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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추정 시각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요즘 국내 정세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어수선' 이란 말이 딱 맞을 것 같다. 정재계의 비자금과 각종 비리사건, 대포폰으로 대변되는 민간인 사찰 사건, 대통령 영부인이 모 기업 사장 연입로비의 몸통이라는 둥, 또 G20 서울 정상회의와 관련한 낙서 사건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사건과 새로운 사건들이 쉴 새 없이 터져나오고 있다. 검찰의 정권 감싸기와 야당 죽이기, 정치권의 끈이지 않는 사건 사고들. 배춧값에 신음하던 서민들의 한숨 소리만 더욱 커져간다. 싸늘한 날씨보다 더 냉냉한 11월의 한파가 지금 한반도에 휘몰아치고 있다.
<사망 추정 시각>을 시작하면서 이런 국내 정세를 먼저 이야기한 것은 아마도 이 소설의 내용이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그늘과 그림자에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법을 지켜라' 하고 외치면서도 정작 입법하시는 국회의원님들은 자기 주머니 채우기에 급급하고, 휘황찬란한 금배지와 정권창출?에 여념이 없으시다. 법을 집행하시는 검찰, 경찰 여러분들은 참 열심히 하시기는 하지만 뭔가 짜맞춘 듯한 느낌으로 언제나 국민들에게 2% 부족한 아쉬움을 남긴다. 법 위에 군림하시는 대통령님은 힘겨운 서민의 낙서 그림 한장에 노발대발 하시며 구속하라고 호통을 치신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는 도대체 어느나라의 법이란 말인가?
와타나베 쓰네조. 어느날 주식회사 와타나베 토건의 사장인 그의 외동딸 미카가 유괴를 당한다. 범인은 몸값으로 1억엔을 요구한다. 지역 유력인사인 쓰네조 집안의 사건인만큼 경찰은 즉각 현경본부와 사건 발생 지역인 후지요시다 경찰서에 합동 조사 본부를 설치한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세가지 사실, 하나는 쓰네조가 범인의 목소리를 알지도 모른다는 사실, 두번째는 범인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던 점,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는 '경찰서에 신고하면 딸의 목숨을 없다'라는 흔한 대사가 빠졌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쓰네조는 돈을 준비하지만 경찰의 과실로 몸값을 건네지 못하게 되고 결국 미카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고바야시 쇼지. 26살의 백수, 절도 3범의 고바야시 쇼지가 범인으로 체포된다. 죽은 미카의 가방에서 발견된 그의 지문이 그를 범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쇼지는 범인이 아니다. 작가는 고바야시 쇼지가 범인이 아님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는 단순히 산에서 미카의 가방을 발견하고 돈만 꺼내어 갔을 뿐이다. 미카의 아버지 와타나베 쓰네조는 외동딸의 '사망 추정 시각'에 촛점을 맞추지만 경찰은 자신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조작을 서슴지 않고, 쇼지를 범인으로 만들기 위한 취조를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경찰과 검사, 변호사를 비롯해 이 사건에 관계된 모든 관리들은 쇼지를 범인으로 만들어버리고 1심에서 사형을 언도하기에 이른다.
가와이 도모아키. 국선 변호사인 그가 고바야시 쇼지의 항소심을 담당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쇼지에 대한 취조과정과 재판에서의 의문점들을 발견한 도모야키는 쇼지가 누명을 쓰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것 하나 쉽게 풀리지 않는다. 물증을 찾아내기 위해 도모아키는 사망 추정 시각이 조작 되었음을 밝혀내게 되지만 그의 노력처럼 무고한 청년 쇼지의 결백을 밝혀내기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쇼지와 도모아키, 권력과 거대 조직 간의 치열한 사투가 그렇게 계속된다.

유괴와 살인, 우리 사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소재이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작가는 억울한 누명에 촛점을 맞춘다. 전과 3범, 피해자의 가방에서 찾아낸 지문, 고바야시 쇼지가 범인으로 확정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범인이 아니다. 그리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우리 사회가 가진 모순과 그 무자비한 잔인성을 작가는 낱낱히 고발한다. 그럴 수도 있다는 가정을 그렇다!로 단정짓는 우리 사회, 법치 국가가 가진 허울과 무자비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쿠 다쓰키. <사망 추정 시각>은 현직 변호사인 사쿠 다쓰키의 작품이다. 그는 소설가 지망생이었지만 소설 집필을 위해 읽던 '형사 소송법'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변호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독특한 이력만큼이나 현직 변호사라는 장점은 이 작품속에서 드러나듯 사건의 수사, 취조, 재판 등에서 실감나고 박진감 넘치는 전개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느 작가든 작품을 쓰기 위해 다양한 분야를 조사하고 공부하지만 현직 변호사만큼의 사실성과 전문성을 소설속에 담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을 '픽션'이라 부를 것인가? 나로서는 '다큐멘터리' 혹은 '리포트'라 부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픽션'보다는 '다큐멘터리', '리포트'라고 부리고 싶다고 말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픽션'이 더 어울릴듯 싶다. 아니 어쩌면 '논픽션' 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우리 사회에서 종종 비춰지는 이와 유사한 사건들의 존재를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그 사건의 보다 깊숙한 모습과 억울한 누명의 과정을 듣게 된다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끊어 오르는 분노를 참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논픽션이라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전문성과 치밀함을 보여준 이 작품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니기를 바라며 이 작품이 '픽션'으로 남을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인생은 화와 복, 즉 재앙도 행복도 서로 뒤섞여 꼬인 새끼줄 같다는 의미인데, 내가 원죄사건을 만날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는 이유는 원죄라는 건 결코 한두 사람의 악인이 품은 악의나 누군가 한 사람의 실수만으로 일어나는게 아니기 때문이지. 수십 가닥의 짚이 꼬여서 굵은 밧줄이 되는 것처럼, 수십명의 인간이 한 일, 즉 악의뿐만 아니라 일종의 선의, 배신이나 과실에다 일종의 의무에 충실한 행동이나 모범적인 행위도 모두 함께 꼬이고, 다양한 인간 활동이 얽히고 설켜, 그것이 어떨땐 원죄가 되기도 한다는 말일세...' - P. 523 -
1, 2부로 나누어 짧은 단락으로 구성된 <사망 추정 시각>은 참 쉽게 읽히는 작품이다. 현직 변호사인 작가의 이력이 고스란히 작품속에 녹아있어 전문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전개가 매력적이다. 우리 사회가 저지르고 있는, 권력과 조직의 공공연한 폭력에 희생당하고 있는 이들은 없는지 이 작품을 통해 다시금 주변을 되돌아 보게 된다. 그렇게 '꼬인 새끼줄'이 한올 한올 풀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희망해본다. 원죄도 없고 거대 권력의 횡포로 무고한 이들이 아픔을 겪지 않는 그런 세상을 꿈꾸어본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대한민국이 민주 공화국이며 법치국가임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그런 세상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