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답게 연일 내리는 비 때문에 통 테니스를 치지 못했다. 게다가 일요일도 비 예보가 있다. 그러던 터라 간만에 해가 뜬 토요일날, 한번 치자는 클럽 사람의 제안이 더없이 반가웠다. 사람이 많이 안나올 것 같아 난 친구를 데려갔고, 햇볕은 좀 덜했지만 습도가 높아 짜증스런 날씨 속에서 다섯 게임인가를 쳤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어느덧 4시 40분, 그곳은 삼성동이었고 난 6시에 신촌에서 약속이 있었다. 마침 테니스 코트에 샤워실이 딸려 있기에 친구와 난 거기서 간단히 씻고 가기로 했는데, 문제는 빤스였다. 원래 계획은 두세시까지 치다가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약속장소에 가는 거여서 여벌의 빤스를 준비하지 않았던 것. 갈아입을 티셔츠와 긴바지는 있었지만 빤스가 없다. 역시 빤스를 준비 안한 친구에게 말했다.
“요 앞에 편의점 있잖아. 거기서 하나씩 사자.”
난 그에게 내 사이즈를 말해줬고, 친구는 자기 혼자 갔다오겠다며 홀연히 떠났다.
잠시 후 돌아온 내 친구는 큰 소리로 말했다.
“백오 사이즈가 없어서 100짜리 두 개 샀어. 두군데나 들렀는데 백오는 없더라.”
그 바람에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내 사이즈를 알게 됐고, 몇몇은 내가 105씩이나 되냐고 놀랐다. 난 됐다고, 그냥 젖은 걸 입겠다고 했다. 샤워를 끝내고 옷을 입는데 친구가 다시 꼬신다.
“그냥 입지 그래? 이게 좀 크게 나온 것 같은데.”
난 다시금 거절했다. 내가 입었다가 작으면 버려야 하니까. 게다가 내가 입어 찢어지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한 몇 년간 그 얘기를 울궈먹을 게 아닌가. 젖은 빤스를 입으며 생각했다. 105가 그렇게 특대 사이즈는 아닌데, 아무리 편의점이라지만 100과 105를 골고루 갖춰놔야 되는 게 아니냐고. 옛날만 해도 95를 입었었는데. 샤워를 하고 나면 보통 크기의 타월로 허리를 두르고 다녔었는데. 옛날보다 현재를 더 사랑하는 나지만, 가끔은 옛날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