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대체 얼마 만에 쓰는 페이퍼인지...? 친구분들의 인생네권 페이퍼를 은밀하게 관음하면서 보관함만 채우고 도망갈 요량이었던 저.... 하지만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약혼자님, 라파엘 님, 단발머리 님의 부름을 외면하기가 어려웠고, 긴 글은커녕 100자평도 올라오지 않아 파리만 날리던 서재에 책 얘기 한번 할 때가 오긴 한 것 같고, 리뷰보다는 인생네권 끼적이는 게 만만하니까, 일단 노트북을 깨우긴 했는데, 나 글이란 걸 어떻게 썼더라...? 글 쓰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막막하군.... 게다가 저는 본격적으로 책을 읽은 기간이 그리 길지도 않거니와 독서에 크게 의미를 두기보다는 재미로 휘리릭 읽고 마는 타입에 어떤 대상에건 쉬이 감화되지 못하는 성향이기까지 한 터라 '인생책'이라 할 만한 책을 꼽기가 참 애매하더군요. 그래도 간만에 페이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으니 일단 되는 대로 써보겠습니다. 여기까지 써놓고서 막막하다고 침대로 리턴하면 너무 하여자 같으니까.... 상여자는 쓴다면 쓴다!
첫 번째 책: 데이비드 베너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네 권을 무슨 책으로 채워야 할까 고민하던 중 가장 먼저 떠올린 책. 재독을 하는 일이 드묾에도 이 책은 작년에 다시 읽고 무려 리뷰까지 남겼다! '왜 인간은 굳이 태어나서 고통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가.... 인생 너무 좆같다....' 하며 매일 밤 고뇌하던 중2병 환자는 20대 중반의 나이가 되도록 병을 고치지 못했다고 한다. 중2병인 줄 알았으나 실상은 만성질환이었던 것.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병세가 깊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러니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제목만 보고도 "내 말이!"가 절로 나오는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읽지 않을 수가 없었고, 너무 음침하고 부정적인 사람으로 보일까 봐 혼자 방구석에서 머리로만 곱씹던 존재함에 기인한 고통을 논리적인 글로 펴낸 이 책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줄곧 여겨온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위안을 건넨 책. 반출생주의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저자는 존재보다는 비존재가 낫고, 출생으로 인한 해악이 너무 크기에 아이 낳기를 멈추고 인간이라는 종을 점진적으로 소멸시키자고 하는데, 저자도 인정한 바이거니와 나 또한 이 주장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는다. 대체로 인간은 비관주의자가 아니며 생로병사를 받아들이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생각하므로. 하지만 나는 '생'에 더해 '로병사'를 물려줄 수밖에 없는 출산을 하고 싶지 않다. 일단 나부터가 늙고 병들고 (고통스럽게)죽기 싫은데 무슨 애를 또.... 오늘도 외쳐보는 안락사 합법화와 무병단수의 꿈.
두 번째 책: 발트라우트 포슈, <몸 숭배와 광기>
거식증을 꽤 오래 앓았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을 거식증에 잠식당한 채 흘려보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사람은 음식 없이 물만으로도 한 달을 살 수 있다는 것도, 사람의 몸은 1년 가까이 500에서 800 남짓의 칼로리만 넣어주고 쥐어짜도 용케 기능한다는 것도, 뼈에 얇은 거죽만 겨우 달라붙어 있는 몰골이 되는 지경에 이르면 가슴, 배, 등과 같은 원래 털이 나지 않는 부위가 솜털로 뒤덮힌다는 것도(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방이 필요한데, 몸에 지방이 너무 적으면 이를 보완하기 위해 털이 대신 자란다고 한다. 인체의 신비!), 너무 오래 굶으면 아빠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어도 슬프지 않을 정도로 음식과 체중 이외의 모든 일에 무감각해진다는 것도 모두 그 시기에 몸과 마음으로 직접 겪어 알게 된 사실이다. 이 책은 그때 만났다.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시간들을 굶기로 채웠기 때문에 이 병을 앓은 이들이 쓴 애세이와 식이장애를 비롯한 여성들의 몸에 대한 강박을 페미니즘적 관점-식이장애 여성 환자와 남성 환자의 비율은 8:2다-에서 분석한 책을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고 지금도 꾸준히 읽고 있지만, 내게 가장 강한 충격을 준 책을 뽑자면 단연 이 책이다. 한창 거식증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시기에 처음으로, 시선을 내 몸에서 바깥으로 돌려 여성에게 가해지는 마른 몸에 대한 압박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게 된 순간을 선사한 책.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다른 여러 책들보다도 흥미롭게 서술된 책이라고도 생각한다(이건 어쩌면 맨 처음에 읽었기 때문인지도). 아무튼 이 책이 나에게 충격을 줬다고 해서 내가 번뜩 정신을 차려 곧바로 굶기를 청산하고 정상적으로 먹기 시작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느린 속도로 나아졌다 퇴보하기를 반복했고, 여전히 나는 매일 체중을 재고, 체중계의 숫자가 내가 정해둔 숫자를 초과하면 다시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고칼로리의 식사를 하기 전후로 다른 끼니의 칼로리를 조절한다. 그리고 이 정도 수준의 강박조차도 내 삶에, 나와 비슷한 여성들의 삶에 몹시 유해한 영향을 끼친다는,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뼈저리게 안다. 몸과 불화하지 않는 삶을 상상하며 그 편이 훨씬 즐거우리라는 것을 미리 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아는 것을 성공적으로 삶에 녹여내는 일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도 커서, 가끔은 비참한 기분이 들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허기와 내내 함께하던 시절에 비해 증가한 8킬로그램만큼은 건강해지고, 음식의 종류를 제한하기를 멈춤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즐길 수 있게 되고, 스스로 허용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다음 끼니를 기다리면서 주린 배를 잡고 멍하니 시간을 죽이지 않게 된 지금까지 오는 데 이 책과 내가 읽어온 책들이 작은 도움이나마 주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세 번째 책: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냅의 글을 좋아한다. 만난 적도 없지만 나와 닮은 점이 너무나 많은 냅이라는 사람에게 깊은 친밀감을 느낀다. 이처럼 나와 비슷한 사람이 내가 해오던 생각을 아주 이상적인 형태로 구현한 글을 읽을 때야말로 독서하면서 제일 찌릿찌릿한 순간이 아닐까. 올해 재독하면서 다시금 깨달았다. 이 에세이는 내가 오랫동안 곁에 두고 읽을 책이라는 것을. 거식증 경험을 담은 <욕구들>과 알코올 중독 경험을 담은 <드링킹> 역시 훌륭하지만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책이 나는 제일 좋았다.
역자인 김명남 번역가의 '옮긴이의 말' 마지막 구절에 공감해 옮겨본다.
"적어도 그와 비슷한 성향을 지닌 독자들에게, 냅은 친구로 느껴지는 작가다. 절친하지는 않아도 퍽 오래 상대의 민망한 꼴이며 어려운 사정 따위를 지켜보아온 덕분에 서로 자신의 못난 모습을 보이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친구다. (...) 내가 옮긴이의 후기치고 지나치게 사적이고 남부끄러운 이야기를 쓴 것도 그런 느낌 때문일 것이다. 또 냅을 읽은 경험이 나와 비슷한 독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이 긴 글은 다음의 한 문장으로 줄여도 괜찮을 듯싶다. 자, 여기 책으로 저를 (아주 조금이지만) 바꾼 작가를 소개합니다, 그립고 기쁜 마음으로."
네 번째 책: 서머싯 몸, <면도날>
위의 세 권으로 끝내도 될 것 같은데 알라딘은 인생네컷에서 인생네권을 따와서 네 권을 뽑으라고 하니 한 권을 더 넣긴 해야겠고 그렇다면 마지막 한 권은 소설로 채우는 게 좋지 않을까? 소설의 재미를 모르다가 알라딘 서재에 와서 언니들 따라 소설 읽기 시작한 지 1년지 좀 지난 소설고자에게는 애초에 읽은 소설이랄 게 별로 없기 마련. 작년과 올해 읽은 소설이 그전까지 살면서 읽은 소설보다 많은 듯하고, 그중에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드는 소설이 몇 작품 있었다. 작년에 읽은 <가벼운 마음>, <평범한 인생>이라든가, 올해 읽은 <사라진 것들>이라든가. 아, 달자 님 100자평 읽고 급박하게 사서 며칠 전에 완독한 <리틀 라이프>도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책에 인생책 타이틀을 붙이는 건 왠지 내키지 않아서 이 책들은 나중에 다시 인생책 뽑을 때나 후보로 고려해볼 거 같다. 그래서 곰곰 생각하다 고른 소설은 서머싯 몸의 <면도날>. 이 책은 소설의 재미를 모르던 시기에도 너무 재밌어서 짧지 않은 분량(529p)임에도 불구하고 앉은 자리에서 완독한 소설이다. 게다가 면도날의 래리는 내가 경험한 소설 주인공 중에서 매력적이기로는 첫 번째인 인물. 작중에서도 래리한테 반하는 여자가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고 래리가 이상형일 수는 없는 게, 래리 같은 한량이랑 결혼하면 인생 난이도 극악이 될 거 같음. 아무튼 아직 래리 안 만나 본 분이 계시다면 한번 만나보시지요.
이 페이퍼를 작성함으로써 잠자냥 님과의 결혼을 40년 당겼습니다. 저희 2043년에 결혼하기로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