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위안
A. 보에티우스 지음, 정의채 옮김 / 열린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패망일로를 걷기 시작한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계 부족 출신의 용병의  대장인 오도아케르가 황제에 오르면서 막을 내린다. 동로마제국의 황제 제논은 그의 이탈리아 지배를 일단 묵인하였으나, 뒤에 동고트왕 테오도리쿠스에게 오도아케르 토벌을 위탁하였다. 489년 이탈리아에 쳐들어온 테오도리쿠스는 가는 곳마다 오도아케르의 군을 쳐부수고 493년까지 전이탈리아를 지배하에 넣었으며, 라벤나를 수도로 삼아 동고트왕국을 세우고 눌러 앉아버린다.

서로마의 땅을 점령한 동고트왕 테오도리쿠스는 로마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이 책의 저자 보에티우스 등을 등용하여 유화정책을 꾀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론, 힘은 없지만 끊임없이 서로마를 회복코자하는 동로마에 대한 경계만은 늦출 수 없었다. 520년 집정관 알비누스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누스 1세와 내통하였다는 이유로 고발되었는데, 이때 보에티우스는 법정에서 알비누스를 옹호하다 그 역시 반역혐의를 받고, 파비아(Pavia)의 감옥에 갇혔다가 524년에 처형되었다.

이 책은 보에티우스가 사형을 기다리며 파비아에서 쓴 것으로, 그가 당하는 억울함과 고통의 의미를 스스로 묻고 철학의 여신의 입을 빌어 대답하는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시들은 각 진술들을 요약하고 시적 형태로 독자에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는 보에티우스가 단순히 자신의 처지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위해서뿐 아니라, 유일신 사상에 근간한 그의 종교철학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서는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는 도입부이다. 2서는 이生의 좋은 것이라 여기는 행운, 권력, 명예, 부의 별볼일 없음을 이야기하고, 3서에서는 결국 [참된 최고선으로서의 신에 대한 추구]를 제시한다. 4서는 다시 이런 최고의 목표에 비해 악인들의 초라한 실체를 설득한다. 5서는 다소 사변적인 장으로, 선의 지배에 수반되는 신의 [절대의지적 섭리의 세계]와 여기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과의 조화를  이야기한다.

어쩌면 전체적 흐름에서 첨언처럼 보이기도 하는 5서의 긴 논변은 [철학의 위안]보다는 논증과 공격에 대한 변론의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재미있게 읽던 사람들도 5서는 다소 힘겹다. 하지만,  이 글은 앞뒤로 어거스틴과 아퀴나스를 이어주며, 이후 스콜라철학이나 이와 연관된 근세철학의 논변의 뿌리가 되는 부분이므로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보에티우스의 위치로 인해 19세기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보에티우스가 실존하는 하나님과의 신앙이 아닌, 그리스로마 철학적 신개념에 의한 사변적 종교를 논한다하여 그를 폄하하기도 한다.

감옥에 갇힌 두사람을 본다. 보에티우스와 바울. 한 사람은 최고집정관 출신의 철학자 그리고 다른 이는 전도유망했던 바리새인 출신의 전도자. 둘은 삶의 진정한 의미가 눈에 보이는 것이라 믿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삶의 해답은 오직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추구하는데에만 있다는걸 알았고 또 그렇게 살았다. 어떤 모양으로나 그리스도만이 높여지길 원했던 옥에 갇힌 바울과, 마지막까지 인생의 파편인 부귀,권력보다는 절대자에게 돌아가기를 권하는 보에티우스. 그들은 옥에 갇히지 않은 나를 향해 지금 무얼 위해 인생을 살고 있는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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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02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리뷰도 있군요! 에코의 에세이 <철학의 위안>을 읽고서 원 저서명인 보에티우스의 이 책을 찾아다녔는데, 아쉽게도 아직도 못구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서라도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