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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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안의 외국인이 바라본 대한민국의 모습은 참 안타깝게 정확하기도 하다.

아니 그는 더 이상 외국인이 아니다. 그는 귀화했고, 그는 이제 한국인이다. 하지만 한국인인 그에게 있어 아직도 대한민국은 어디까지나 "당신들의 대한민국"일 뿐이다. 이 날카롭고, 진지한 러시안이 귀화라는 힘든 과정을 거쳐 코리안이 되었다고 일러주고 나서 "토종 한국인"들에게 "이 사람이 과연 한국사람인가?" 라고 물어보면 과연 몇 퍼센트나 그가 한국인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재래시장의 인심 후한 나물파는 할머니의 마음을 가지고 헤아려 보아도 채 30%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또 그것에 대한 무한한 동경.
자유에 대한 갈망과 또 그것에 대한 부담.
폭력에 대한 적개심과 또 그것에 대한 일상화.

이처럼 하나의 대상에 대한 괴팍한 전국민적인 양가감정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이면서 박노자인 이 책의 저자에게 있어서 언제나 풀 수 없는 숙제와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이런 난해한 문제에 대한 생각들이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익숙한 것은 절대로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주입된 채로 익숙한 채로 남아있다면, 절대로 새로운 인식은 생겨나지 않는 법이다. 박노자가 보기에 한국인은 익숙한 것에 대해서 의심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정말 그런지 일상적인 권위주의와 맹목적인 패거리주의를 낯설게 보자.

낯선 것을 두려워 하거나 신비화하면, 정확한 인식은 생겨나지 않는다. 남의 장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것만을 부여잡는다면, 절대로 긍정적인 창조는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박노자가 보기에 한국인은 낯선 것을 이해하고 용인하는 마음이 부족하다. 정말 그런지 눈먼 국가주의와 지독한 인종주의를 익숙하게 바라보자.

이제 대한민국은 익숙한 것은 낯설게 보고, 낯선 것은 익숙하게 보는 연습을 해야 할 때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우리들의 대한민국"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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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 정신과학총서 2
폴 데이비스 지음, 류시화 옮김 / 정신세계사 / 198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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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난 감상을 넉자로 표현하면 바로 (走馬看山)이다.  게다가 우리가 보려는 이 산은 인류가 생각을 갖기 시작한 이래 가장 높고 험준한 산이기에 말(馬)에서 내린지 한참 지난 지금에도 숨이 가쁠 정도다.  

 수많은 형이상학적 주제들을 현대물리학으로 접근하는 것이 이 책의 취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관점의 제시'라는 생각의 다양성을 확장해준 것에서 의미를 가질 뿐 본질로 접근하는 결과에 있어서는 거의 결실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 역시 「생명」「의식」「자아」와 같은 본질로의 접근보다는 기존의 물리학적 이론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물리학의 방법으로의 접근이라는 커다란 줄기를 견지하지 못한 채 「∼일 것일 지도 모른다」는 식의 추측이 난무하고 있으며, 하나에 대해서도 힘든 주제들을 단지 '들쑤시는'데 불과한 진지하지 못한 태도 역시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형이상학이란 거대한 주제의 본질에 비해서 아직 물리학이 이루어 놓은 것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실망해서는 안된다.  현재로는 형이상학을 물리학과 같은 이성의 수단으로 설명하는 것은 쓸모없게 보이기 조차 화지만 멈추어서는 안된다. 언젠가 한 친구가 "예전에는 신화와 미지의 아름다움으로 가득찼던 이 세상이 과학의 발달로 점점 삭막해 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여태까지 우리가 과학으로 알아내온 것들의 미미함을 볼 때 과학으로 밝힐 수 있는 것들을 계속 밝혀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으로 밝힐 수 없는 진짜 거대한 것들이 있기에 세상이 삭막해지는 것에 대한 걱정은 아직 시기상조이다. 형이상학을 산이라고 표현한 마당에 또다른 4자 성어를 사용하려 한다. 운공이산! 운공이란 늙은이가 태산을 옮기겠다고 삽을 들고 덤벼들었을 때 태산은 웃었지만 운공의 진지한 태도를 보고 놀라고 말았다. 비록 한 사람이 옮기는 양은 하잘 것 없겠지만 자손대대로 그 삽을 물려줄 때 그 산은 옮겨질 것이다. 우리도 과학이란 삽을 들고 형이상학이란 산을 한삽한삽 떠 옮길 때 형이상학의 신비는 벗겨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과학으로의 환원이란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닌 것이다. 과학은 우리의 근본적 물음에 대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과학에 대한 맹신의 풍조는 분명 경계해야 할 무엇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신학자나 과학자 모두에게 놀라운 형이상학적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신학자들은 신의 개입을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의문을 위해서 신이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신에 의해 모든 존재가 만들어지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그것은 단지 믿음의 차원일 뿐이다.  과학자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생명이란 신비한 현상을 이애하기에는 자신들의 과학이 너무도 보잘 것 없음을 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과학 만으로 생명에 대해 접근을 시도하려는 것조차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많은 사람의 종교가 과학으로 바뀌어 가는 마당에 그들의 시도는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다만 자신들의 학문의 왜소함을 느끼는 겸손한 태도로 형이상학적 주제를 바라보지 못하는 작가의 태도가 아쉽다. 그의 글에서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나 겸손함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고 하겠다.

 어쨌든 이제 물리학자들의 접근을 살펴보자.
생명의 특성은 고도의 복잡성과 조직성이다.  가장 저열한 생명체인 박테리아 조차도 굉장한 복잡성과 조직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생명의 복잡성과 조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과학자들은 성양의 전통인 분할(환원)을 위해서 생명체를 분할하고 또 분할한다.  그러나 생명체의 구성요소를 있는대로 쪼개보아도 그 본질은 찾아낼 수 없었고 따라서 사람들은 '생명력'이라는 모호한 개념에 의지하게 될 뿐이었다. 이 생명력은 과학의 방법을 벗어난 추측이고 이러한 한계에서 서양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전통인 환원주의에 대한 회의를 갖고 통합주의라는 관점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통합주의 vs 환원주의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가치있는 일이긴 하지만 우리의 주제는 생명임을 상기하자.) 통합주의적 관점은 생명력이라는 애매한 관념을 배제하고 전진하게 된다. 그러나 「부분 +부분 =전체」이고 「부분 + 부분 =전체 + 」라고 주장하는 통합주의에서  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통합주의 과학자들은 「전체 = 부분 + 부분 +  」라는 공식을 내세운다. 부분의 요소와 그외 상황( )이 시스템 속에서 전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도 역시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수확을 주고 있지 못하다.) 통합주의 현상극복의 다른 한면을 열역학 제 2법칙에서 살펴보자. 열역학 제 2법칙은 열린계에서 무질서도가 증가한다는 법칙이다. 그러나 생명은 부단히 질서 쪽으로 진화하기 때문에 생명은 엔트로피의 법칙에 반하는 현상이 아닌가?  그러나 전체적인 시스템에서 보면 생명과 열역학 제 2법칙은 일치하며 이런 일치는 통합주의를 뒷받침해 준다.
 생명의 신비중 가장 큰 것은 그것의 기원에 관한 문제이다.

 물리학에서 주장하는 가장 괜찮은 이론은 원시스프에 관한 것이다.  원시 스프는 많은 비생명적 요소가 모여있는 연못과 같은 곳에서 내적 화학반응이나 외적조건 등으로 인해 자기조직(self-orgarnization) 반응을 일으켜 생명체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그럴 듯하다는 이 시나리오도 참으로 증명될 확률은 거짓으로 판명될 확률보다 높지 않다. 실제로 오늘 날과 같이 더욱 다양한 요소와 자극이 있는 조건에서도 괴상한 생명체들이 탄생한다는 소식은 아직 알려진 바 없는 것 같다. 또한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진화론 역시 여러가지 증거로 많은 지지를 얻기도 하지만 반증도 만만치 않다.  필자는 이런 자연적인 기원설이 사실이라면 지구와 비슷한 조건의 수많은 별들에 (우주에는 지구와 조건이 비슷한 별이 10의 10제곱개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존재할 수 있는 외계인에 대한 언급으로 이 장을 마치고 있다.

의식과 영혼 

 의식을 밝혀내는 것은 의식의 작용이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보면 뇌의 작용을 연구하는 것이 뇌의 작용인 것이다.  이것은 참 어려운 작업으로 보이며 실제로도 그렇다. 특히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철학의 시작부터 있어 왔던 일이다.
 물질에 의해 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가정하면 인간은 결정론에 빠져버리게 된다.  뇌의 작용을 수학적으로 완전히 계산할 수만 있다면 원인과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사라지고 최초의 한가지 원인이 그 사람의 일생을 이미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론적 환원주의는 그다지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한 듯 보인다.  뇌의 특정영역을 자극했을 때 환자가 과거의 특정 기억을 되살려 내자 생리심리학자 펜필드는 뇌와 의식의 신비를 벗겨냈다고 생각하고 흥분했다. 하지만 이 흥분에 휩쌓였던 미가지론자는 얼마 안가서 불가지론자로 바뀌고 말았다고 한다. 환원주의의 함정에 빠진 자신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러한 수학적 합리성의 함정은 개인 뿐아니라 사회에도 도사리고 있는데 위대한 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그 합리적 사회를 '수정궁'이라 부르며 그 허구를 파헤친다.) 그러나 합리성은 많은 발전을 거듭하여 그 결과 인간은 인공지능이라는 분야에 대해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기계에 의식을 집어넣고 싶어하는 인간의 행동은 신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실제로 투스에서 파리정도의 지능을 가진 컴퓨터 칩을 만들었으며 다음 번에는 벌의 수준까지 끌어 올리려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면 우리가 창조하기 원하는 의식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을 물리학으로 설명하는 데는 생명을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어려움을 가진 것 같다. 뒷 받침하는 근거는 단지 물리학적 상상에 불과하다. 작자는 의식의 본질보다는 환원주의적 사고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기능주의 역시 의식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라기 보다는 의식의 특징들을 모아서 하나의 관점으로 만든데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자아

 일기를 뒤적거리다 이런 이야기를 발견했다.
「난 가끔 내 눈을 힘껏 움직인다.  위로, 아래로, 좌로, 우로... 이 작업은 눈동자를 가운데로 모으는 것 만큼 힘이 드는 일이지만 난 가끔 이런 행동을 한다. 만약 (아주 만약에 말이다.) 눈을 아주 치켜 떠서 눈동자가 점차 뒤로 넘어가 세상을 향하지 않고 나 자신을 향하게 되면 어떨까?  난 내 눈동자가 나를 향해서  내가 나 자신을 완벽하게 알 수만 있다면, 내 눈동자가 내 머리속을 들여다 보고 세상을 접하듯이 나를 훤히 볼 수만 있다면 장님이 되어도 좋다고 감히 큼 소리치겠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왜 '나'는 세상의 찬란한 빛을 마다하면서 까지 '나'를 알고 싶어하는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세상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자기자신을 생각할 것인가?  이런 모든 의문을 가지고 있는, '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자아에 대한 개념은 인식론의 출발점이란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세상의 모든 의문의 시작은 '나'가 아닐까?  이 책에서는 자아에 대한 몇가지 생각의 관점을 제시해 준다.  특히 자아가 자아를 생각하거나 설명하는데 대한 모순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다른 주제들은 극히 상식적이므로 자기 언급의 모순성에 대해서만 살펴 보려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메니데스는 "(진술 A) : 이 진술은 거짓이다" 라는 이야기로 자기 언급의 모순성을 논리의 차원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나는 거짓말 장이이다."라고 말 할 때 생기는 모순과 같다. 이 진술이 참이라 해도 화자는 참말을 했으므로 이미 거짓말 장이가 아니다.  또한 이 진술이 거짓이라면 화자는 참말 만을 해야 하는데도 거짓 진술을 했다는 사실에서 모순이 된다. 러셀도 부분적으로는 맞는 논리의 연속이 서로 순환관계를 이루며 모순이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호프스태터는 자신의 <괴델,에셔,바하>를 통해서 이런 성질을 밝혀냈는데 특히 괴델의 불완전 이론이 눈길을 끈다. 괴델은 주체와 객체가 같을 때 주체와 객체가 서로 섞임으로 논리적 분석의 근본 차원에서 조차 자기언급은 역설과 불왅전을 낳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이 이론은 의식이 비기계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데 까지 확장된다. 자아의 의식을 뇌의 작용의 부현상이라고 유물론적 관점에서 보고 이것을 연구하는데도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자기의 뇌를 보면서 뇌를 연구한다고 생각해 보자. 뇌의 작용이라는 객체를 연구하는 것 역시 자신의 뇌의 작용이기 때문에 이것은 순환과 역설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 역시 신기한 모순이 자리하고 있다. 양면이 있는 종이를 비틀어 붙이면 한면은 사라지고 영원히 순환된다. 이 밖에도 작가는 차원의 순환이라든가 두뇌의식과 같은 예로 자아와 의식과 물질의 관계등을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생명', '의식', '자아'에 대해 살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생명', '의식', '자아'라는 근원적 주제다. 작가가 '생명', '의식', '자아' 를 연구하기 위해 언급한 물리학적 상상력과 그것에 따른 신기한 예들은 수단에 불과하다. 이런 형이상학적 주제들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들을 다시 떠올리자. '생명이란 무엇인가?' '의식은 무엇인가?' '자아는 무엇인가?' 이런 근원적인 물음들에 대해서 물리학이 설명하는 바는 정말 미미하다. (결코 물리학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주제들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과학이나 그에 따른 기술에만 의지하면 안될 것이다. 우리는 때로는 직관과 감성적인 수단에 의지할 줄 알아야 한다.  확대된 시각으로 형이상학을 바라보는 것이 적절하다.  과학이 우리에게 준 많은 선물들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나 과학과 이성만을 맹신하고 그 수단에만 의지 한다면 우리는 이 책에서 경계하라고 누누히 강조하는 환원주의의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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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설의 살인
우치다 야스오 지음, 홍영의 옮김 / 초록배매직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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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에게 살해된 개인 ; 그리고 그들의 입장

“당신은 누구시죠?”
이 난해한 질문은 개인과 집단이 갖는 밀접한 관계에 의해 더 이상 난해하지 않다.
“저는 **학교(회사)에 다니는 XXX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이용해서 쉽게 답을 지어내기 때문이다.

‘빙설의 살인’은 추리 소설의 형식을 빌어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다. 특히 아주 거대한 관료집단(자위대, 군수업체, 경찰청)과 그 구성원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계획에 대해 집착할 수 밖에 없는 거대한 집단의 속성과 그것에 반대하는 한 구성원이 등장한다. 물론 그 사람은 살해되고, 이 사건을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 르포라이터 겸 탐정인 주인공이 파헤쳐 간다.

개인과 집단은 언제나 특유의 긴장으로 가득하다. 그 긴장은 집단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개인과, 개인에 의해 붕괴되지 않으려는 집단 간의 균형점으로 향해 있다. 이 절묘한 균형을 찾아내고 유지한다면 개인은 집단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고, 집단은 이러한 개인들을 동력으로 지속 발전될 것이다. 그러나 체조선수나 씨름선수가 보여주듯, 균형을 잡아가는 일은 언제나 힘들다. 이렇듯 개인과 집단은 언제나 궁금하지만 풀리지 않는 미묘한 역동으로 계속되어 왔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집단은 그 구성원인 개인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이런 환원주의의 방식으로 바라보면 집단은 하나의 상징체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다지 유용한 것 같지 않다. 집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듯이, 활발하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점에 초점을 맞춘다. ‘집단은 어쩔 수 없는 괴물’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개인보다 강력한 상징인 ‘집단’에 대항하는 더욱 강력한 개인을 상상하는 일은 언제나 달콤한 주제였다. 그 사람은 바로 영웅이고, 사람을 넘어서는 ‘수퍼맨’이다. 집단이 일종의 인간(法人)으로 존중받고, 그 규모가 더욱 커져가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상상은 더욱 비현실적이 되어가고, 비현실적일수록 그 상상은 더욱 달콤해질 것이다.

추리소설로서 그다지 치밀하지 못한 내용 전개 방식을 가진 이 책에 그나마 호감을 갖는 이유는 그 종결부이다. 작가는 그 종결부를 나름대로 열심히 고심한 것 같다. 그는 개인이 집단을 완전히 뒤엎는 패스트푸드처럼 느끼한 할리우드식 해피엔딩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거대한 철옹성은 결코 무너질 수 없다는 체념으로 소설을 끝내기도 싫었으리라.
물론 이러한 절충이 상업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와 타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못마땅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암울한 상태를 드러내면서도 그것에 의한 불씨를 남겨두는 일은 그럴 듯 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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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잘 표현한 영화 :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 ‘카프카’ ; 강력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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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의 용기
마광수 / 해냄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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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치혼합의 사회를 꿈꾸며….

 주위를 둘러 보다가 문득 어느 한 곳에 시선을 맞추고 응시하고 있자면 그것이 전부터 이 세상에 있던 것인지 낯설어 보일 때가 있다.  어제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낯설게 경험한 것은 바로 ‘이 세상은 수없이 다양한 색(色)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나름의 고유한 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도 평소에는 이 당연한 사실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조화를 이룬 채 말이다.


 색(色)은 그 다양성과 그것에 따른 구별의 용이함 때문에 물리적 세상 뿐만 아니라 상징의 세상에서도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그런데 상징의 세상에서의 색들은 물리적 세상의 색들 만큼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가장 중요했던 시절에 빨간색은 무조건적인 금기의 색이었다.

 그러다가 정치적 대립의 중요성이 점차 감소하자 이제 복숭아색(桃色)이 매도 당하기 시작했다.

물리적 세상에서 색들이 다양하게 공존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생각해 보면 상징적 세계의 획일성과 경직성은 그 일상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고약한 테러집단의 폭탄테러보다 심하다.

‘자유에의 용기’는 이 테러의 가장 큰 피해자인 마광수 교수의 이야기이다.

자유주의자 마광수 교수의 생각을 가장 자유로운 형식인 에세이에 담은 글 모음이라!

고등학교 시절 ‘나는 야한여자가 좋다’를 읽고 나서 느낀 그 감흥을 떠올렸다.

개인적이고 자유롭고 야한 상상을 엿보고 나는 얼마나 많은 미소를 지었었던가?

그런데 이 책은 자유로운 문학가로서의 마광수가 아니라 불평 많은 사회학자로서의 마광수의 작품이었다. 자유로운 형식의 기지가 번뜩이는 내용의 글은 별로 없고, 쾌락에 대해 닫혀있고 경직된 우리 사회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춘 책이다. 게다가 그 논의 방식은 온통 ‘진실을 알려주마!’ 식의 계몽적인 것 뿐이다. 
 위선적인 도덕의 계몽과 훈육이 가득한 우리 사회에 대해서 지독한 반복으로 펜끝을 겨누는 작가의 글쓰기 방식 역시 그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망스럽다. 마광수 교수는 자유주의를 훈육하고 있는 모순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즐거운 사라’ 악몽은 대단한 것이었나 보다.

 어떤 영화의 제목과 같이 ‘사라의 악몽’ 대한 불안은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잠식한 것은 아닐까?

작가의 태도는 과거 빨간색이 무조건 허용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노란색이나 복숭아색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닫혀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 보다 심한 상태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무감각한 상태에 있는 것도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자유주의 훈육과 지독한 반복은 어느 정도 유효한 것도 사실인 듯 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 정도로 우리 사회는 하나의 색만을 강조하는 사회인 것이다.

 이 시점에서 과거 신인상파를 이끌었던 시냑과 쇠라 등의 화가가 사용한 점묘화들은 중요한 함의를 준다. 그들은 여러 가지 색들을 작은 점들로 병치시켰다. 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각각의 물감이 갖는 채도를 떨어뜨리지 않고 혼합하는 효과를 보았던 것이다.

 나는 오늘도 각각의 색들이 자신의 색을 버리지 않고 존재하면서 혼합되어 걸작을 이루는 그런 사회를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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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은 계속된다 - 개정판 이후 오퍼스 2
노암 촘스키 지음, 오애리 옮김 / 이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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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적 배신자 되기 

진실을 추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잠재적인 배신자이다.
(진리와 진실은 다르다고 하겠다. 진리가 좀더 궁극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라면, 진실은 보다 개인화된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진실이 있듯이...)
 그런 의미에서 Noam Chomsky는 대단한 잠재적 배신자이다. 세계적인 명성의 언어학자이자 탁월한 식견을 가진 정치비평가인 놀라운 지식인인 Chomsky를 보고 배신자라고 하다니? 이런 의문이 들겠지만....

 그렇다! 확실히 그는 잠재적인 배신자이다. 

  Chomsky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에 대해 맞서는 반미주의자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반미주의자가 아니며, 그가 하는 일은 단지 그가 가진 진실의 잣대에 벗어나는 그의 조국 미국이 저지른 무자비한 힘의 행사 방식과 그 방식이 유지되는 구조를 밝혀내는 것이다.

 배신자는 신의를 저버리는 관계의 파괴자를 뜻한다. Chomsky는 관계보다는 진실의 기준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아무리 가까운 집단이나 개인이라도 그의 기준을 넘어선다면 그는 관계에 얽매이기보다는 진실의 편에 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잠재적으로 배신자이다. Chomsky와 같은 인물은 어떤 막강한 이익집단에 속하여 공고한 관계 속에서 더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명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 받았을 유혹을 짐작할 수 있기에 그가 물리쳐 온 타협과 안주에 대한 저항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힘을 바탕으로 한 자유시장경제의 상징이 무너졌다. 이 충격은 유일 강대국의 자존심 회복에 있어서 노골적으로 눈에 보이는 방식의 힘의 사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장 가시적으로 보인 동계올림픽에서의 본 힘의 행사방식과 북한에 대한 악의 축 발언은 평등과 억압에 대한 반골정신을 숨쉬듯 달고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초유의 반미감정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사사로운 "관계"에 대한 감정적 대응 방식일 뿐이다. 분노의 감정이 사라질 즈음 같이 사그라드는 감정의 일시적 분출. 만약 객관적으로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고 싶다면, 자의적으로 불량과 양호의 기준을 나누는 오만한 힘에 대해 잠재적 배신자가 되어보려면, Chomsky의 이 대단한 책을 봐야 할 것이다.

 이 작다면 작은 사각형에는 중남미에 대해 미국이 행사하는 부당한 힘과 동티모르에 대한 진실, 이러한 체제가 유지, 확대되기 위한 구조적인 방식들에 대한 그의 통찰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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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hd 2010-08-10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평을 되게 힘들게 써놨네. 그냥 번역 옮겨논거 같애.

동녘새벽 2010-08-13 12:37   좋아요 0 | URL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