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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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12월 31일, 직장에서 신년 계획을 논의하는 작은 회의를 마치고는 술을 먹었다. 처음에는 수육으로 시작되었고 2차는 어묵탕과 조개를 소주와 마셨다. 평소 같으면 3차 이상을 달렸을 자리지만 내일 중요한 일정이 있었던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요한 일정이란 다름 아닌 입원. 1월 2일 예정된 수술이라 하루 전인 1월 1일에 병원행이 예약되어 있었던 것인데, 작년 11월, 몇 년 전부터 이상 신호는 있었지만 큰 불편이나 통증이 없었기에 차일피일 미뤘던 진료를 시작하며 어렵게 잡아놓았다.
  아무튼, 입원과 수술을 마치고 병실에 누워있은 것이 벌써 열흘이 다 되어간다. 2020년 첫날부터 병실에 기숙하며 먹고, 자고, 싸기를 반복하며 침대충으로 지내다 보니 도대체 할 일이 있어야지... 그래서 집에 모아놓은 영화도 보고, 폰질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한 블로그 이웃의 2019년 한 해를 돌아보는 쓴 글을 보던 중 “아무튼, ○○○”로 시작되는 책을 몇 권 보게 되었다. 그래서 당장 인터넷 서점에서 이 단어를 키워드로 검색해봤더니 <아무튼, 피트니스>, <아무튼, 서재>, <아무튼, 기타>, <아무튼, 문구>, <아무튼, 떡뽁이> 등 무려 25종의 아무튼 시리즈가 나와 있었다.
  마침, 문병 오는 집사람이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간다기에 한 잔 부탁했다. 안 그래도 병실에서 치맥이 생각났었는데 말이다. 뭐 이렇게라도 술 내음을 맡을 수 있다니 병원 생활의 무료함을 조금은 달랠 수 있겠다.

  <아무튼, 술>에는 김혼비 작가의 개인적인 술 경험담이 맛깔나게 실려있다. 동네 대포집에서 듣는 친구의 술 무용담처럼 재밌고 흥겹다. 언제 처음 술을 마셨고, 어떻게 필름이 끊겼는지를 이야기하고 술로 맺어진 T와의 인연과 친구들과의 에피소드를 소주, 맥주, 막걸리, 양주, 와인과 함께 풀어 놓았다.
  병실에 누워있는 틈틈이 지루하지 않게 읽었다. 몸은 갑갑한 병실에 갇혀 있지만, 마음은 1차 소맥, 2차 소주, 3차 맥주를 향해 달려 나간다. 오른쪽 팔뚝에 꽂혀있는 링거에는 맑은 수액이 아닌 차디찬 소주 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의 첫 술은 대학 합격자가 발표가 있던 날, 반 친구의 전화를 받고 나가 마신 맥주가 첨이지 싶다. 열 명 정도의 친구들이 부산의 한 대학가 앞에 모여 축하주를 마셨던 기억이 난다. 술 맛을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합격 속에 감추어진 대학 생활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기에 술자리 자체의 기억은 없지만 많이 마신 것 같지는 않다.
  아마 본격적인 술은 대학교 신입생 때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학과, 동문회, 동아리 등 선배나 동기들과 어울려 매일 퍼마신 기억이 난다. 조금 급하게 퍼마시던 성격이라 2차가 시작될 즈음에는 이미 곯아떨어져 버리기 일쑤였고, 이 술자리가 파할 때쯤 부활해 집에 가려는 지인들은 붙잡고 다시 술판을 벌이기도 했다.
  소개팅이나 중매를 위해 커피숍에 갔을 때도 2차는 언제나 맥줏집이었다. 뻘쭘하고 어렵던 첫 만남이었지만 맥주라도 한잔 들어가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술술 나오기 시작했고, 차감된 외모 점수도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다.
  직장생활도 술 비중이 컸다. 일이 끝나면 직장 상사를 안주로 맥주와 소주로 시켰다. 마음이 맞는 동료와 함께 한 잔씩 기울이며 이해할 수 없는 현실과 불안한 미래를 달랬다. 사흘에 한 번꼴로 소집되는 이 방과후활동(?)을 위해 하루를 버티고, 내일을 준비했다.

 

  이렇게 즐기던 술은 며칠째 못 마시고 있다. 하긴, 병원 치료나 의사의 처방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오래 금주해본 적이 없으니, 어쩌면 ‘미필적 금주’라고 해야 할까. 물론 갑갑하고 건조한 공간에 오래 있다 보니 선선한 해질녘이 되면 시원한 생맥주가 그립기는 하지만, 병원이라는 마실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그렇게 생각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퍼마신 술은 알코올 자체의 끌림보다는 술자리 속에 곁들여진 사람들이 그리워서가 아닐까 싶다.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과 만나더라도 말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고 듣고만 있는 편인데도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고 가는 시끌벅적한 분위기 자체를 좋아했던 것 같다.
  <어쩌다, 술>은 술 자체의 화학적 반응보다는 술자리를 통해 일어나고 생각났던, 일어날 일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까 싶다.

 

 

(www.freeis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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