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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티나 데이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정환 옮김 / 서울문화사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인권(人權, human rights)은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하기 위한, 보편적인 인간의 모든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권리 및 지위와 자격을 총칭하는 개념'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국가에 의해 법률적, 제도적인 보호를 받으며 많은 부분 개선과 향상이란 말로 발전해 왔다지만 실상을 드려다보면 아직도 상당수 보편적인 가치가 위협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문 날인, 공항 알몸 검색,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보이지 않는 눈인 CCTV의 현격한 증가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위협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다.
범죄 예방과 감소, 해결이라는 명분으로 수없이 생겨난 CCTV의 경우, 사생활 침해라는, 그 장점에 반하는 양면성 때문에 인권의 적이라 표현되기도 하는 것도 사실이다. 예방적 차원에서 생겨난 이런 디지털 기기들이 범죄에 이용되거나 국가 권력에 의해 잘못된 의도로 사용된다면 어떻게 될까? 범죄 예방과 같은 공공복리 측면과 사생활 침해와 같은 인권의 문제가 충돌한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런 질문들을 고민케 만드는 한 작품이 있다. 일본 미스터리의 제왕 히가시노게이고의 손끝에서 탄생한 색다른 미스터리 <플래티나 데이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삼년반이란 오랜 시간 열정을 쏟아낸 <플래티나 데이터>는 DNA와 같은 디지털 데이터를 이용한 수사 시스템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물론 DNA를 이용해 범죄자와 유사 범죄를 연관짓는 시스템은 현재에도 많은 부분 사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시스템은 한 단계 더 진보한 것이다.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와 같은 작은 것에서 추출한 DNA를 통해서 성별이나 나이, 혈액형, 신장 등에 대한 기본적인 데이타를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체질이나 인종적 특성, 구체적 신체 특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도출해내는 시스템인 것이다. 이를 통해 DNA 몽타주를 얻어내는데 그 정확도가 놀랄만한 수준에 이른다는 것이다.
시부야 변두리 러브호텔 방에서 전기 환각기를 사용한 20대 초반 여성의 사체가 발견된다. 환각 상태에서 섹스를 즐기던 여성,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를 어딘가로 배달하게 된 아사마 레이지 반장은 경찰청 특수해석 연구소로 가게되는데 그곳에서 앞서 언급했던 DNA 수사 시스템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리고 음모에서 추출한 DNA는 범인을 정확하게 밝혀내게 되는데... 경찰청 특수해석연구소의 '가구라 주임'이 이 DNA 시스템을 담당한다. 그는 이 시스템의 폭넓은 활용을 위한 개인 정보에 관한 법안이 통과되면 범죄 예방 및 해결에 획기적인 변화가 올거라는 말을 한다.
'국민들이 용서하지 않는다고요? 이보세요, 아사마 반장님. 국민이 뭘 어쩔 수 있다는 겁니까? 데모를 하건 연설을 하건 정치가들은 자기들이 통과시키고 싶은 법안을 척척 통과시키는데요. 지금까지 줄 곧 그렇게 해오지 않았습니까? 국민의 반대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국민들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법안을 통과시키다니 용서할 수 없다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초기뿐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상황에 익숙해지지요...' - P. 41 -
국가가 개인의 정보를 관리하는 걸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아사마 반장의 말에 가구라는 위와 같은 말로 단정한다. 국가 권력이 공익을 위해 국민의 정보를 관리한다, 이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이 엇갈릴거라 생각이 된다. 특히 요즘과 같은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사생활 침해와 불법 유출이란 우려와 공공의 안녕을 위해 그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는 의견, 하지만 문제는 공권력, 혹은 국민의 대의기관이라는 국회의 무차별적인 법안 의결로 인해 공익보다는 사생활 침해때문에 반대입장을 보인 이들의 의견조차 무시된다는 사실이다. 가구라 주임의 말에서보듯 너무도 당연하게, 공공연히 드러나는 이런 잘못된 행태를 <플래티나 데이터>는 꼬집고 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그 획기적인 시스템 덕분에 여러가지 사건들을 해결하게 되지만 머지않아 시스템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센쥬 신바시 옆 제방에서 사체가 발견된 것이다. 젊은 여성의 이 사체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체내에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정액이 남아있었다. 이 사건은 하치오지 사건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사건과 동일한 수법의 연쇄살인으로 추정되어 DNA 시스템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나 범행 대상을 찾을 수 없다는 'NOT FOUND (NF)'라는 결과를 내어놓게 된다. 이 사건을 포함해 벌써 13번째 NF 사건인 것이다.
DNA 시스템을 만든 다테시나 남매, 중증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그들을 치료하는 미나카미 교수, 시스템을 관리하는 가구라 주임,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미스터리한 인물 '류'.... 연쇄 살인 사건속에 숨겨진 비밀과 개인 정보에 관한 법률과 관련한 모종의 음모, 다양한 인물들 속에 감추어진 미스터리한 사건들이 일본 미스터리 제왕의 손끝에서 능수능란하게 휘몰아친다. <플래티나 데이터>의 한 등장인물에게서 보여지는 인간이 가진 양면성, 사회나 국가 권력이 가지는 선과 악의 양면성이 섬뜩하리만큼 재미있고 실감나게 그려진다. 가까운 미래, 우리의 모습이 아마도 이럴까?
이런 국가 권력의 횡포를 현실 속에서도 여실히 느끼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한창 신용카드 소득공제 폐지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는 요즈음, 서민들의 황폐해진 가계와는 반대로 대기업과 부자들을 위한, 그들 위주의 삐뚤어진 감세 정책들이 도마위에 오르고 있다. 그뿐인가? 뛰는 물가에 너두나두 허리띠를 졸라매는 현실속에서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의 연금지급과 관련한 법률을 몰래 처리했다가 언론에 알려지자 폐기했던 사건도 불과 몇달전의 일이다.
더이상 정부를, 공권력을,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를 믿을 수 없는 불신을 심어준 것이 바로 그들 자신임을 아직도 그들은 모른다. 아니 앞서 가구라 주임이 했던 말처럼 국민들은 조금만 지나면 잊어버리고 그들을 따라 올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것인지도 모를일이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안타깝다. 더이상 그들이 추진하는 일들을, 법안을, 계획들을 쉽게 믿을수도 맡길 수도 없을 거라는 불신이 온 사회에 팽배해진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부당거래'라는 영화가 지난 겨울 많은 사랑을 받았었다. 정치인, 경찰, 검찰과 기업인들 사이의 부당거래... 이것이 바로 소설이 아닌 우리의 현실이다.
'어는 세상이건 신분은 존재해. 인간이 평등한 사회는 있을 수 없어!' - P. 493 -
'평등한 사회는 있을 수 없어!' 라는 이 단정적인 말이 가슴을 아프게한다. 언제부터 미스터리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이토록 많은 생각을 갖게 된 것일까? 자신에게 묻게된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미스터리의 재미속에서도 우리 현실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한편으로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장르를 초월하는 작가의 열정을 담은 특별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조금은 밋밋한 반전과 작가와의 두뇌 싸움에서 이긴 것같은 우월감에 약간의 아쉬움이 들기도 하는 작품이지만, SF적 소재를 통해 현재를 보고,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색다름이 마음을 움직인다.
기술의 발달이나 국민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법안이 더이상 일반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닌 특정 계층, 계급을 위한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몇번이고 현실속에서 엿보이기에 더욱 짙어진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소설의 형태로 갖출 수 있게 되어 안심이다' 라는 작가의 말속에 보이지 않는 악(惡), 보이지 않는 악인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듯해 우울함이 느껴진다. 흥미진진한 재미를 넘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깊이 사색하게 하는 책, 히가시노 게이고의 <플래티나 데이터> 그렇게 도발적인 미스터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