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행록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식칼에 무참하게 살해된 남편, 유리 재떨이로 살해당한 일곱살짜리 아들, 부인과 여자아이 또한 식칼로 살해. 이후 범인은 대담하게 목욕탕에서 자기 몸을 씻고 남편과 아내의 옷을 훔쳐서 도망을 친다. 단란한 한 가족이 비참하게 살해당한 사건. 이 사건을 취재하는 르포라이터가 만난 사람들을 통해 살해당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 듣게 되고 그 이야기들을 통해 <우행록>이란 이 작품의 제목을 이해하게 된다. '愚行錄'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기록' 정도로 표현하면 좋을까? 이제 그 어리석은 행동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작가와 기상천외한 한판의 두뇌싸움을 벌여본다.

 

<우행록>은 두가지 시점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형태적 구성을 나타낸다. 하나는 르포라이터가 살해된 가족들의 주변인들을 만나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파헤치는 구성이고, 다른 하나는 한 여성의 독백, 혹은 자신의 오빠에게 보내는 듯, 편지와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독특한 것은 책의 맨 앞부분에 등장하는 '3세 여아 영양실조 사망. 모친 체포, 유아 방기 혐의' 라는 신문 기사다. 도대체 이 기사가 이 사건에, 이 책의 이야기 전개에 어떤 관련이 있을까? 누쿠이 도쿠로와의 머리 싸움은 바로 여기에서 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결국 그에게 뒤통수를 얻어 맞고 말았지만...

 

일가족 살해사건과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엉뚱하게 들리는 여성의 목소리! 처음부터 사건과 범인을 잡아보겠다며 작가와의 치열한 두뇌싸움을 결심한 독자들의 촛점을 분산시키는 작가의 의미심장한 구성이 매력적이다. 엘리트 남편과 청초하고 순수하기까지한 아내를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다양한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들 사이에서, 그들이 언급하는 사람들속에서 발빠르게 범인의 윤곽을 찾기 위해 독자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간혹 작가가 선물해놓은 트릭과 복선들이 있지만 마지막 책을 내려놓고서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작가와의 대결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비밀이 초콜릿으로 바뀐거야. 아주 달콤한 초콜릿으로. 그래서 내게 비밀이란 초콜릿처럼 달콤한 맛이야. 나만의 비밀. 난 비밀이 정말 좋아.' - P. 25 -

 

사실 누쿠이 도쿠로와의 만남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통곡] 이라는 작품을 통해 일본 미스터리 문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선사했다는 이 작가의 작품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이 작품 <우행록>이 던져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말과 작품의 주제는 이전 그의 작품이 선사했을 미스터리 문학계의 충격을 조금은 짐작케 한다. 단순히 반전이 전해주는 미스터리의 묘미가 아닌 인간이 지닌 본성에 대한 심도 깊은 관찰과 서술, 사회성 짙은 그만의 색깔이 단순한 재미 이상의 깊이를 전해주고 있다.



 

인간이란 자기의 삶이 걸린 문제에는 필사적이기 마련입니다.

다코의 회사 동료가 들려준 이 말처럼 인간들의 마음속에 비친 한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다. 이웃 주민, 아이들의 학부모, 남편의 회사동료, 아내의 대학친구, 남편의 옛 여인... 이들이 들려주는 살해당한 남편과 아내의 모습은 극과 극을 달린다. 청초하고 미인이며 말 한마디조차 배려할 줄 알았다던 아내에 대한 평가는 증언들이 늘어날 수록 순수해보이지만은 않은 모습을 띄게 되고, 남편에 대한 평가도 크게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타인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양날의 검이다.'

책의 말미 오야 히로코라는 서평가는 이 작품에 대해 '해설을 쓰기 껄끄러운 작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살해된 부부들의 모습이 그들 주변인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오지만 단순히 그 목소리는 그들 부부를 바라보는 시선일 수도 있고 그 목소리를 내는 자신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 양날의 검이라는 작가의 표현!은 참 적절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들이 찾아가는 사건의 실체는 살해된 부부의 죽음의 비밀과 범인의 행방이지만 작가가 독자들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실제 모습은 그들이 가진 비밀이 아니라 그들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인듯 하다. '해설을 쓰기 껄끄러운 작품'이라는 서평가의 말이 그렇게 마음에 와닿는다.

 

<우행록> 이 작품에 담긴 모든 목소리, 모든 행동... 그 모든것이 바로 '愚行' 이다. 등장하는 인물들, 죽음을 맞이 하게된 주인공들 모두 愚行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어떨까? 작품속에 등장하는 누군가를 평가하는 일, 이 작품 자체를 평가하고자 이 글을 적고있는 자신조차도 愚行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고 했던가. 갑자기 이 말이 떠오른다. 더이상 愚行을 하지 않으려면... 양날에 검 앞에 서지 않으려면...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 가를 가르친다.' 미국작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윌리엄 포크너는 이렇게 말했다. 단순히 미스터리가 전해주는 추리의 즐거움과 더불어 누쿠이 도쿠로라는 작가가 심도있게 써내려간 사회성 짙은 이 작품을 통해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긴 이중성, 살해된 부부에게 보여지는 실체, 사회 구조적 모순과 계급적 불균형... 인간 내면과 사회적 병폐에 대한 작가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시선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우행록>은 충격적 결말과 반전, 트릭과 복선이 전해준 재미를 넘어서는 사회성 짙은 누쿠이 도쿠로의 시선과 묘사가 너무나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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