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 숟가락 하나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현기영 지음 / 실천문학사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을 쓰는 행위가 무의식의 지층을 쪼는 곡괭이질과 다름없을진대, 곡괭이 끝에 과거의 생생한 파편이 걸려들 때마다, 나는 마치 그때 그 순간을 다시 한 번 사는 것처럼 희열에 휩싸이는 것이다.” (p133)

제주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현기영님의 자전적 이야기로 소설속의 말처럼 차분하면서 애틋한 마음으로 그때의 파편들을 일궈낸다.
마치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는 흑백영상들처럼 투박하고 정겹게 다가온다. 하얀 저고리를 입고 물동을 이고 가는 아낙이나 동생을 업은 코흘리개 아이, 한쪽 팔을 크게 흔들며 제기차기에 열중인 아이의 모습들이 깜빡이는 화면 속에서 뒤뚱거리며 다가온다.

하지만 그 속에는 제주도의 4.3사태와 6.25전쟁과 같은 역사의 어두운 조각들도 존재하기에 늘 아름답지만은 않다.
아직 어린 나이기에 4.3사태의 역사적 의미보다는 검붉은 잿더미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그러다 할아버지와 가족들, 이웃의 눈물과 곡소리를 통해 그 실체를 어렴풋이 알아간다. 그리고 전쟁의 발발과 함께 몰려든 피난민을 통해 또 한번의 사회적 아픔과도 대면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라던가~ 아직은 어리기에 그 슬픈 흔적들도 쉽게 치유되는가 싶다.
역사의 그늘이 있지만 그 속에서 철없이 뛰어놀던 어린 동심은 소설의 중, 후반으로 가면서 이성에 눈뜨기 시작한 ‘홍당무 소년’으로 바뀐다. 수줍고도 아름다운, 하지만 혼란스러운 사춘기의 소년, 그 소년의 원색적인 엉큼함마저 감미롭게 다가온다.
어릴 적 친구와 함께 옥상에 올라 동네 골목길을 바라보며,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지나가는 누나들과 아줌마의 씰룩거리는 엉덩이를 보면서 킥킥거리던 일들이 수줍게 기억난다.

특히 그 시기(사춘기)에 보였던 ‘문학적 성숙단계’가 눈에 띈다.
4.3사태의 암울한 상황과 몇 번의 병치레에서 오는 허허로움을 스스로 감내하면서 글쓰기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는 모습이 인상 깊다. 소설 속 베르테르처럼 우울하고, 고독한 지성인의 모습을 흉내 내려는 어눌한 모습까지도 아름답게 보인다.
“나도 한번 우울해져볼까?”하는 작위적 욕심마저 들게 한다.

정형화된 사무실의 끈끈한 오후, 나는 제주도의 푸른 파도소리를 듣는다.
해안에 부딪혀 조각난 바다의 파편은 잔잔하고 감미롭게 내 마음을 적신다.
현기영님이 미치도록 부럽다. 그 부러움의 끝을 이 책으로나마 공유할 수 있어 행복하다.

(www.freeis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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