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중순부터 "써야지" 했던 논문을 드디어 어제 탈고했다. 6월 말까지 쓰려던 계획이 산산조각난 건 순전히 윔블던 때문, 결국 난 이번 월요일날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며 논문을 끝낼 수 있었다. 오늘 아침, 지도교수한테 논문을 제출하며 어찌나 기쁘던지, 천안에 내려가 매운탕에 낮술을 한 잔 했다. 한창 논문을 쓰던 감각이 살아났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인데, 오늘 쓴 논문이 의미있는 건 공동으로 한 연구가 아닌, 나 혼자의 힘으로 일군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하고 싶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연구를 하니까 좋긴 한데, 남들처럼 연구비를 따서 한 게 아니라 월급을 털어서 한 거라 생활이 좀 궁핍했졌다. 연구원 분한테 "돈 아끼지 말라"고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이따금씩 지불하는 돈이 크게 느껴진다. 어제는 피펫과 슬라이드박스 값으로 15만원을, 오늘은 저번에 찍은 전자현미경 값으로 20만원을 지불했는데, 시시때때로 지불하는 쥐값과 시약값 등을 합치면 꽤 많은 돈을 썼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다행인 건 윔블던 기간 중 집구석에만 있느라 돈을 별로 안쓴 것인데, 이게 다행일 수만은 없는 게 윔블던이 끝난 이번주부터 다시금 술 행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술을 잠시 동안 끊는 건 아랫돌 빼서 윗돌을 궤는-이거 표현이 맞는지?-거라, 금주 기간이 끝나면 엄청난 술 폭풍이 몰려오곤 한다. 그럴 때면 "술은 역시 평소에 착실하게 마셔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술일기를 통 안썼더니 도대체 지금 몇번이나 마셨는지 파악이 안된다. 부디 작년보다 나은 올해가 되었기를.

-할머니의 상태가 좀 심각해졌다. 집구석에서 테니스만 보는 내게 오셔서 말을 붙이는 건 이상할 게 없지만, 말의 내용이 좀 이상해졌다. "벌레가 기어다녀 한잠도 못잤다"거나 "벌레 때문에 백만원짜리가 천원짜리로 변해 버렸다"고 한탄하는 걸 들으니 이것이 치매구나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할머니를 돌보는 분은 할머니가 떼를 쓰는 통에 심신이 지친 상태, 일주일간 휴가를 다녀온 뒤에도 힘들어 죽겠는 표정이다. 결국 우리는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했는데, 엊그제인가 집에 와보니 할머니가 짐을 싸고 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할머니가 "엄마가 나더러 요양원에 가야 한다고 하기에"라고 하시던데, 그게 어찌나 안스러운지 눈물이 나올 뻔했다. 할머니는 늘 손자인 날 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시는데, 난 할머니를 볼 때마다 가식적인 응대를 하곤 내 갈 길을 가곤 했다. 할머니가 젊으실 때 내게 베푼 사랑을 생각하면 내가 좀 잘해야 하는데, 어찌된 게 그때 일은 싹 까먹고 당장의 귀찮음만 떠올리는지, 내가 자식 무용론을 펴는 이유는 순전 나 때문이다.

-할머니에게 어느 곳이 좋을까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일산 근처에 괜찮은 곳을 발견했다. 의사가 상주하는, 그러니까 병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그런 곳이고, 이용자들의 평도 괜찮은 듯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종교단체에서 하는, 의왕시에 있다는 좀 싼 곳을 생각하고 계신다. 그곳이 30만원 싸기 때문인데, 지금 우리집이 아주 어렵거나 그런 건 아니니 그 정도 돈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음에도 어머니와의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는다. 일산이면 우리가 쉽게 갈 수 있고, 또 괜찮은 곳에 모셔야 우리 맘이 좀 편하지 않느냐는 게 내 주장인데, 어머니한테 별반 보태드리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사실 좀 죄송하긴 하다. 사실 어머니가 그러시는 게 당신이 호사롭게 살기 위함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더 많이 물려주기 위함,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다시 한번 이런 생각이 든다. 자식은 다 소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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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1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7-07-28 10:05   좋아요 0 | URL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수술 했다고 끝이 아닌 거 아시죠? 이제부터 한팀이 되어 병마의 잔재와 싸워 나가야 한답니다. 화이팅!

마늘빵 2007-07-11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왜 연구비를 부리님 돈으로 내세요? -_- 어마어마할텐데 조금씩 나가긴해도. 다른 사람들은 연구비 따도 일부를 삥땅쳐먹는데 부리님은 너무 하세요. 청구하세요.

부리 2007-07-28 10:03   좋아요 0 | URL
어, 그니까 다른 분들은 연구비를 따서 연구를 하는데요 전 연구비를 못딴 관계로....ㅠㅠ 제 돈으로 연구하는 수밖에 없다는....

承姸 2007-07-11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드디어 논문을 끝내셨군요.
중간과정이 길고 지루할수록 끝내고나면 더 시원할거에요.
그간 고생 많으셨어요.오늘밤은 홀가분하게 즐기세요.
하지만 술은 적당히...하심 좋겠어요.

그리고 할머님은 편안한 곳으로 모시는게 좋을 듯하네요.
어머님과 이야기 잘 하셔서 좋은 쪽으로 결론을 내길 바래요.

부리 2007-07-28 10:02   좋아요 0 | URL
지금은 새로운 논문을 쓰고 있답니다 논문킹 부리! 아자아자

Joule 2007-07-11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저도 일산 노인 병원 광고를 몇 번 보고 저희 아빠 병원을 그곳으로 옮기는 게 어떻냐고 언니에게 물었다가 뜨끔한 말을 들었지요.저야 일산에 계시면 제가 좀 자주 가서 들여다 보겠다고 한 건데, 저희 언니는 저를 안 믿더라구요. 저희 집은 형제가 많아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보태고 있습니다. (십시일반이라고 해봤자 대개는 언니들과 잘 나가는 막내 동생이 돈을 거의 다 내고 있는 실정이긴 하지만서도요.) 병원 시설이 안 좋으면 신경이 아무래도 많이 쓰이나 봐요. 모셔다 놓고도 마음도 안 편하고. 저희 언니가 그렇더라구요.

부리 2007-07-28 10:02   좋아요 0 | URL
그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글구.... 가깝다고 자주 들여다보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마음이겠지요. 그나저나 쥴님을 볼 때마다 대단하단 생각이 들어요..

Mephistopheles 2007-07-11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자식을 좀 더 키워보고 자식이 정말 소용없는지 소용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부리 2007-07-28 10:01   좋아요 0 | URL
음, 전 소용없는지 어케 알았냐면...저희들이 엄니한테하는 걸 보고 알았답니다.^^

2007-07-11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7-07-28 09:59   좋아요 0 | URL
아, 제 오랜 친구 xxxx님, 애정어린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충분히 고려해서 결정할께요

다락방 2007-07-1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앞으로의 술폭풍에 몸이 상하지 않으셔야 할텐데요.
저도 이왕이면 좀더 시설 좋은 곳으로 모시는게 나을 듯 한데, 부디 어머님과 의견차이 좁히셨으면 좋겠네요. 할머니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울컥해진다는 파란여우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부리 2007-07-28 09:58   좋아요 0 | URL
술폭풍은 지나갔구요 지금은 견딜만큼만 마신답니다^^ 전 다락방님 얘기만 나오면 울컥 대신 두근거린다는....^^

비자림 2007-07-11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쓰셨네요. 그래도 마음이 개운하시죠? 당분간 푹 쉬시며 에너지 충전하시길!

근데 할머님 일로 어머님도 걱정이 많으시겠네요. 그런 경우를 안 겪어봤지만 대학 2학년때까지 증조할머니랑 한 방을 쓴 경험이 있어 할머니 이야기가 나오면 남의 일 같지 않아요.

비로그인 2007-07-11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할머니를 돌봐주시는 분을 격일간이나 그런식으로 나눠서 하시면 안될까요? 아무리 자주 들여다 본다고 해도요...

춤추는인생. 2007-07-12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리사랑이라고들 하는데. 그게 남는분에게는 씁쓸한 일이 되어버리는것 같아요. 할머님이 눈치채지 않으시게 잘 해결되시길....

아참 부리님 사진 이제야 봤어요 춤인생에게 굉장히 호감가는 외모를 지니셨어요^^



2007-07-12 0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적오리 2007-07-12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문 쓰시고 후련하신 님이 무지 부럽습니다요.
그리고 할머님은...님에게 후회가 가장 적을 방법이 좋겠죠? 어떻든 내가 최선을 다했나라는 후회는 있을 테지만요...
글코 보니 가끔 용돈이나 드리는 걸로 손녀의 도리를 떼우고 있는 저도 반성하게 됩니다.;;;

꽃양배추 2007-07-12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유령놀이. 할머니 말씀이 카프카적이에요.ㅋ 벌레 때문에 백만원짜리가 천원짜리로 변해 버렸다니. 효성 지극한 부리님..

마노아 2007-07-12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모로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좀 푹 쉬셔야 할 텐데 두루두루 마음 쓰이는 일들이 있군요. 할머니 일은 참 안타까워요. ㅠ.ㅠ

미즈행복 2007-07-16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효자시네요.
저는 용돈은 커녕, 전화도 안드리는데...
내리사랑? 다들 내리사랑이 맞다고 하는데 글쎄, 내리사랑이 의심스러운 경우도 많더라고요.
가족? 가장 정의내리기 어려운 단어같아요. 힘들고...

부리 2007-07-28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즈행복님/열이틀만의 댓글입니다^^ 제가 여기 글에 쓰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평소 전 할머니한테 잘 못해드립니다. 가족에 대해서는 저 역시 어렵답니다^^
마노아님/저야 뭐 늘 잘 쉰답니다 님이야말로 휴식이 필요할 듯...
꽃양배추님/오 제가 존경하는 양배추님. 카프카적이라는 님의 표현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 게 내공이군요!
해적님/전 용돈도 잘 안드리는데... 드리면 다 삼촌한테 빼앗겨서요..
속삭님/아아.... 상태 안좋으면 내쫓길 수도 있군요....
춤인생님/마지막 구절이 절 기쁘게 합니다. 흠, 님의 눈은 참 특이하세요^^
너구리님/음, 그게 말입니다 엄니가 너무 돈을 안쓰시려고 해서요...
비자림님/님 말씀대로 푹 쉬었...지는 않지만 하여간 말씀 감사합니다!! 증조할머니랑 한방이라니 상상이 안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