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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손 도장 - 2010 대표에세이
최민자 외 49인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생각대로, 붓가는 대로... 학창 시절 배웠던 '수필'이라는 장르에 대한 설명이 아직도 머릿속에 한창이다.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도 좋고, 자신의 눈에 들어온 한 대상에 대한 것도, 가족들의 이야기나, 가슴속에 묻어둔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좋다. 그 속에는 평범한 일상이 있고, 매력적이지 않을진 모르지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다. 가끔은 '뭐~이런걸' 이라는 생각이 들만한 소재들도 있을 수 있다. 어느 봄날 산과 들을 거닐며 캐어 담은, 보이고 들리고 향기나는 그대로 담겨진 봄나물을 담은 바구니속 향기, 수필속엔 그런 향기가 묻어난다.
봄향기가 피어나는 이 수필집 <하느님의 손도장>은 [에세이스트]라는 격월간지에 소개된 작품을 모아놓은 수필집이다. '수필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자, 오래된 나를 버리고 오늘의 나를 세우는 길이다.'라는 어디서 많이 들어 봤음직한 설명을 뒤로하고 50인이 선사하는 일상속에, 과거 추억, 우리 주변의 인물들과 대상속에 담아내는 순수하고 섬세한 시선을 느껴본다. 수필의 바다... 잠시 그 넓고 깊은 마음의 창속에 몸을 맡겨본다.
'배꼽은 시원의 흉터, 임무가 종료된 과거완료의 매듭이다. 우리 생애 최초로 치러 낸, 서럽지도 않은 이별의 흔적이다.' - P.98 , [하느님의 손도장] 中에서 -
동네 미용실에 새로온 아가씨. 배꼽 언저리에 달랑거리는 피어싱이 미용실을 찾은 나를 민망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신이 품질을 보증한 손도장, 배꼽에 담겼을 수많은 의미를 미용실 의자에 앉아 하나하나 떠올린다. 이 수필집의 표제작 [하느님의 손도장]은 배꼽에 담긴 역사, 의미, 반란과 도발을 작가의 시선속에 담아낸다. 봄날 편안하고 가볍게 만날 수 있는 작은 책을 선택하고자 했는데... <하느님...>이라는 제목에 혹시... 교회서적? 하는 선입관이 일었었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이 아닌, 하느님...이란 글씨에 마음을 놓으며 다시 편안함으로 만났던 이 책!
이 수필집의 시작을 알리는 [나의 멸치 존경법]과 같이 텔레비젼을 보면서 까던 멸치를 보고 느낀 점을 자연스럽게 적어 내려가는, 문학기행에서 만난 팽나무를 보고 아내를 떠올리는 [겨울 팽나무, 아내여 이것 좀 보오], 궤짝 밑에서 발견한 오래된 하모니카가 떠올리게한 과거의 추억 [녹슨 하모니카] 등 일상이 그대로 녹아있는 미셀러니가 이 책의 전반을 이룬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따라가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삶의 바다를 헤쳐나가는데 밝은 별이 있었으면 좋겠다. 북두칠성도 좋고, 남십자성도 좋다. 그 별을 그리며 살다보면 어지간한 역경쯤이야 견뎌낼 수 있지 않을까.' - P. 63 , [별을 따라가다] 中에서 -
병실에 누워 창밖의 별을 세면서 꿈속을 산책하던 작가가 마지막으로 전해준 인생 이야기, [별을 따라가다]라는 수필은 2페이지 정도로 짧기도 짧지만 별다를 것 없는 상황에서 인생을 읽어내는 특별함을 전해주기도 한다. '봄은 냄새로 먼저 온다'는 이경혜 작가의 지리산 트래킹은 우리에게 싱그러운 봄내음을 선물한다. 이 수필집에는 특히 가족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들려온다. [아버지의 난닝구] 돌아가신 아버지, 그 아버지에 대한 상처를 가진 딸, 하지만 용서와 화해를 청하며 멸치국물낸 국수를 삶아드릴걸...이라는 딸의 안타까운 모습이 마음을 떨리게 만든다. 그리고...

[에스더와 미국]에서는 결혼후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아내의 언니, 이민을 간 처형의 딸 에스더와 아들 데이빗을 조국을 대표하여 만났다는 작가의 가족애와 조국애를 동시에 담고 있기도 하다. 유학을 보냈던 고등학생 아들의 여자친구 사진을 보고 마음이 엉크러졌던 아버지, 하지만 아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호흡을 맞추고 하모니를 찾아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도 가족애를 물씬 느끼게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고민과 감상도 있다. [인생]은 자신의 묘비명을 묻는 질문에 대한 깊은 사색, 그리고 찾게 된 자신의 묘비명, '가난'과 연결된 안타까운 가족사를 그린 [나의 치사함에 대하여], 자기 꿈을 이모작하려는 여인들의 넉넉함을 그린 [여자여자여자] 등 일상속에 투영된 자신의 삶을 거울 속에 놓고 바라보듯 섬세하고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자신과의 깊이 있는 대화가 읽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사랑을 가슴에 간직한 사람은 행복하다. 가슴에는 사랑 하나를 지운다는 것은 보다 큰 사랑을 담겠다는 뜻일 게다. 그러나 아버지의 연인인 그 일본 여인과, 그 여인의 연인 이었던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잊지 못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 P. 137 , [아버지의 연인] 中에서 -
마음을 이끌렸던 또 하나의 작품은 바로 [아버지의 연인] 이다. 역시 그리 길지 않은 작품이지만 시선이 머물렀던 이유는,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의 시인 이정하인지 아닌지 모를 '이정하' 라는 이름에 대한 작은 관심 때문이었다. 하늘색 원피스를 입었다는 작가의 어린시절 모습 대로라면 내가 아는 그 작가가 아닐듯 하지만... 사랑을 가슴에 간직한 아버지와 일본여인과의 애틋함이 이야기속에 묻어난다. 이 작품은 오래전에 만났던 피천득 선생의 '인연' 이란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워하면서도 한 번 만나고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 서로 아니 만나 살기도 한다. ...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 세번째는 아니...만나야 좋았을 것이다...' 순수하고 아릿하던 첫사랑의, 운명과도 같은 사랑이야기. 가슴속에 묻어둔 사랑이야기가 어쩌면 그렇게도 닮아있는지... [아버지의 연인]은 그렇게 예전 [인연]에서 느꼈던 그 사랑의 추억을 새삼 꺼내어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일정한 형식도 어떤 장르적 구분도 특별히 나눌 필요는 없지만 수필을 간혹 에세이(중수필)와 미셀러니(경수필)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 작품은 사실 에세이(essay)보다는 미셀러니(miscellany, 경수필)라 말할 수 있을것 같다. 에세이가 일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논리적 구조와 객관적 관찰이 주를 이루는 조금은 무거운 느낌이라면, 미셀러니는 그보다는 훨씬 가볍과 개인적인 취향이나 가벼운 시선을 바탕으로하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이다. 잠시 모든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고, 익히 보아오고 알아왔던 것들에 새로운 시선을 보낸다. 삶의 여유속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과 웃음을 돌아보는 시간과 마주한다.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둘러싼 모든 사물들, 과거의 아프거나 아름답던 추억들... <하느님의 손도장>은 그렇게 숨가쁘게 뛰어가던 나의 발걸음을 멈추고 여유를 선물하는 그런 작품이다. 항상 걷던 길가에서 잠시 벗어나 인생의 한가운데 선 나를 만날 수 있는 시간, 더 많은 이들이 그런 행운과도 같은 선물을 받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