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시: 4월 23일(월)

마신 양: 맥주 3천 + 알파

 

한동안 미자 얘기를 하지 않은 건 일이 내 생각대로 잘 풀려서는 아니었다. 거듭 말하지만 미자는 강적이었고, 난 너무도 무력했다.


지난주 화요일은 미자가 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그 전날, 미자가 공부하기 싫다면서 서점에 가서 책을 사고, “이 책만 읽고 공부하겠다.”는 말을 해도 난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시험과 올림픽은 분명 다르지만, 난 미자가 시험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화요일 오후 미자가 “저 시험 안봤어요”라는 문자를 날렸을 때, 얼마나 힘이 빠졌는지 모른다. 미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심한 소리를 했다. “평생 그렇게 방구석에 쳐박혀 살거냐?”고. 네 주위에는 아무도 없게 될 거라고. 난 그때 반쯤 미자를 포기했었다. 그래도 내 넋두리가 통했는지 미자는 목요일과 금요일 시험에 들어갔지만, 전날 별로 공부를 안해서 시험을 잘본 건 아닌 듯했다.


그리고 다시 월요일. 지난 주말에 서울에 올라간 미자가 여전히 집구석에 있으며, 예의 그 방콕 모드를 취하고 있다는 걸 알자 화가 울컥 났다.

“오늘 오후 8시까지 내려와요. 마음 단단히 먹고.”

미자는 내 요구에 따라 주었다. 난 미자를 데리고 백석대 근처 ‘각오 단단히 해’인가, 하여간 그날 술자리의 취지에 맞는 이름을 가진 술집에 들어갔다.

“오늘 우리 술 마시다 죽읍시다.”

미자에게 말했다.

“전 원래 다른 사람에게 술을 권하지 않습니다. 특히 여자한텐 절대로 강요하지 않죠. 하지만 오늘은 한번 붙어 봅시다.”

미자는, 자신이 술이 센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난 컨디션이 안좋지만-저녁 먹을 때 소주를 다섯잔 쯤 마셨고, 아직 기력이 회복되지 않았다-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저를 술로 이긴다면 내일 학교를 그만두던 공부를 때려치던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저한테 진다면 내일부터 공부하세요.”


2천cc씩 세 번을 시켰다. 미자는 차츰 힘들어하는 기색이었다. 나라고 힘이 안든 건 아니었다. 요즘 운동을 열심히 해서 살이 빠진 느낌이었는데, 맥주라니! 네 번째 2천을 시켰다. 반쯤 마셨을 때 미자가 말했다.

“제가 졌어요. 저 정말 공부할께요.”

난 쓰러지기 전까지 믿을 수 없다면서 계속 술을 권했다. 미자는 정말로 졌다면서 한번만 봐달라고 했다. 난 미자를 데려다주고 연구실에 왔고, 일요일날 못본 <행복한 여자>의 다시보기를 틀었다. 기억이 하나도 안나는 걸로 보아 2분도 채 못보고 잠이 들었나보다. 새벽 4시 반, 잠에서 깼을 때 난 연구실 소파에 기댄 채였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라꾸라꾸 침대를 폈고, 두시간을 더 잤다. 사우나를 다녀왔지만 오전 내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역시 맥주는 뒤끝이 안좋다. 소주가 최고다.


* 아침에 미자로부터 문자가 왔다.

“교수님마저 절 포기하시면 안되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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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4-24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다시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알라디너 특공대를 파견하여
릴레이로 술을 먹여버립시다.!!

레와 2007-04-24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번쩍!!
저도 릴레이 주자로 나서겠습니다.- !!!

비로그인 2007-04-24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핫- 재밌다 :)

부리님, 저하고도 술내기 한 번 하시죠.
저도 한 술 하는데 내기해서 이긴 사람 부탁 한 가지 들어주기,
어때요?(도전장 ^^)

마노아 2007-04-24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틱해요. 부리님 화이팅입니다! 멋진 스승이셔요^^

세실 2007-04-24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멋진 교수님~ 울 교수님은 그저 '이번에 대학원생이 스커트 선물했어요. 꽤 비싼 건데....여러분 아시죠? 나래** 꺼' 늘 이런 이야기만 하셨어요. 선물을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무스탕 2007-04-24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먹는내기... 그 중에 술 먹기... -_-
미자양 문자 절대 지우지 마시고 꼭꼭 보관해 두셨다 수시로 상기시켜주세요.
[여아일언중천금] 이라고요!!

물만두 2007-04-24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술로써 제자를 바른길로... 잘하셨다고 해야겠죠^^

클리오 2007-04-24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많은 방법 중 술로 이끄시다니.. 그리구요, 지난번부터 말씀드릴까말까 했는데.. 그 학생은 이제 성인이구, 의대다니는 것보다 어쩌면 더 좋은 인생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힘들게 정말,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실 수 있나요. 중고등학교 교사들도 힘든 문제인 것 같은데 대학에서... 아이 참 어려운 문제군요...

해적오리 2007-04-24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이 미자 인생의 최대 강적(?)인 것 같은데요...

다락방 2007-04-25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부리님은 정말 너무 열심히 살고 계시는군요. 어느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시네요. 그렇게 살다가 지치시면 어쩌시려구요.

기운내세요..

부리 2007-05-08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흑
해적님/네 맞습니다 정말 강적입디다
클리오님/글쎄요 의대 다니는 것보다 쉬운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못하면 남은 인생은 정말 힘들게 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세상 사는 게 만만치 않잖아요.....
물만두님/그때까진 좋았는데...자신 있었는데..
무스탕님/그, 그게요.......흑
세실님/후훗 사람은 여러 종류가 있지요^^ 님같은 미녀도 있고 저같은 추남도...
고양이님/몸 만들어야겠군요
레와님/흠,님은 먼저 저를 이기셔야...^^
메피님/님의 실력은 아직 베일에 싸여 있지요 먼저 고양이님 이기고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