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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맛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평점 :
"나는 왜 다리가 없을까. 나는 왜 꼬리가 있을까. 나는 왜 다리가 없을까." (P.115)
동화는 우리에게 즐거운 상상과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한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이솝우화,
스쿠루지, 피터팬의 모험... 등 수없이 많은 작품속에서 우리는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고
행복한 결말과 마주한다. 하지만 요즘 들어 동화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바탕으로 새롭고
개성있는 작품들과 많이 만나게된다. 얼마전에 읽었던 [백설공주는 왜 난쟁이 집에 갔을까?]
라는 작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던 동화속에 숨어있는 비밀을 풀어내는 '명작동화 다시보기'
라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창작동화인 [잠꾸니 꾸미] 시리즈는 '환상동화 '적 성격을 띈다.
[똥친막대기]는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순수동화'로 그리고 잠자던 토끼를 깨워 둘
모두 승리했다는 것으로 끝나는 [토끼와 거북이]와 같은 다양한 '반전동화'들도 있고, [어른
들을 위한 잔혹 동화] 같은 '잔혹동화'의 성격을 띈 작품 등 동화속 이야기들이 단순히
평면적이고 일반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것들이 많이 눈에 띈다. 그렇다면 이 책 <사과의
맛>은 어떨까? 그 맛을 찾아 책속으로 한걸음 발을 내딛어 보자.
[사과의 맛] 은 패러디 동화적 성격이 짙어보인다. 9편의 작품들은 동화와 설화, 신화속
이야기들을 차용하고 있다. 라푼젤, 헨델과 그레텔, 인어공주 ..., 등 동화속 이야기들은
쉽게 그 존재를 알수 있겠지만 다른 작품들은 그 뿌리를 찾기에 조금 낯설어 보인다.
상추를 좋아하는 여자 때문에 이웃집 마녀와 눈이 맞아버린 남편, 그리고 이층집 라푼젤
과 왕자, 카드빚과 은행대출금때문에 누군가를 놀이공원에 버려야만 했던 헨델과 그레텔
할머니 할아버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폐허로 변해버린 낙원 연금술의 밤, 지중해
나이트에서 인어쇼를 하는 수족관속 인어, 어부와 어머니의 욕심을 다룬 연목속 인어,
아버지를 감금하고 재산을 써버리다 동생에게 뒤통수 맞는 아들이야기 열역학 제2법칙,
달나라 북쪽 무지개만에 이주해사는 가족이야기 창백한 푸른 점, 곡예사의 첫사랑,
닭과 달걀에 이르기까지 동화에서 설화, SF를 넘나드는 다양한 소재들이 우리가 사는
치열한 '현실'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동화의 틀은 유지하면서도 등장
인물이 판타지 속의 세계가 아닌 현재의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내려와버린다. 작가는
이를 판타지적 무중력 상태에서 벗어나 일상의 중력권 안으로 하강한다고 말하고있다.
순수하고 행복이 넘실대는 동화속세상을 과감히 뛰쳐나와 간혹 살벌하고 피 비린내가
진동하기도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이 꿈틀대는 현실로 내려와버린 동화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사과의 맛은 사과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니고, 먹는 사람 입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맛은 사과와 먹는 사람 간의 접촉을 필요로 한다.' (P. 302)
표지속에서 보이는 편안하고 따스한 모습속에, 백설공주가 베어먹었던 사과의 독이들어
있는듯 하다. 동화책을 읽듯 편안하고 안정된 분위기가 있지만 그 속으로 조금씩 들어
갈 수록 인간들 고유의 역겨운 악취가 배어나온다. 한 입 깨물면 부모를 버리고, 감금
하고 불륜에, 아내를 학대하고, 욕심을 채우는 가장 인간적이고 욕망에 사로잡힌 차가
운 모습의 세상이 보이고, 다시 한입 배어물면 고부간의 갈등, 죽음과 살인이라는 또
다른 비정함이 엿보인다. 9편의 단편들 모두 가족이라는 공통된 배경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현실로 내려와버린 동화속에서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가족관을 여실히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작은 성찰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해준다.
사과의 맛이 어떠했는지.. 기억할 수가 없다. 달콤했는지, 시큼했었던지, 아니면 쓰디
쓴 맛이었는지 말이다. 마녀가 건네준 독사과 속에는 예기치못했던 또 다른 기회가
숨어있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과의 맛은 이제 잊어버리자. 그 맛이 어떠했든,
우리가 맛볼 앞으로의 사과는 달콤한 맛으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오현종 작가가
네번째 내미는 손을 이제서야 잡았다. 예쁜 표지가 맘에 들어 집어 들었던 작품이었
지만 그 속에는 더 깊고 예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치명적인 독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닌
약간 냄새나기 시작하는 그런 사과가 들어있었다. 그 사과와의 만남은 앞으로 우리
인생에서 더 좋은 사과를 고를 수 있게하고 사과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게 잘 보관할
수 있는 눈과 지혜를 선물이었다. 동화라는 쉽고 단순한 이야기 구조속에 철학적 깊이
와 현학적 지혜, 그리고 깊은 반성을 담아낸 오현종 작가의 기발함이 돋보이는 작품
이다. 어느새 그녀의 팬이 되어버릴것 같은 느낌이다. 전작인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부터 다시 만나봐야 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