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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 개정판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전태일과의 만남
... 아직은 무어라 말할 수 없네...시대를 뛰어넘은 거리감에서 오는 무심...불행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약간의 거리감...주위 어른들의 시시콜콜한 과거사를 들을 때의 왠지 모를 거부감. 어쩌면 이 거부감은 그렇게나 불완전했던 여건 속에서 나보다도 더 당당히 살아가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나의 초라함일 수도...
책 속에 간간이 첨가된 전태일의 생전의 사진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홍경인의 라스트 신(분신 장면)이 자주 오버랩 됨을 느낀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던 화염 속에서의 외침... 그의 죽음에 대한 나의 무감각으로 그의 이야기 <전태일 평전>을 읽기 시작한다.
그의 사상이나 노동운동 이전에, 책 속에 삽입된 전태일이 쓴 일기라든가 그가 구상중인 소설을 볼 때면 느껴지는 초라함.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낙서라는 것에서도 전태일의 생각과 감정이 느껴지는 글들. 핵심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차근차근 풀어쓴 글들. 중학교도 제대로 못나온 사람의 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놀랍다. 대학까지 나온 나, 우리들의 어휘력을 훨 뛰어넘는 글과 생각...
글이란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반영하여 나온 산물. 하지만 전태일처럼 어려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런 알찬 자신을 키울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마음을 부유하게 가졌고, 그 넘쳐나는 마음을 세상 속에 사랑으로 실천했기에 그 삶의 가치만큼 글에 무게가 실리는 게 아닌가 싶다. 거기다 학력은 비록 짧았지만 그 열의만큼은 어떤 이들보다 크기에 항상 생각하고 느끼며, 읽고 그리고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노동자들의 '인간임'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 아니 세상의 위선과 허영에 불을 지른 투사를 앞에 놓고 그의 사상이나 투쟁의 가치를 논하기보다는 그의 글빨만을 얘기하고 있다니...
대학생 정도면 이 같은 노동문제도 한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내 자신 내부의 채찍으로 읽기 시작한 책. 하지만 여전히 나는 전태일을 이해하기 힘들고, 전태일 역시 날 이해하기 힘들고... 배부른 소가 읽는 배고픈 소크라테스 이야기라는 느낌마저 든다.
이 평전이 가치 없다거나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단지... 글이 나의 마음에 진심으로 와 닿지가 않는다는 것. 그의 현실과는 다른 환경에서 자라나고 길들여진데서 오는 거리감...
이런 내 모습을 부끄러워해야 하나, 어째야 하나... 현실적인 문제에 둔감한 나 자신이 아쉽다. 어쩌면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가난과 인간에 대한 사랑, 노력과 좌절, 노동운동. 그리고 전태일의 죽음. 죽음만이 전태일이 할 수 있었던 마지막 투쟁이었는가. 아니면 죽음을 통해 새로운 투쟁을 시작하려는 것이었는가... 죽어야만 되는 현실, 죽어서도 편히 눈감을 수 없었던 전태일...
죽음... 무엇이 전태일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 구조화된 사회의 모순, 암묵적인 억압과 무의식적 굴종. 스스로의 나약함과 모든 문제를 주변 환경의 책임으로만 전가하는 회피. 그리고... 어쩌면 나 자신이 가진 현실에 대한 무지와 타인에 대한 외면... 우리 모두가 공범자...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한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간 우리시대의 아픔. 전태일의 용기와 열정, 그리고 사랑... 책을 덮을 즈음에야 그의 말들이 하나 둘 이해되기 시작한다. 어떻게 자신과 이웃을 사랑해야하며, 무엇을 만들고 찾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누구 한사람의 것이 아닌 모든 이웃들의 사회라는 것을...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던 그 뜻이 설명하기 힘든 약간의 공감대로 나에게 전해진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지금 없지만 그 정신은 영원해야 할 것이다. '투사'로서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전태일이 더 큰 부분으로 나에게 남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