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vs 화가 - 사랑과 우정, 증오의 이름으로 얽힌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
허나영 지음 / 은행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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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엇 vs 무엇>이 새로운 출판기획의 시도가 되고 있는 것 같다. 김영사에서 지식인 마을 시리즈로 출판되는 100권의 책도 바로 사상적으로 계승적 관계이거나 대립적 관계에 있는 두명의 지식인들을 대립시켜 그들의 사상의 배경이 되는 삶을 이야기 해줌으로 그 사상이 쉽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출판기획을 통해 전문가들의 소유물이였던 전문지식을 대중들에게 쉽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도 이러한 기획의도와 같고 또 이 책 <화가 vs 화가> 또한 같은 맥락에서의 기획의도를 가지는 것 같다.

 

이렇게 두사람을 대비시켜 놓는 것은 몇가지 분명한 장점이 있다. 첫째 작가들의 사상이나 예술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그들의 삶을, 대비되는 인물을 통해서 더욱 부각시키므로 사상이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배경을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둘째 예술가들이 누구의 영향을 받아서 어떻게 그것을 계승했는지 예술사의 흐름에 대해서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이야기 중심으로 되어있어서 어렵거나 딱딱하지 않게 재밌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 <화가 vs 화가>는 22명의 화가들이 세가지 분류로 나누어 두명씩 대비시키고 있다.

 

친구, 변치 않는 우정의 예술 동업자들

에두하르 마네 vs 클로드 모네

구스타프 클림트 vs 에곤 쉴레

바실리 칸딘스키 vs 파울 클레

백남준 vs 요셉 보이스

 

라이벌, 치열한 경쟁자들의 이름

기베르티 vs 브루넬레스키

레오나르도 다 빈치 vs 미켈란젤로

빈센트 반 고흐 vs 폴 고갱

파블로 피카소 vs 앙리 마티스

 

연인, 영혼을 태우는 사랑의 포로들

오귀스트 로댕 vs 까미유 끌로델

디에고 리베라 vs 프리다 칼로

운보 김기창 vs 우향 박래현

 

이들이 모두가 흥미있고 예술을 사랑하고 많은 부분에서 배울만한 사람들이지만 나에게 특별히 관심을 끄는 인물들은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음악을 사랑한 미술가였고 음악을 미술로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미술보다 음악의 예술적 가치를 좀더 높게 평가하는 나에게 음악과 미술을 서로 연결하고자 하는 두 사람의 시도가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는 모두가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칸딘스키는 다방면에 걸쳐 재능이 있었고 자신의 예술 이론서를 집필하는 매우 뛰어난 화가였다. 그는 그 당시 굉장히 파격적인 음악을 시도했던 쇤베르키의 음악에 대한 인상을 그림으로 남겼다. 칸딘스키는 음악에 통해 받은 감상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파울 클레 또한 고전음악에 심취한 음악 매니아로 바흐의 음악을 듣고 그 느낌을 옮긴 <바흐의 스타일로>로 유명하다. 파울 클레의 그림은 밝은 색을 써서 화려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형상을 파괴하고 자신이 새로운 시각으로 형상을 재배치하여 그리는 화법으로 유명하다. 파울 클레의 그림은 따뜻하고 기하학적이다.

 

나는 그림을 잘모른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이 인류 문화의 꽃으로 인간에게 풍성함과 기름짐을 남겨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이 예술을 감상하고 소비하므로 좀더 풍성한 인간이 되고 풍성한 삶을 누리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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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팔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조영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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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소설읽기는 하나의 도전임에 틀림없다. 주로 한문장 한문장에 밀도있는 내용이 있는 인문서적을 주로 읽어서 그런지 문학이 주는 장황하고 세밀하고 긴 묘사는 때로는 지루하게 느낄때가 많았다. 그래서 소설을 끝까지 다 읽는 것은 나에게 매우 큰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였다. 문학이 주는 길고 깊은 심연을 부드럽게 건드리는 감동과 여운을 알기에 문학읽기는 나에게 큰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해 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을 보고 다시한번 세계문학에 도전해 보려고 마음먹고 잡은 책이 바로 일본 근대문학의 기수이자 근대문학의 형태를 확립한 나쓰메 소세키의 <한눈팔기>이다. 일본문학을 선택한 것은 최근에 일본여행을 다녀와서 일본의 오밀조밀하고 일본인들의 작고 친절한 매력에 빠졌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나라 일본의 문학과 일본성을 알고 싶어서 <한눈팔기>라는 책을 선택해서 완독하게 되었다.

 

일단 책을 읽어나가면서 작가가 가장 중점에 두었던 것은 주인공 겐조와 그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심리묘사와 감정의 미묘한 변화를 메우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이 책의 가장 첫장면을 그의 양부인 시마다와 만나는 장면이다. 인물을 밝히지 않은채 그와 스쳐지나가면서 느끼는 미묘한 감정과 느낌과 인물의 묘사는 분명 이 인물이 소설전체를 이끌고 나갈 뭔가 문제의 인물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그리고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을 주었다. 그리고 아내와의 시시하면서도 마음깊이 일어나는 사소한 감정까지도 분명히 포착하였고 주인공 rps조의 사회적 위치와 금전적 어려움에서 오는 감정의 변화까지도 상세히 포착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 일단 이름이 재밌다. 일본식 발음은 우리식으로 무엇가 욕설같은 느낌을 주어서 그런지 이 작가의 이름이 입에 유쾌하게 딱 달라붙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본의 위대한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 근대문학의 형태를 확립한 대문호이자 지난 천년간 일본인이 가장 사랑한 작가’라는 극찬의 평가가 이 책 뒷표지에 적혀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소세키 이후에 단 한 사람의 소세키도 태어나지 않았다’라는 일본 한작가의 평가가 올려져 있다. 단지 소설가 한사람 이상의 역할을 해낸 것이 분명하였다. 작가는 메이지 시대의 인물이라고 한다. 메이지 시대가 시작될 때 태어나서 메이지 시대가 끝날때쯤 사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본 근대를 살아간 온전한 인물이며 그 변화의 시기에 영국을 유학한 근대적 지식인으로서의 고민과 근대를 이끌어온 대표적인 인물이였다. 그가 쓴 많은 소설이 있지만 이 책 <한눈팔기>는 작가의 전기적 내용이며 그의 인물됨과 삶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자전적 소설이다. 그래서 이 책을 번역한 조영석 교수는 나쓰메 소세키를 읽기 위해서 <한눈팔기>는 입문서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먼저 <한눈팔기>를 읽으면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는 많은 일본문학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의 사후에도 뒷표지의 평가와 같이 많은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강상중 교수는 그의 책을 통해서 나쓰메 소세키를 소개하고 그의 소설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그를 소개하고 있다. 강상중 교수가 이 작가에 대한 매우 좋은 평가를 내린 것이 또한 이 작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된 계기가 되었다.

 

<한눈팔기>를 읽다보면 전체적으로 흐르는 어떤 소설적 분위기가 있다. 그것은 내성적이고 우울하고 회색적이고 어둡고 소심하고 쫀쫀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작가의 내면을 가장 잘 묘사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인물하나하나가 각각의 상황속에서 그것을 다르게 받아들이며 느끼는 외로움, 고독감, 이해받지 못하는 서글픔 등을 무덤덤하면서도 우울하면서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해가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인간의 보편적 감정, 관계속에서 드러나는 섬세한 감정들을 가장 잘 포착한 작가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섬세한 감정의 묘사가 읽는이로 하여금 지겨움과 내성적 감상을 느끼게하는 이유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많은 자식들중 막내로 태어나 어쩔수 없이 짐으로 느껴진 주인공 겐조. 이 소설에서는 이러한 소설적 배경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살짝 보여질 뿐이다. 그래서 대화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그것을 통해서 겐조의 가정적 배경을 포착해야 한다. 처음에는 이야기의 흐름이 잘 잡히지 않다가 중반을 지나면서 양부 시마다가 겐조를 찾아오고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서 겐조의 이러한 가정적 배경이 드러났을때부터 이 소설은 주인공의 내면의 감정적 변화가 좀더 깊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주인공 겐조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동일화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시마다라는 사람에게 억지로 입양되고 양부 시마다가 그의 부인과 이혼함으로 다시 가난한 자기 집으로 돌아오게되는 참으로 기가막힌 인생을 살게된다. 그런 상황속에서 겐조는 스스로 반듯하게 자라게 되었고 일본 최초로 영국 유학까지 다녀와서 나름대로 지식인로써의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수성가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그의 성격은 좀더 고지식하고 배움이 없는 사람들, 특히 아내를 무시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무시도 표면적으로 사람들을 깔보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으로써의 허위의식 속에 철저히 감추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어쩌면 그는 늘 자기는 버려진 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항상 그 안에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잠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스스로 남들에게 의지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랑받은 기억이 없고 늘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겐조는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남편과 아버지로써 사랑을 주지 못하는 인물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릴적 억눌린 기억과 억압된 감정으로 인한 상처였던 것이다. 받은 적도 없고 준적도 없는 사랑, 단지 그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을 뿐 겐조라는 인물 자체가 그렇게 나쁜 인물은 아니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지식인이라는 이면에 그러한 차가움과 냉정함을 스스로 감추며 더 외로운 존재로 전락했을 지도 모른다. 소설 전체에서 겐조에게는 지식인의 허울밑에 감추어진 고독과 외로움의 그림자가 깊게 달려붙어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겐조의 주변인물들과 관계중 가장 안타깝고 공감적이면서도 읽는내내 왜 그랬을까하는 심정을 갖게한 것은 그의 아내 오스미와의 관계였다. 서로에게 사랑이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는 둘의 관계를 통해서 작가는 정밀한 감정과 의식의 묘사와 미묘한 부부사이의 갈등과 사랑과 애정의 관계를 탁월하게 결합해 놓았다. 부부관계가 다를바 없구나하고 공감을 느끼면서도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아내가 필요하고 말없이 자기를 도와주는 아내를 소중하게 느끼면서도 배움이 없다는 이유로 늘 무시하는 겐조. 그러나 아내가 임신으로 인해 가끔 생명이 위독해 질때면 지식인의 딱딱한 허위의식속에서 죽은 것 같았던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을 마지못해 비쳐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속에서 지식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만으로 자신을 세우려고 하는 소심하고 못난 외골수적인 겐조의 모습이 살짝 나의 모습에 투영되어졌다.

 

그의 아내 오스미는 겐조처럼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남편을 귀찮게 하거나 눈치가 없는 무식한 스타일이 아니며 남편을 깊이 사랑하지는 못하지만 옆에서 조용히 남편을 돕는 전형적인 일본인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았을때는 그의 아내 오스미는 함께 살아갈 때 아무런 어려움을 주지 않는 좋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겐조의 지식인으로써의 자존심과 허위의식을 알기에 말없이 그를 도와주면서도 남편의 무뚝뚝함과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고있지만 그것 또한 마음 깊이 감추며 사는 현명한 여자라고 생각한다. 겐조는 그녀의 배움없음을 무시하지만 그러한 무시하는 마음 역시도 참된 지식인으로써의 눈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겐조의 복잡다단한 어린시절의 아픔과 우울함과 그것을 지식인으로 감추려는 허위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 소설에서 가장 백미가 겐조와 아내 오스미의 대화의 섬세한 감정의 묘사라고 생각하며 이 소설에서 나오는 인물중에서 겐조의 아내 오스미가 가장 애정이 가는 인물이였다. 안스러움과 사랑의 마음의 공존하는 그런 인물이였다. 이 부부의 관계를 통해서 동양적인 부부관이 서로 비슷함을 느낄수 있었다.

 

그 외의 인물들과의 관계도 인간관과 인간관계의 세세한 점을 볼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아파서 항상 누워있으면서도 눈치없이 말이 많은 겐조의 누이. 그리고 그 누이를 조금도 돌보지 않는 철없는 매형. 시다미와 겐조와 결혼할 뻔 한 오누이. 등 많지 않은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주인공 겐조의 쓸쓸함이 더욱 부각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 소설의 결말은 아무런 결론을 맺지 못하고 끝난다. 가장 궁금했던 아내 오스미와의 관계를 어떠했는지, 그리고 형과 누이는 어찌되었으며 시다마는 계속 나타났는지..등등 하지만 이 소설을 명확하게 끝맺지 않는다. 책장을 덮었을 때 쓸쓸함과 허전함이 내 마음속에 불고 지나갔다..

 

이 책은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자전적 소설이다. 작가의 삶을 보면 참 많은 삶의 무게를 지니고 살았던 인물이였음을 알수 있다. 작가는 바로 겐조였다. 그러한 삶의 무게를 통해서 그는 더욱 자신의 내면 깊이 들어갔으며 지식인이라는 실존을 가지고 살았으며 그토록 깊이 있게 인간의 내면을 간파하는 내적 통찰력을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이 책이 이야기거리가 풍성하여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지 못하지만 작가가 주는 삶에 대한 인간에 대한 고민과 깊은 내성적 들여다봄은 읽는이로 하여금 우리네 인생과 삶이란 한바탕 불고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라는 쓸쓸한 삶의 교훈적 잔상을 남겨주기에 충분한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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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닉 교회 - 언약의 뿌리를 찾아서
로버트 D. 하이들러 지음, 진현우 옮김 / WLI Korea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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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었던 신앙서적중에 가장 유익하면서도 도전적이고 충격적인 책이다. 제목은 ‘메시아닉 교회’, 부제는 ‘언약의 뿌리를 찾아서’이다. 성경에 대한 상당한 식견과 깊은 신앙이 없으면 이 책은 아마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생소한 책일 것이다. 내가 10년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지금만큼 유익하거나 신성한 충격은 없었을 것이다. 현재의 교회모습은 과연 어떠한 역사적 전통위에서 세워진 것일까? 우리가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형식들, 그리고 교권제도들, 교회정치, 그리고 매년 지키는 교회력들. 이 책은 이러한 현재 교회의 모습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교회사 자료를 바탕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원래 교회의 뿌리는 어떠해야 하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이스라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복음의 매우 중심적인 주제라는 것을 알게된 것을 10년전쯤이다. 성경을 읽다가 히브리서 4장의 안식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것을 한 선배에게 물어보았을 때 그 선배는 그가 만든 이스라엘을 공부하는 모임을 소개해 주었다. 그곳에 참석하고 나서 내가 그동안 가졌던 하나님과 복음 그리고 열방의 관계에 대한 실마리를 찾게되었다. 나는 이스라엘과의 만남을 두 번째 부르심이라고 스스로 부른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발견은 성경을 보는 눈을 뜨게해 주었고 성경을 유대적인 관점으로 그리고 현대 중동문제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실로 나에게는 천지개벽과 같은 경험이었다. 그러면서 교회론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정말 참된 복음과 참된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을 조금씩 찾아나가게 되었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공부하면서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는 바로 주후 1세기 바로 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였다. 현대 기독교 용어로 그것을 메시아닉 교회의 회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이 책은 교회의 뿌리가 되는 주후 1세기의 교회, 즉 메시아닉 교회에 대해서 연구하고 그것의 모습이 현재의 교회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참된 복음의 능력과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의 유대적인 유산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먼저 교회의 초기 모습은 어떠한가? 초대 교회 멤버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였다. 유대인들이라고 하면 유대교의 전통들과 절기들을 지키는 유대교인들을 말한다. 초기교회에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알려졌고 초기교회의 모습에는 자연스럽게 유대교 전통과 기독교 전통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구분적은 성직제도는 없었고 예배는 자연스럽게 인도자들에 의해 인도되고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면 자연스럽게 가진 은사에 따라 사역을 하여 몸을 세워나갔다. 이것이 초기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큰 힘이였다. 그러한 모습이 3백년까지 지속되다가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의 역사가 로마제국을 이기자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다. 그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모진 핍박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칙령에 의해 멈추게 된 것을 기뻐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승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때부터 기독교를 황제종교로 만들기 위해 이교적 관습을 기독교에 접목시키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성직자와 평신도의 이분법적인 구분과 조직적인 예배방식, 그리고 여러 가지 종교풍습들이 혼합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때부터 황제적 예배방식에 따라 유대교적인 방법들과 실천들이 이단시 되면서 철저하기 기독교와 유대교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교회사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가 있는 거의 모든 공의회는 표면상으로는 교리의 연합과 이단의 문제로 모였지만 많은 부분은 기독교 생명의 핵심이였던 유대적 관습을 철저히 배격하는데 있었다. 공의회에서 결정된 반유대적 관습에 대한 금지는 다음과 같다.

 

* 안디옥 공의회(A.D. 345) - "만약 이 결의 후에, 감히 유대인들처럼 유월절을 준수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가 주교건 장로건, 또는 부제건 간에 공의회 판사들은 그들을 교회로부터 파문시키고 저주할(아나테마) 것이다. 이 공의회는 그자들의 지위를 박탈할 뿐 아니라, 감히 그자들과 연락을 취하려는 자들의 지위까지도 모두 박탈할 것이다.“

 

*라오디게아 공의회(A.D. 365) - "유대인들이 주최하는 만찬에 참가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만약 그 누구라도 유대주의자라는 것이 발견되면, 그 자를 그리스도로부터 파문시키고 저주할 것이다.“

 

* 프랑스, 아그드 공의회(506) - “성직자들은 유대인들의 잔치에 참가해서는 안된다”

 

* 제10차 톨레도 공의회(7세기경) - “부활절은 한결같이 지켜야 한다, 단 유월절 기간이 아닌, 니케아 신조에서 결의된 기간에”

 

*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 - “공공연하게, 혹은 비밀스럽게 안식일을 지키고 다른 유대인들의 관행들을 따르는 자들은 영성체에도, 기도에도, 그리고 교회에서도 받아들여져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공의회로 인해 철저히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주의 임재가 충만한 초대교회는 유대적 유산과 분리됨으로 인해 원래의 생명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분리는 A.D. 70년경 로마가 유대인들을 공격할 때 기독교인들이 함께 싸우지 않으므로 역사적으로 완전한 분리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러한 분리는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로마서 9~10장과 에베소서 2장에 보면 하나님의 제사장이며 맏아들인 이스라엘은 세상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빛과 말씀을 전하는 자로 이방에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리스도안에서 복음으로 하나될 때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충만한 복음의 역사가 있다고 말한다.

 

저자 로버트 하이들러는 현재의 교회가 유대적 유산을 잃어버림으로 인해 매우 중요한 성경적 유산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먼저는 하나님에 대한 히브리적 태도이며 둘째는 성경에 대한 히브리적 태도, 셋째는 가정에 대한 히브리적 태도, 넷째는 삶에대한 히브지적 태도의 상실이 그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히브리적 태도는 경외하고 공경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적 유산과 교회가 분리됨에 따라 교회는 하나님에 대해서 공경하는 태도가 아니라 분석하는 태도로 바뀜으로 하나님의 생명력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삶에 대해서도 히브리적 태도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생각하고 그것을 즐기지만 현대인들은 그것을 던져진 무지한 것으로 여겨 삶을 매우 모호하게 만들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생은 무의미하게 던져진 것이라고 했다. 바로 정확하게 히브리적 삶의 태도와 반대되는 사상이다.

 

저자는 현대교회가 종교개혁과 여러 가지 은사성령운동을 통해서 교회의 원래모습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원래 뿌리인 유대적 유산을 아직도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 유대적 회복 운동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백 투 예루살렘(Back to the Jerusalem) 운동을 비롯해서 영화 회복(Restoration), 그리고 여러 이스라엘 회복 선교단체(IMN 등)들이 일어남으로 매우 급속도로 마지막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즉 교회를 원래의 뿌리인 유대적 유산에 접붙임 하므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흥이 일어나도록 준비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현재의 교회는 분명 어떤 한계에 와있다. 원래 교회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고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다. 전통과 전통으로 쌓아올려진 지금 교회의 모습은 이제 그 한계를 보이고 여러 가지 새로운 교회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원래 교회의 뿌리는 유대적 유산의 일부이며 교회가 그것을 회복할 때 진정한 교회의 모습, 생명력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운동력있는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이 책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오랜 의문들, 왜 유대적 유산을 회복해야 하는지, 대체신학이 무엇인지, 지금 지키고 있는 교회력의 기원은 무엇인지, 그리고 유대적 유산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유대적 절기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현대 교회에 접목시켜야 할지에 대한 많은 답을 주었다. 현재 교회는 회복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매우 단순하고 실제적이며 하나님에 의해 의도된 유대적인 뿌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가장 성경적이고 교회를 교회되게하는 마지막 성경적 지도인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며, 모든 세상의 소망이며 생명의 원동력이다. 이 교회가 타락하고 생명력을 잃어버릴 때 세상의 역사는 어둠의 역사의 길을 걷게된다. 그것이 바로 중세사의 모습이다.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 하나님의 임재의 집으로 회복해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지금은 교회가 뿌리리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이 책은 나에게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슴이 뛰고 열정이 솟아올랐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것을 선포하는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을 말이다.

 

그 회복의 일부는 메시아닉 유대교의 부흥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그들의 메시아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교회의 회복을 갈망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는 이교회된 교회에는 거할 수 없다. 그분께서는 교회를 그 뿌리로 다시 부르고 계시며, 우리의 잃어버린 유산을 회복시키고 계신다. 그분의 교회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의 풍성함을 누리는 “한 새사람”이 되게 하실 것이다.(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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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2-12-18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 ^^
 
행복의 조건 - 하버드대학교. 인간성장보고서, 그들은 어떻게 오래도록 행복했을까?
조지 E. 베일런트 지음, 이덕남 옮김, 이시형 감수 / 프런티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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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싫었다. 젊은이가 행복이라는 평범한 단어를 좇아가는 것은 젊음에 대한 죄악이라 스스로 생각하면 성공과 성취, 그리고 꿈을 좇아 달려나갔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자아의 좁은 골방에 갇혀 평범한 인생들과 옹기종기 앉아 스스로 위로하는 자아도취적이고 자기 폐쇄적인 단어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늘 행복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돌렸고 외면했다. 그러나 인생의 어려운 고비고비를 만날때 마다 나에게 간절히 찾아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외면했던 행복이라는 파랑새가 나에게도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였다. 그토록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던 행복이라는 단어가 나에게도 절실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행복이라는 것이 누구나가 원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인생의 진리를 터득할 만큼 인생을 살아왔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날 근처 시립도서관에서 우연히 <행복의 조건>이라는 책을 집어 들고 첫부분을 읽기 시작했는데 굉장한 흡입력이 있었고 인생에 대해, 행복에 대해서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손에 잡힐 수 있는 실체로 나에게 보여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 바로 책을 사서 단숨에 읽기 시작했다.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지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마다 답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단어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이 책 <행복의 조건>은 주관적인 행복이라는 단어를 객관적인 연구를 통해서 상당히 행복의 실체에 근접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 행복에 관한 공식을 찾는 연구는 하버드 대학교 연구팀이 1930년말에 입학한 2학년생 268명의 삶을 72년 동안 추적하면서 지속적으로 면담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방대를 데이터를 분석 연구한 것을 조지 베일런트가 이어받으면서 점차로 숙성해갔다. 조지 베일런트는 행복의 조건을 연구하면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많고 적은가'보다는 '그 고통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그의 연구분석도구는 '무의식적 방어기제'였다. 모든 인간에게 있는 자기 보호본능인 '자기방어기제'를 얼마나 잘 사용하여 고통에 융통성있게 대처하는가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 연구는 3가지 집단을 대상으로 이루어 졌는데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남자 집단. IQ가 높은 천재 여성으로 구성된 터먼 집단, 어린 시절 범죄에 빠지지 않고 성공한 이너시티 집단이 그것이다. 그리고 단지 표본대상의 일정 기간동안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연구를 하므로 빠질 수 있는 오류에서 벗어나 상당히 행복의 실체에 근접한 결론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 행복연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행복에 대한 조건의 기본상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특히 유년시절 좋은 부모밑에서 좋은 양육과 보호를 받으며 자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행복해질 조건이 좋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서 행복해 질 가능성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이가 들면서 충분히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행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음을 말해 주었다. 어릴적 아버지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은 나는 항상 내 인생에 따라다니는 벗을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를 아버지 탓으로 돌리며 바꿀 수 없는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성인기에 접어들면서 유년기의 어두운 과거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사례를 앤서니 피렐리라는 한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어두운 유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특별한 사람이 가진 능력이 아니라 생애 순간순간마다 자기방어기제를 긍정적으로 사용하며 사람과 인생에 대해 성숙하게 반응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반응할 때 어두운 유년시절의 과거는 하나의 작은 그림자로 추억될 수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과거도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많은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이 책에서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일곱가지로 꼽았다. 첫 번째는 고통에 대응하는 성숙한 방어기제이고 이어서 교육, 결혼생활, 금연, 금주, 운동, 알맞은 체중이 그것이였다. 결국 한 인간의 인생이라는 것은 주어진 조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생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반응할 때 스스로 인생을 조직할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결국 태생적으로 주어진 조건들은 스스로 극복할 수 있으면 지나온 인생의 족적들은 모두가 스스로가 만들어 온 것이라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결혼생활과 인간관계는 행복의 결정적인 요소로 47세까지 만들어 놓은 인간관계망이 그 이후의 행복을 결정한다고 한다. 결혼생활의 질도 결국은 배우자간의 깊은 관계가 결정하는 것으로 행복은 곧 인간관계라는 공식을 이 책을 통해서 설정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그렇게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내가 말할 수는 것은 남는 것은 성공이나 업적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가 성취한 것도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을때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다. 관계가 행복의 필수 요소라면 얼마나 열심히 인간관계를 가꾸어 나가야 하겠는가. 가장 내 옆에 있어서 소홀하기 쉬운 내 가족이 또 다른 나의 자아라로 생각하면 그들을 가꾸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인생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면 타인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요, 타인이 곧 나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책에서 보여주는 행복의 조건이라는 것은 결코 물질적인 것에 있지 않고 한 인간이 자기 주위에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있는 인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것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행복의 극치는 자신을 타인에게 내어주며 봉사하는 나이듦의 미학을 이루어 나갈때 인생의 희노애락을 자기의 인격안에서 특별한 의미로 녹일 줄 아는 통합에 있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행복의 파랑새가 찾아온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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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의 역사 살림지식총서 15
정진농 지음 / 살림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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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하면 먼저는 저 유명한 에드워드 사이드가 떠오른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적인 시각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는데 이 용어 자체에 이미 서구 우월주의가 내포되어 있는, 동양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우울한 용어이다. 가치중립적 이여야 할 학문 용어 자체에 이런 편견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슬픈일이 아닌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정의를 볼려만 당연히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봐야 겠지만 그 책을 보면 3중으로 질린다. 두께에 질리고, 빽빽한 글씨에 질리고, 별로 끌리지 않는 표지와 편집에 질린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서 관심이 가고 읽고 싶은데 이 책은 너무 두꺼워 엄두가 나지 않고, 그래서 선택한 책이 얇고 비교적 간략하게 요약된 이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역사>는 살림지식총서 15번재 책으로 몇권의 살림지식총서를 읽은 나에게 그런데로 만족감을 주었다. 살림지식총서는 90~100페이지 이내로 쓰여진 것으로 분량은 작지만 그래도 꽤 밀도있고 깊이있는 총서이더라.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들을 자기 스스로를 재현할 수 없고, 재현되어져야 한다." 이 말을 칼 마르크스의 말로 '그들'은 동양인을 말한다. 이 한 문장안에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가 어떤 색깔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이 말은 "동양에는 문화가 없고 역사가 없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동양에 대한 서양의 오만한 시각이 깔려있다. 동과 서가 서가 갈라진 역사적 배경은 로마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면서 서로마가 유럽문명의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서방'이라 불리게 되었고 동로마는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세계로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고 근래에는 근동, 중동, 극동 아시아 지역을 총칭하는 용어로 '동방'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양과 서양은 그 간극이 더해져 서로 대극적 타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루드야드 키플링의 시 '동과 서의 발라드'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오,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 그 둘은 결코 만날 수 없으리. 신의 위대한 심판의 자리에 하늘과 땅이 필히 서게 될 때까지는."

 

이렇게 서로에 대해 철저히 타자였던 동양과 서양은 서양이 먼저 동양을 발견하면서 서양의 관점에서 동양을 연구하고 지식을 축적하게 되는데 그 배경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서양 제국주의에서 부터 시작하게되었다. 이후로 서양은 제국적 지배의 강화와 무역, 그리고 선교를 위해 동양에 있는 많은 문헌들을 번역하고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동양이 서양에 봇물처럼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인도의 신비적인 종교와 철학은 서양인들을 매료시켰고 볼테르나 쇼펜하우어, 바그너, 니체등과 같은 유명한 서양지식인들에 의해 소개되고 강화되었다. 특히 바그너는 서양의 유대-기독교의 종말을 고하면서 이 종교의 편협한 도그마에 비해 불교의 교리가 얼마나 숭엄하고 만족스러운지를 한 지인에게 보편 편지에 썼으며, 붓다의 생애에 기초한 [승리자]라는 오페라까지 만들기도 했다. 또한 현대 프랑스 철학으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던 철학의 자양분이 되는 니체의 철학이 바로 불교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밝혀지면서 동양의 자양분이 서양에 유입되고 흡수되면서 서양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드러나고 있다.

 

리처드 니스벳은 그의 저서 <생각의 차이>에서 서양의 사고방식은 분석이며 동양의 사고방식은 종합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서양은 개체를 중요시하고 동양은 관계를 중요시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서양철학은 존재론 중심이며, 동양철학은 관계론 중심인 것이다. 서양과 동양이 한쪽이 어느 한쪽을 지배하고 정의하고 재단하는 오만에서 벗어나 각각의 사고와 문화를 수용, 발전시켜 더욱 풍부한 인류 문화를 꽃피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양방언의 음악을 들어보라. 동양과 서양의 아름다운 만남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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