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쉽게 읽는 철학 5
수잔네 뫼부스 지음, 공병혜 옮김 / 이학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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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관심은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에 있지 않다. 그의 질문은 왜 고통은 존재하는가? 고통으로 점철된 이 세계는 과연 무엇인가에 있다. 그에게 고통은 자아의 필연적 조건이다. 삶을 意志하는 한 고통은 따른다. 죽음의 길을 향한 이 처절한 여행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평안을 얻는 방법은 자아의 의지를 거부하는데 있다.

자뭇 힌두적 사고방식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힌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바가바트기타]에 이런 생각이 잘 나타난다. 아르주나의 존재론적 질문[크리슈나여, 도대체 삶이 무엇이길래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에 대한 대답으로 크리슈나는 환영에 현혹 되지 말고 신성을 좇아 아트만(참자아)에 이르러 神인 브라흐만과 합일하여 머무르라고 한다. 이 책의 3,4권은 그래서 우파니샤드의 반향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충실히 서양 철학의 틀안에서 설명해낸다. 책의 순서는 칸트의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의 순서를 의식한 서술이기도 하다. 고통의 원인을 설명키 위한 근거율적 이해는, 결국 칸트적 틀위에 이성이 아닌 생명에너지인 의지를 관념적 일자로 하는 세계의 설명방식에 있다. 질문이 동일한 만큼 해답 또한 우파니샤드적 체계를 따라간다. 붓다의 질문이 바로 고통의 이유였고, [바가바드기타]의 아르주나가 크리슈나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고통의 이유는 무엇인가? 쇼펜하우어의 질문이 동일했듯, 대답 또한 닮아간다.

그래서, 3권에서의 플라톤의 재등장은 당연한 귀결이다. 칸트[판단력 비판]의 대응으로 첨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는 의지가 어떻게 우리에게 인지되는지 여기에서 다리를 놓는다. 사물 배후의 의지의 발현은 힌두의 신이거나 혹은 가상적 이념처럼 표상으로 존재하되 개체의 표상이 아닌 [이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적이라는데서 이 체계가 힌두적이기보다 불교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 같다. 그 이념의 표현으로서 예술은 가치를 갖는다고 그는 말한다. 의지를 인식할 수 있다는거다.

그리고 이렇게 인식된 의지앞에 두가지 길이 존재한다. 의지의 긍정과 부정. 긍정은 도덕에 의해서만 제어되는 삶의 모습이다. 구원은 부정에 있다. 고통을 벗기 위해 자기의지를 부인하는 자는 자기 안에 있는 세계를 부정하며, 현상인 세계가 사라지면 보편적 형식인 시간,공간,인과성 그리고 근거율인 주체와 객체도 사라져 버린다. 고통의 근원인 개별자의 죽음이다. 그는 평정의 상태에 들어간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괴멸되었다.

자기의지의 부인, 과연 진정한 구원인가 아니면 절망의 다른 이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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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02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리뷰 입니다! 저도 이 책을 갖고 있지만 원전을 읽는 깊이는 없어 좀 아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