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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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노사이드 : 특정 집단을 절멸시킬 목적으로 그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는 행위 "
 
  <제노사이드>에 등장하는 "인류의 멸망 요인에 대한 연구와 정책으로의 제언"이라는 제목의 <하이즈먼 리포트>에는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 다섯 가지 요인으로 우주적인 규모의 화재, 지구적인 규모의 환경 변동, 핵전쟁, 역병: 바이러스 위협 및 생물 병기, 그리고 인류의 진화를 꼽고 있다. 
  인류의 멸망을 이야기할 때 주로 다뤄지는 운석충돌, 자전축 변경, 핵전쟁, 전염병 같이 이야기와는 달리 다섯 번째 요인인 '인류의 진화'는 조금 생소하게 보인다. 하지만 진화의 선상에서유인원과 나누어진 이후 생멸을 거듭하며 급격하게 발전해온 현생인류의 궤적을 본다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어 보인다.
  즉, 인류는 계속 진화하고 있으며 어느 순간 급격하게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인류'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새로 태어나는 신인류의 입장에서 본다는 자연파괴와 전쟁을 일삼는 현생인류는 지구에서 마땅히 사라져버려야 할 종인 것이다.

  <제노사이드>는 아프리카 콩고에서 탄생한 신인류를 제거하려는 정보기관과 이를 지키려는 학자 사이의 미스터리 소설로 미국과 일본, 아프리카를 오가며 방대하게 펼쳐진다.
  폐포 상피 세포 경화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아들을 둔 존 예거. 그는 아들의 막대한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외국에서 용병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본 적이 없는 생물'과 피어스 박사, 그 주변의 부족 사람들을 말살하라는 임무를 띠고 아프리카 콩고에 침투해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폐포 상피 세포 경화증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개발하다 갑자기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약을 완성시키려는 아들 고가 겐토가 정보기관과 정체불명의 집단으로부터 추적을 당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한편 콩고에 침투한 예거 일행은 암살 목표였던 피어스 박사의 곁에 맴도는 이상한 생명체를 발견한다. 어린아이 정도의 몸짓의 이 생명체는 원인모를 유전자 변이를 통해 피그미족 부부에게서 태어난 '신인류'였던 것. 그렇다면 현생인류보다 탁월한 지적능력과 통찰력, 초월적인 도덕성을 지닌 이 생명체는 <하이즈먼 리포트>에서 우려한 인류종말의 씨앗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제노사이드>에서 인류는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를 부정하거나 말살하려고만 했다. 자신의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생물학적인 반응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라는, 이성과 감정의 조화를 통해 문명을 발전시켜왔다는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지나치게 단순하면서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나 이외의 존재에 대해 제노사이드와 같은 방법 이외에는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무식하고 꽉 막힌 존재였던가. 
  인간이란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세계 공영을 위해 보다 근본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스스로 답하고 싶지만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되돌아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대화와 타협보다는 주먹이 먼저인 세상에는 끊임없이 폭력이 벌어지고 있고, 세계인의 무관심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전쟁으로 죽어가고 있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갈등이 증폭되고 급기야 착취나 폭동, 테러, 전쟁과 같은 상처로 다가오고 마는 것이다.

  "새로운 인류가 나타났다면, 기쁜 일이지. 현생인류는 탄생한 지 20만 년이나 지나도 서로 죽이는 걸 멈출 수 없는 딱하디 딱한 지적 생명체네. 살육 병기를 모아서 서로를 위협하지 않으면 공존할 수 없는 이 현재 상황이야말로 인류가 가진 윤리의 한계였던 거지. 슬슬 다음 존재에게 이 행성을 넘겨줘도 좋을 때라고 생각하네."  
  다섯 가지 요인으로 인류의 멸망을 경고했던 하이즈먼 박사의 말처럼 우리는 공멸의 길만 남은 것인가.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면부지의 이웃을 돕기 위한 모금활동이 성황을 이루기도 하고, 기아와 질병,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자원한 봉사원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존중과 배려, 사랑이라는 따뜻한 마음이 남아있다.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동물적인 적개심을 인간이라면 갖고 있을 이타심으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으리라.
 
  "진화한 존재로부터 보면 인간은 불쌍해 보일 정도로 하찮은 지력 정도밖에 없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눈살을 찌푸리고 싶을 정도로 야비한 생각밖에 없는 존재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주어진 모든 생물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이 획득한 최선의 능력이었다. 최선을 다해 이 불완전한 뇌를 연마하며 여려 곤란한 상황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
  인간을 불완전하지만 충분한 가능성을 존재로 직시하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신약 개발에 박차를 가했던 고가 겐토와 신인류를 지키려던 피어스 박사와 위독한 아들을 위해 이들을 돕게 된 예거는 또다른 희망을 찾아 새로운 길을 떠난다.
  소설을 가득 메운 집단학살(제노사이드)의 여운과 현생인류와 신인류 사이에 급박하게 전개되는 두뇌싸움은 600여 페이지의 분량도 지루하게 느껴지질 않았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출세작이었던 <13계단>의 치밀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 www.freeism.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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