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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인간
아베 고보 지음, 송인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좌절금지!' 표지를 보고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바로 이 문구이다. 한껏 고개를 숙인 한 남자, 작은 상자속에 커다란 몸을 웅크린 이 남자의 모습은 몇년전 유행했던 '좌절금지'라는 모습이 떠오른다. 무엇이 그토록 힘겹고, 얼마나 힘들기에 작은 공간속에 자신의 몸을 꼭꼭 숨기려 하는 것일까? <상자인간>이란 독특한 제목도 인상적이다. 종종 코미디의 소재가 되기도하고, 어린 시절 로봇을 꿈꾸며 만들기도 했던, 최근에 노숙자들의 필수품처럼 되어버린 상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는 이렇게 궁금증을 부풀리며 우리 곁을 찾아온다.
'이것은 상자인간에 관한 기록이다. 나는 지금, 이 기록을 상자 안에서 쓰기 시작한다.'
<상자인간>은 종이상자를 뒤집어쓰고 도시를 떠도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왜 그래야하는지, 무슨 이유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나'의 시점으로 이야기는 쓰여진다. 상자 안에서 쓰기 시작한 상자인간에 대한 기록!이 이 작품의 전부이다. 상자를 만드는 법을 시작으로 현실이되고, 간혹 환상이 되었다가 꿈인듯, 독특한 구성을 띄며 이야기는 계속된다. 책의 중간 중간에는 부랑자, 행려병자... 들에 대한 기사들이 등장한다. '나'의 시각속에, 나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다가도 또 다른 이야기들이 드러나기도 하고, 작은 사진속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한다.
이 작품의 저자인 아베 고보는 일본 현대의 대표작가로서 초현실주의적인 작품들을 통해 인간 소외나 정체성의 상실과 같은 현대 사회의 문제점들을 싶도 깊게 이야기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런 실존주의적 작품들로 인해서 그를 일본의 카프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은 낯선 작가이기도 하다. 미스터리 추리 소설의 재미에 빠져 조금은 단순하고 가벼운 이야기들을 즐기던 시간이 많았기 때문일까? <상자인간>이 왠지 무겁고 어렵다는 느낌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다.

1973년, 지금으로부터 거의 40여년 전에 출간된 이 작품은 이제서야 국내 독자들과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가벼움에 익숙해진 독자들의 평가가 어떨지, 초현실주의와 실존주의에 익숙치 않는 독자들의 평가는 어떨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상자인간'이 되어 도시를 떠도는 전직 카메라맨, 그가 상자에 써놓은 내용들이 이야기하듯 책속에서 넘실거린다. 너무 독특한 작품이다. 존재에 대한 새로운 해석, 상자라는 도구를 통해, 상자인간의 모습을 통해 그려지는 이 시대의 모습이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그려진다.
'나는 나의 추함을 잘 안다. 낯 두껍게 타인 앞에서 알몸을 드러낼 정도로 뻔뻔스럽지는 않다. 하긴 추한 것은 결코 나만이 아니다. 인간은 99퍼센트가 덜떨어진 존재다. 인류는 털을 잃었기 때문에 의복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알몸의 추함을 자각해서 의복으로 감추려 했기 때문에 털이 퇴화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도 사라들이 어떻게든 타인의 시선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눈의 부정확함과 착각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 P. 119 -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서 말하려는 바는 무엇일까?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상자인간>이 내포한 의미는 무엇일까? '상자인간'이란 말 속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지듯, 사회적 약자 혹은 사회 부적응자라는 의미가 그 첫번째일 것이다. 더불어 사회에 구속받기 싫어하는 사람들, 그들이 말하는 자유로운 삶 또한 '상자'속에 포함될 것이다. 또 어떤의미들이 숨겨져 있을까? 인간의 추함을 감추기 위해 굳이 상자를 뒤집어쓴 사람들, 또는 지금까지의 '나'를 버리고 싶은 욕망, 그리고 전혀 다른 '나'를 찾아가는 도구로서의 의미를 '상자', '상자인간'속에 담아내는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없이 추한 인간이란 존재, 그 존재의 욕망과 추함을 벗고 자유와 또 다른 삶을 갈구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책속에 담겨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본의 카프카 아베 고보의 이 작품을 통해 오랫만에 재미를 벗어난 '문학'을 만났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다소 난해하고 어렵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한번이 아닌 몇번 손 위를 내려오고 나면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아베 고보의 '실종 3부작'이라 불리는 '모래의 여자', '불타버린 지도', '타인의 얼굴'이란 작품들도 기회가 된다면 꼭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