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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의 미궁호텔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6
야자키 아리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평점 :
미궁 같은 호텔을 배경으로 한 중년 남성 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바로 <앨리스의 미궁호텔>이다. 모두 다섯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네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앨리스의 미궁호텔>은 호러 작가 구마노이 선생이 소설을 쓰기 위해 찾아간 그랜드 호텔에서 핑크빛 봉제인형 돼지돼지씨와의 만남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움직이는 봉제인형, '돼지돼지씨'를 보고는 요괴라고 호들갑을 떠는 구마노이, 구마노이는 작품 마감기한을 얼마 남기고 앨리스의 토끼를 대신해 '돼지 벚꽃'이란 돼지를 등장시켜 독특한 이야기를 완성시킨다. 모두 돼지돼지씨를 만난 덕분이다. 구마노이가 썼다는 중년판 앨리스가 궁금하다.
'돼지 인형이다. 빛바랜 분홍색에, 쀼죽 튀어나온 코와 커다란 귀. 오른쪽 귀는 뒤로 젖혀졌다. 검은 구슬을 꿰매 붙인 점 눈. 그것이 테이블 끄트머리에 얹혀 있다.'
오랫만에 정말 즐겁고 행복해지는 작품과 만난듯하다. 맨 첫번째 이야기 '인형의 밤'의 주인공 '스기야마 오리'는 그랜드 호텔에서 만난 돼지돼지씨를 이렇게 묘사한다. 봉제 인형 돼지돼지씨는 '저는 기본적으로 손님 앞에 되도록 나서지 않기 때문에 저를 발견하실 수 있는 분은 정말 몇분 안 계시거든요.' 라는 말로 봉제 돼지가 말을 하고 호텔의 버틀러로 일한다는 황당한 설정을 아무렇게도 않게 설명한다. 봉제 돼지가 말을 하고 호텔 직원들을 교육한다. 조금은 황당하기도 하지만 책을 넘기다보면 그렇게 낯설지도 당황스럽지도 않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야기는 이렇다. 작은 도시의 그랜드 호텔, (두번째 이야기속에서 주인공 아키미쓰는 이 호텔의 분위기를 '백악의 저택'이라 했던가? 어쨌든) 이 호텔을 방문한 이들이 만나는, 버틀러로 일하는 분홍빛 봉제인형 돼지돼지씨에 의해 '현실의 작은 상처와 고민'에 맞닥드린 이들이 위로를 받고 기적을 만들어낸다는 어찌보면 단순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돼지돼지씨가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일상에서 삶에서 어떤 고민과 상처가 있는 이들의 눈에 보이는, 정말이지 환상과도 같은 키다리 아저씨의 모습이랄까? 각 단편 하나하나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서로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벚꽃 축제와 기념 연극, 돼지돼지씨라는 소재로 연결될 수도 있다.
갑자기 쓰러진 어머니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병원과 동생의 꽃집일, 집안일에 여념이 없던 스기야마 오리. 생활을 바꾸고 싶다던 그녀이지만 벌써 석달째 이렇게 정신없이 빡빡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친구의 전화를 받은 오리, 그랜드 호텔에 근무하던 친구는 벚꽃 축제 20주년 기념 연극공연에 그녀의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호텔에서 만난 돼지돼지씨, 연출자인 스자쿠씨는 결정을 망설이던 오리에게 돼지돼지씨가 연극에 참여할 수 있게 설득해달라는 임무?를 맡게 되고... 첫번째 이야기 '인형의 밤'은 이렇게 돼지돼지씨와의 대화와 만남을 통해 오리는 그녀가 잊고 있었던 열정을 되찾게 된다는 내용을 그린다.

다른 세편의 이야기들도 이와 비슷한 구성을 갖는다. 여자친구와 호텔을 찾았다가 다투게 되는 '아키미쓰', 이혼한 후 떨어져 사는 자신의 딸 '쓰구미'가 벚꽃 축제 기념 연극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연극 오디션에 참여하는 '우도 겐', 그리고 마지막 중년판 앨리스를 쓰게 된 '구마노이 선생'의 이야기까지 그랜드 호텔에서 돼지돼지씨를 만나 사랑을 되찾고, 잊고 있었던 딸 아이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되고, 마감을 얼마 남기지 않고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그들 뿐만이 아니다. 마지막 단편인 '작은 사람과 큰 하늘'에서는 각 단편속 주인공의 맞은 편에 서있던 등장인물들이 축제 기념 연극 '오셀로'를 보게 되면서 그들이 놓치고 있던 것들을 깨닫고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특별한 기적과 마주하게 된다. 앞선 네개의 단편들이 각자 주인공 한명의 시점에서 전개되었다면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아키미쓰와 작년에 호텔을 찾았었던 가나에, 우도 겐의 이혼한 전처인 히로코, 구마노이 선생의 동료 작가인 도리우미씨, 오리의 남동생 요시나리, 쓰구미의 친구인 미쿠...등 번갈아가며 시점을 달리하게 된다. 이들 또한 축제 기념 연극을 중심으로 해서 모여 들고, 연극을 관람하게 되면서 소리없이 작은 기적과 마주한다.
핑크빛 봉제인형 돼지돼지씨는 어떤 초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마법을 부리는 존재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귀엽고 예쁜 핑크빛 봉제인형일 뿐이다. 하지만 그를 보고 만나게 된 사람들은 마법처럼 상처와 고민을 치유받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돼지돼지씨의 온화하고 따뜻한 말투와 행동에, 마음에 담겨져있던 온전한 자신들의 속마음과 고민을 털어놓게 되고, 비로소 홀가분하게 새로운 일상으로, 삶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 현실속에서도 그렇다. 진정한 친구는 고민을 털어놓는 친구에게 충고나 대처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조용히 친구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돼지돼지씨의 이런 행동이 바로 그들에게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현실을 그려내면서도 환상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돼지돼지씨를 만나러 그랜드 호텔로 달려가고 싶어진다. 역자 후기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돼지돼지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이 무려 열 두권이나 된다고 한다. 이 작품은 발행 순서로 볼 때 중간쯤에 위치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책속 단편단편이 하나의 이야기로도, 혹은 연결된 이야기로도 손색이 없는 만큼 순서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비채의 블랙&화이트 26번째 시리즈이기도 한 <앨리스의 미궁호텔> 역시 다른 시리즈가 그랬던 것처럼 매혹적인 작품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너무나 따뜻한 책이다. 노오란 표지 아래쪽에 커다란 코를 킁킁 거릴것 같은 돼지돼지씨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현실의 고민과 상처를 가진 이들에게 위로와 기적과도 같은 행운을 전해줄 <앨리스의 미궁호텔>이 반갑다. 돼지돼지씨와 만나는 당신은, 자기 자신을 비어낼 용기를 얻고 사람과 사랑을 키우고 만들어나갈 기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뛰어난 가독성,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구성, 독특한 소재와 따뜻한 이야기들이 읽는 이의 마음까지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호텔 버틀러는 물론이고, 요리 선생, 아르바이트 산타, 형사와 찻집 종업원에 이르기까지 시리즈에서 다양한 직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는, 귀여운 핑크빛 봉제인형 돼지돼지씨와의 또 다른 만남이 기대된다. 다음에는 어떤 모습일지, 또 어떤 행운과 기적을 선물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