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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놀 천사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영혼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작가'!
몇년전 만났던 소설집 '슈샨보이'를 통해 너무나도 유명한 작가 아사다 지로를 처음 만났다. 영화로 사랑을 받기도 했던 그의 작품들이 많지만 지면으로 만난건 그 작품이 처음이었다. 그 당시 그 작품을 읽은 후 든 느낌을 개인적으로는 조금은 빛이 바래기 시작한 '베이지색'톤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이는 아마도 그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추억, 향수, 해후를 그린 작품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재의 시간속에서 언뜻 언뜻 스쳐지나가는 과거의 회상과 추억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아픔 상처와 영혼을 따스하게 어루만져주는 작가, 아사다 지로! 그가 그려내는 '또 하나의 色'과의 만남을 준비한다.
자극적인 소재, 강한 인상을 주는 제목과 표지, 반전과 트릭이 난무하는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작가는 잠시 쉬어가는, 여유를 즐기고 과거를 추억하게 하는 특별한 시간을 선물한다. <저녁놀천사>는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번엔 어떤 이야기들이, 아니 어떤 아픈 사연과 쓰라린 상처를 토닥여줄 지 아사다 지로의 따스한 손끝에 눈을 귀울이게 된다. 표지속에 그려진 저녁놀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뭔가 따스한 추억의 향기가 배어나올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세상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편안한 맘으로 그가 전하는 따스한 풍경속 추억과 향수를 느껴보고 싶다.
쉰살의 이치로와 귀가 어두운 아버지가 운영하는 열평 남짓의 작은 가게 쇼와 식당에 찾아온 한 여인. 카바레엣 일하던 여자와 결혼후 일주일만에 도망친 그녀에게 돈까지 빼앗겨 버린 이치로,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홀로 된 아버지와 가게를 운영하던 그들 부자에게 묘령의 한 여인이 찾아온다. 쇼와 식당의 일을 도우며 가게에서 생활하던 준코, 6개월 정도 정이 들무렵 홀연히 떠나버린 그녀, 그리고 일년이란 시간이 흐른다. 그러던 어느날 자살한 여인의 신원을 확인해달라는 경찰서의 전화 한통, 그녀가 가지고 있던 것은 식당의 성냥갑이었다. 준코를 '스미다 강에 터지는 불꽃'같다던 아버지, 어느새 사그러든 불꽃은 [저녁놀 천사]처럼 겨울 하늘에 남아있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들이다. 한 여인이 찾아오고 함께 생활하고 순수한 맘이 오가지만 사건이랄만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갑작스런 실종과 죽음, 그리고 회상과 오래도록 남는 여운. 아사다 지로는 이렇듯 색다르진 않지만 평범함 속에서 잠시 현재의 시간을 내려놓고 자신을 둘러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두번째 단편 [차표]에서는 이혼한 부모와 떨어져 할아버지와 살아가는 아이 히로시의 이야기를 그린다. 2층에 사는 야치요 아줌마와 목욕탕에 간 일, 과거 엄마가 떠나면서 차표에 립스틱으로 전화번호를 적어준 일, 전쟁에 대해 참회하고 아직도 전쟁?중인 할아버지, 그리고 단짝 친구 치카코. 현재의 시간속에서 과거를 바라보고 또 다른 현재를 이야기하는 작가의 따스한 위로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특별한 하루]와 [호박]은 정년 퇴임을 앞둔 중년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정년을 3개월 앞둔 어느날 정년퇴임의 시간을 준비하고 체험하는 다카하시 부장의 이야기 [특별한 하루]. 커피숍을 운영하는 아라이와 정년 퇴임을 앞둔 형사 요네다의 이야기 [호박]은 중년과 노년의 시간속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추억과 향수에 사로잡힌다. [언덕 위의 하얀 집]과 [나무 바다의 사람]은 청년들이 주인공이다. 사랑과 우정이란 소재가 또 다른 아련한 향수와 추억을 선물하는 작품들이다.
<저녁놀 천사>는 이처럼 소년에서 노년에 이르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교감하고 소통하고 추억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아사다 지로식으로 써내려간다. 그의 작품은 참 따스하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특별하다. '재미'만을 추구하는 젊은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맛없고 색깔 없는 작품들로 인식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우리에게 익숙한 재미가 아닌 독특한 색깔과 깊이 있는 여운으로 색다른 즐거움과 멋을 전해준다.
처음 아사다 지로의 작품을 접했을때 그의 작품을 표현한 말이있다. 그건 바로 '빨간 약'이었다. 어린시절 이 약 하나만 있으면 모든 병을 고칠듯 했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깨지고 다쳤을때면 어김없이 바르고, 엄마가 아이 젖을 뗄 때도 사용했고, 거의 모든 상처를 치유해주던 그 '빨간 약'. 아사다 지로의 소설은 바로 이 '빨간 약'을 닮았다. 과거가 없이 만들어진 현재와 미래가 없듯 과거는 추억이 되고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현재를 만들고 미래를 만들어갈 소중한 시간인 것이다. 만약 그 과거의 시간에 만들어진 상처를 치유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시간은 올바르게 서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아픈 상처와 고통을 감싸 안아주는 빨간 약 그것이 바로 아사다 지로의 소설이 아닐까.
오랫만에 만난 아사다 지로와의 시간이 즐겁다. 그저 편안하고 느긋하게 그 시간을 즐기게 된다. 조급해 할 것도 없고 작가와 지리한 두뇌싸움도 필요없다. 무엇이 어떻고 어떤 것이 또 이렇고 ... 머리를 싸매지 않아도 좋다. 그저 그의 시간을 함께하며 우리의 시간을 추억하고 새롭게하는 그 무엇을 느끼면 그만이다. 아니 굳이 느끼지 않아도 좋다. 추억의 빨간 약처럼 그의 따스한 손끝에서 어느새 우리의 아픈 상처와 고통은 사라져 버릴것이다. 오랫만에 영화 '철도원'을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 울고 웃고 감동받는 사이 어느새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던 아픔과 시간이 남겨둔 앙금 마져 사라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