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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평점 :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 그리고 그의 아들 소현세자. 1636년,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머리를 조아리던 인조, 그리고 볼모로 청에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역사속 시간이 소설 <소현>속에 그려진다. 소현세자라는 이름은 최근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 [추노]를 통해서 많이 익숙해진 이름이리라. 소현세자의 억울한? 죽음, 원손을 비롯한 그의 일족의 안타까운 최후, 청에 볼모로 함께 끌려갔던 동생인 봉림대군, 향후 왕이 된 효종의 북벌 정책... 등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담아낸 한 시대가 이 책속에서 시작된다.
9년이란 시간 동안 청의 발밑에서 '노루'의 꼴을 하고 있었던 소현이었다. 이미 죽은 노루가 아니라 언제고, 앞으로 죽어야 할, 아직까지는 살아있지만 한시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사냥터의 노루 신세... <소현>은 그런 안타까운 삶을 살아간 소현세자의 볼모 생활중 환국전 2년의 심양 생활을 그리고 있다. 청태조 누르하치가 죽고, 그의 8남이던 홍타이지가 청태종에 등극했다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시기, 조선왕의 무릎을 꿇게 만들었던 구왕 도르곤이 다시금 강력한 권력자가 되어있던 시기였다.
<소현>은 소현세자의 눈에 비친 명의 멸망에 대한 두려움, 조선과 아비에 대한 그리움이 그려진다. 소현세자의 눈에 담긴 시간들과 함께 적국에 볼모로 잡혀있던 시간, 그의 곁을 지켰던 사람들, 동생 봉림대군을 비롯해 아비가 정승이 된 바람에 볼모로 끌려온 석경, 종친의 여식에서 청에 끌려와 대학사의 첩이 된 흔, 조선의 노비에서 청의 역관이 된 만상 등 조선과 청을 오가며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했던, 가슴아픈 시간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들의 안타깝고도 색다른 이야기들이 소현의 주변을 채색한다.
'말의 간격은 시간이고, 시간의 간격은 세계의 간격이었다. 어제는 살아 있었던 황제가 오늘은 죽어 있는 것처럼... 세계가 그렇게 어지러워 세자는 몸이 자주 아팠다.' - P. 24 -
'나라를 빼앗기고 자존을 빼앗기고 자식을 빼앗기는, 빼앗길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기는 임금의 눈이 젖어 있었다.' - P. 26 -
오랑캐 청나라에 대한 인조의 경멸, 하지만 명나라의 멸망을 눈앞에서 지켜본 소현, 그리고 그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 소현세자는 환국 이후 두 달만에 세상을 등지게 됐다고 한다. '학질'이라는 난데없는 병으로 죽음을 맞이한 소현의 실질적인 죽음에 대해서 세인들은 인조에 의해 그가 살해되었을 거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하지만 이 작품 <소현>에서 작가가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작가의 말처럼 그의 죽음에 대한 원인이 아니라, 소현과 그의 아버지 인조, 그들이 가진 고독이라고 말한다. 아들이 가졌던, 아비가 느꼈던 고독의 실재와 아픔의 실체가 그 시간속에 녹아있는것이다.

시간의 간격, 세계의 간격... 누구보다 더 가까이 변화의 시기,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현실을 직시 할 수 있었던, 그리고 자신의 조국 조선에 대한 그리움으로 몇번이고 꿈속에서 압록강을 오갔던 고독과 그리움을 간직한 소현세자가 있다. 반정으로 정권을 잡고 패배로 머리를 조아린 끝에 임금이라는 이름을 유지한 인조, 볼모로 끌려간 아들 또한 그들에 의해 세자로 인정받았다. 그들의 편이 되어버린 세자 그리고 그렇게 생각해버린 아버지는 눈이 젖어든다. 나라를, 자식을, 모든것을 빼앗겨버렸다고 생각한 아버지, 임금 인조.
'새 한마리가 맑고 따사로운 햇살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강남에서 날아온 새가 어느새 먼 곳, 북쪽에까지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 P. 334 -
<소현>은 흡싸 김훈의 [남한산성]을 떠올린다. 이야기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 담긴 내용과 그 문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전쟁을 이야기 하지만 전쟁 소설이 쏟아내는 화려하거나, 볼거리 가득한 전쟁씬이나 영웅담이 아니라 전쟁의 참혹함속에서 바라보지 못했던 세세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작가 만의 문체로 섬세하고 치밀하게 쓰여진 것 같이, 이 작품도 그렇다는 것이다. <소현>이라고 하면 소현 세자의 죽음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 눈에 보여지는 죽음이라는 소재보다는 그 안에 담긴 더 깊고, 진한 향기를 이 작품은 우리에게 전한다.
역사적 시간을 고스란히 꺼내어 우리 앞에 내어놓은 작가의 땀이 책속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소현을 비롯해 봉림대군, 심석경 등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들 사이로, 만상, 흔, 막금 등 독특한 신분과 변화를 겪게되는 캐릭터들을 배치해 이야기의 재미를 더해주는 부분은 역사 팩션 소설만이 가진 특별한 매력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역사적 사건과 소설적 허구가 만들어낸 탄탄한 스토리 구성이 독자들을 역사적 흥미와 팩션의 재미속으로 쉴새없이 몰아넣는다.
변화의 시대, 조선에 남겨진 아픔의 상처, 그 상처의 시간이 김인숙 작가의 펜끝에서 생생한 현실처럼 되살아난다.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아비의 고독, 그리고 아들의 고독을 독자들도 책을 내려놓는 순간 고스란히 전해질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펜끝에서 되살아난 상처입은 시간속 조선, 그리고 소현과 인조의 모습이 뚜렷하고도 선명하게 눈앞에 흘러 지나간다. 그리고 맑고 다사로운 햇살 사이를 하얀 새 한마리가 가로지른다. 그렇게 '소현'은 우리 곁에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