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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 김숨 장편소설
김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물과 불, 소금과 금, 공기, 그리고 납!
정말 낯선 한편의 소설과 마주한다. 물이 흘러나오는 집을 담아낸 표지를 통해 환상속 세계를 다룬 이야기겠거니 했던 나의 생각은 여지없이 흩어져버린다. 분위기 자체는 몽환으로 치닫고 있지만 이 작품 [물] 속에 보여지는 이야기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가족적이며,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과 불, 소금과 금, 공기, 그리고 납의 뿜어내는 인간들과 그들의 관계속에 놓여진 한 가족의 철저하게 색다른 이야기가 이 책 [물]을 이루어낸다.
한방울의 '물!' '그녀는 한방울의 물처럼 무심한 듯하면서도 팽팽한 긴장을 그녀의 정신과 육체에 품고 있다.' ... 소금인 '나' 의 엄마가 바로 물이다. 한순간 얼음처럼 굳어버렸다가 물처럼 일상으로 되돌아오기도 하고 언젠가 수증기 처럼 사라져갈... 소금의 아버지는 '불!' 이다. 가정이라는 공간, 수족관을 깨어부수고 엄마로부터 도망쳤던 아버지, 한없이 높은 모습으로 자리하려는 아버지, 그가 바로 불이다. 그리고 어린시절부터 애정 결핍을 안고 성장해 결혼까지 했지만 남편인 그와 이혼하고 다시 물인 어머니의 곁으로 되돌아온 '소금', 그것이 바로 나다.
'물'인 어머니가 수평을 지향한다면, '불'인 아버지는 수직을 지향한다. 한없이 낮아지려는 물과 한없이 높아지려는 불이 만나는 아슬아슬한 교차점, 그곳에 나 '소금'이 백야(白夜)처럼 놓여 있다. 꺼질 듯 꺼지지 않고... - P. 44 -
같은날 동시에 물에 의해서 태어난 맏딸 소금과 쌍둥이 동생 '금'. 그리고 4년후 태어난 여동생 '공기'. 소금이 이혼하고 집에 돌아오자 집을 떠났던 아버지는 14년만에 돌아오고, 기도원에 갔던 금과 공기까지 돌아와 예전 가족 모두가 물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배관공과 수도검침원, 은행남자 그리고 금의 아이 납에 이르기까지 현실인듯 아닌듯 몽환적인 분위기속에서 펼쳐지는 가족들사이에 벌어지는 일들, 또 다른 인물들 사이에서 어우러지는 관계가 어지럽게 종잡을 수 없이 혼돈스럽게 이야기를 집어삼킨다.

작가 김숨은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간에 복잡하게 얽힌 '욕망의 관계도'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서로 뒤엉킨 관계속에서 드러나는 인간들 사이의 경쟁, 질투, 욕망 등 다양한 인간성을 독특한 사물에 빗대어 섬세하면서도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다. 세 딸을 둔 엄마 물의 선택, 엄마와 가까이할 수록 자신을 잃어가는 큰딸 소금, 넘어설 수 없는 금에 대한 질투와 시기, 그리고 납을 통해 되살아나는 모성... 일상을 다루면서도 그 등장인물들의 특성을 하나하나 새롭게 꺼내어 독특한 캐릭터로 채색한 작가의 색다른 상상력이 매력을 발산한다.
표지를 펼쳐 들자 모습을 보이는 김숨이란 이 작가의 사진을 보고는 사실 조금 웃음을 짖기도 했다. 축구선수 박주영을 닮았다고 생각한건 나 혼자 뿐인가? 어쨌든 그의 독특한 이름 만큼이나 그의 전작들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것 같다. 2008년 작품 [철] 은 조선소 노동자들의 모습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 작가가 돌아왔냐 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2009년 [나의 아름다운 죄인들]에서는 그동안 작가가 보여주던 색깔을 배제하고 따스한 성장소설로 또 다른 변화를 던지기도 했다고한다.
'소금은 물속에서 존재할 때 스스로를 과감하게 버리고 망각한다. 버림으로써, 망각함으로써 스스로를 더욱 진실되게 드러낸다. 나 자신이 소금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찾았다. 물인 어머니를 갈망했다.' - P, 30 -
그리고 2010년 [물]이라는 이 독특한 작품을 통해 작가는 단순히 가정속에서 보이는 관계를 넘어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공간속에서의 관계를 색다른 시선으로 독특하게 풀어내게 된다. 무기력하면서도 폭력을 서슴지 않는 불, 상처받고 질투하던 소금과 그 대상 금, 그리고 모든것을 만들고 결국 포용한 물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작가 나름의 철학과 사상을 색다른 틀속에서 화려하게 꽃피운다. 집착과 욕망이란 뒤엉킨 관계속에서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은 물로 시작되고 물로 야기되며 결국 물로 귀결됨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닌지... 그녀가 만들어낸 독특한 세계는 책을 내려놓은 후에도 다양한 의미와 여운으로 오래도록 남아있을것 같다. 김숨이라는 작가의 이름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