 명성만큼이나 엄청난 분량을 차지했던 자서전. 다양한 식견으로 꾸밈없이 자신을 드러내 보였던 그였지만 상대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는 데는 조금 인색한 것 같다. 네 번의 결혼에 대한 개인적인(사생활이 아닌 연애관이나 결혼관 등의 인간관계) 부분이나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끝자락에 있었던 그의 견해도 부족한 느낌이다. 자신을 내팽개쳤던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좀 더 솔직한 이야기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또한, 시간 순으로 정리된 사실들이 조금은 식상했다. 언제 무엇을 했고 누구를 만났는가 하는 식의 이야기가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의 내밀한 면을 접해보고자 했던 독자에게는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이 자서전이 1964년에 처음 출판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금 앞선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미 있는 몇몇의 사건이나 기억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하긴, 수십 년 전의 사건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여기에 살을 붙인다는 것이 만만치는 않았으리라. 시간이 지나면서 윤색되고 희석되어진 사건들도 많았을 테고 여기에 등장하는 영화사 관계자, 영화배우, 친구, 가족들이 대부분 생존해 있을 당시였으니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떠나보낸 '스타'를 생각하자니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의 겉모습(행적이나 업적)보다는 내면적인 이야기를 더 알고 싶은 게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사후에 다른 작가에 의해 해당 인물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조사해서 쓴 평전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다. 비록 본인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는 없다지만 오랜 자료수집과 연구 끝에 기술된 내용이기에 개인이 갖는 기억의 한계로부터 많이 벗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채플린의 '솔직한 육성'은 조금 아쉬웠다.

 흑백 무성영화에서 봤던 뜨내기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커다란 구두를 뒤뚱거리며 옮겨놓는 그의 뒷모습과 오른 손에서 경쾌하고 돌리고 있는 지팡이의 모습, 콧수염을 씰룩거리며 여린 눈망울을 글썽이던 채플린의 모습은 여전히 나를 미소 짓게 만든다.
 그의 인생은 많은 곡절로 마감되었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영화들은 여전히 사람들을 울고 웃게 했다. 그가 사랑했던, 꿈꿔오던 모든 이상은 수십억의 조작으로 나뉘어 세상을 남아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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