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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의 사회과학 - 우리 삶과 세상을 읽기 위한 사회과학 방법론 강의
우석훈 지음 / 김영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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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서.“사회과학은 글을 쓰거나 생각을 정리할 때 또는 사회의 대안을 찾아갈 때 길잡이가 되어주는 실용적인 목적을 갖는 게 바람직하다.”사회과학의 의미 되짚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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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의 원고지 - 어느 예술노동자의 황홀한 분투기, 2000~2010 창작일기
김탁환 지음 / 황소자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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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어쩌면 이런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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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소설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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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을 넘기라고 독촉하는 손짓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전개가 아닐까. 가볍고, 신나게 돌아가는 대가의 꽁트. 상상력이 반짝반짝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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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권하다 - 삶을 사랑하는 기술
줄스 에반스 지음, 서영조 옮김 / 더퀘스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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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소크라테스 기조연설부터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신비론자와 회의론자, 정치학과 행복의 철학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징은 고대 철학자들이 주장한 이론만을 담은 게 아니라 여러 사례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멀게만 느껴지는 고대 철학이 현대인에게도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보이는 대목이다.

 

      저자인 줄스 에반스가 소개하는 사례를 읽고 있으면, 삶의 불합리함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내 주변인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스토아 학파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소개된 애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마음이 얼룩지는 느낌이었다. 애나는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마약을 했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이며 애나에게 성폭력을 일삼았다. 포르노 스튜디오에서 다른 서너 명의 남자와 애나를 성폭행했고, 그 당시 애나는 만 세 살이었다. 성장한 애나는 당시 어렸음에도 그 순간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기억이 앞으로 애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노예 출신인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회복 탄력성'의 철학을 강조했다. 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짓게 했다. 즉, "어떤 것들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어떤 것들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에픽테토스 <편람>)는 것이다. 애나의 경우, 어릴 적 경험은 파도와 같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속했으므로 '회복 탄력성'의 철학을 본받은 '인지행동치료'로 과거에서 오는 자괴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상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은 '통제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아 그 후의 삶을 밝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 다음 장에 소개된 에피쿠로스 학파는 "중요한 것은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고, 온전히 누리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또한 즐거움은 "존재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가르쳤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은 지구상에 단 몇십 년을 머물렀다 사라지고 마는 존재이니,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해야 하는 일 같은 건 없다"라고 말했으니, 언뜻 보면 그저 쾌락주의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저자는 "에피쿠로스가 쾌락주의자였다면 매우 소박하고 합리적인 쾌락주의자였을 것"이라고 에피쿠로스학파의 대중적 이미지에 반기를 든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저작에서 쾌락이라는 단어에 대한 보편적인 편견과 무지를 꼬집고, 진정한 쾌락이란 "신체에 고통이 없고, 영혼에 문제가 없는 상태"라고 말하며, 즐거운 삶이란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무엇을 선택하는 회피하든 그 근거를 찾고, 영혼을 잠식하는 잘못된 믿음을 없애는 데서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신비론자와 회의론자, 정치학과 행복의 철학,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함께 실려있다. 내게 가장 흥미롭게 다가온 철학은 '스토아 학파'의 철학이었는데, 그들의 칼같은 자신에 대한 엄격함, 즉 '수치화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아직 젊어서인지, 아니면 치열한 자본주의 사회의 틈바구니에 아등바등하는 작은 한 사람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에피쿠로스의 '즐거움의 철학'은 '과거와 미래에 천착하지 않고, 현재를 즐기자!' 정도로만 내게 활용하면 좋을 거라는 생각이다.

 

      항상 똑같은 말을 표지와 제목만 바꿔 출판하고 있다고 생각한 자기 계발서에 대한 나의 거부감을 철학적 이론과 사례를 통해서 해소시켜준 책이다. 이 책이 '삶을 사랑하는 기술'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고, 행동하는 철학을 독자들에게 권하기 때문에 어떤 측면으로는 '자기 계발'을 위한 철학서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기 계발서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란, 단순히 자유로운 인간은 어떤 규칙으로 옭아맨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다. 나 또한 인간은 수시로 자신을 검열하고, 성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저자가 '쓰레기 같은 아이디어에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했다고 비판한 론다 번의 '시크릿'과 같은 책이 예이다. 이와 같은 책은 허무맹랑한 이론은 접어두더라도, 우리의 삶의 가치가 단지 부와 명성이 전부인 것처럼 만든다는 점이다. 이런 책은 독자들에게 건강하고 깊은 사유를 하고, 자신을 성찰하게 만드는 대신 황금만능주의적 사고를 주입시킬 뿐이다.  

 

      아직 철학적 지식이 덜 여문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부분이 덜 나오고, 더 나왔으면 하는 아쉬움은 없었고, 부족한 부분도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만약 불만족스럽게 이 책을 읽은 독자가 있다면,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고대 철학자의 사상을 모티프 삼아 경쟁중독, 승자독식, 격분증후군과 같은 현대의 고질적인 병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한 발자국 다가섰으니 그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볼 때 마음이 심란한 상태였는데, 덕분에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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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딸 루이즈
쥐스틴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이덴슬리벨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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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작가 쥐스틴 레비의 자전적 소설로서 엄마의 병과 죽음, 동시에 자신의 임신과 딸의 탄생 과정을 함께 그려냈다. 엄마 알리스는 종양이 전이되어 투병 중이지만, 루이즈는 애인 생일을 맞이해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에서 자신이 아기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런 사실을 알리스에게 알릴 새도 없이 알리스의 병은 급속도로 나빠지고 만다. 결국 알리스는 죽음을 맞이하고, 루이즈는 곧 엄마가 된다. 이와 같은 모습은 ‘엄마-나-딸’로 이어지는 삶의 연장선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루이즈는 엄마가 눈앞에 있더라도 엄마의 부재를 느끼는 아이였다. 왜냐하면, 알리스는 다른 엄마들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알리스는 거리의 부랑자라도 상관없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했던 자유분방한 사고를 가졌으며 술과 담배, 마약, 예술에 심취한 보헤미안이었다. 알리스의 이러한 성향은 딸 루이즈에게 그대로 영향을 끼쳤다. 어린 루이즈에겐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이 거대한 자유가 가장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음, 이 모든 멋진 자유, 약이며 주사며 대초를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자유, 몇 방울 남지 않은 술잔을 홀짝 비우고, 여섯 살 나이에 우스갯소리를 하는 어른들에 둘러싸여 머리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면서도 정신은 몽롱해지는 취기를 발견하는 자유, 원할 때 빵이든 열대과일 리치든 크라코트 비스킷이든 사탕이든 바닥에 굴러다니는 건 무엇이든 먹어도 되는 자유, 옆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유, … 나는 이 자유가 끔찍하게 싫다. 그런 생각만 하면 두려워지고 몸서리가 쳐진다. 나는 오직 정해진 규범만이 좋다. 밀리미터 단위로 맞춰진 시간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습관, 늦었으니까 일찍 자러 가는 것, 때가 되었으니까 밥을 먹는 것, 엄마가 상냥하니까 엄마를 사랑하는 것…”

 

       이 부분만 보아도 두 사람의 관계가 애정과 희생과 같은 일반적인 모녀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루이즈는 평범함을 동경했고, 알리스로부터 부여받은 거대한 자유가 도리어 유년의 결핍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므로 루이즈가 알리스에게 갖는 감정은 ‘애정’이 아닌 ‘애증’이다. 이 책이 모녀 관계를 다루는 여타 소설과 차별화되는 이유도 거기서 비롯된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펼쳐지는 내적 독백이 주를 이루는데, 이와 같은 서술이 자기중심적이며 냉소적이다. 바로 루이즈가 알리스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러하다. 아픈 엄마를 두고 여행을 다녀온 것도, 과거를 회상하며 엄마를 원망을 수시로 원망할 수 있는 것도, “엄마가 죽었다…그러나 나는 울부짖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손을 배 위에 가만히 모은 채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울고 싶지도 않고 주저앉고 싶지도 않다.p97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독자는 루이즈의 냉정하고도 쌀쌀맞은 자조에 충격을 받다가도 쓸쓸한 마음이 되고 만다. 자조에 깃든 깊은 슬픔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강하고 덤덤한 루이즈를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아무 생각하지 않았을까? 주저앉지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

 

      누구나 엄마가 된다. 하지만 루이즈에게 ‘엄마’라는 칭호는 마치 한 여자만의 고유한 직업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언젠가 엄마가 된다는 사실 이외엔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먼 이야기 같기만 하다. 엄마가 되어서, 엄마의 입장으로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은 경이롭고 신비한 일이지만 그만큼 두려운 것이기도 할 것이다. 루이즈는 갑작스럽게 엄마가 된 자신이 엄마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엄마에게 받지 못한 사랑과 관심, 규칙적인 교육을 위해 다양한 책을 읽어 보지만, 다 헛수고이며, 제대로 엄마노릇을 못할 거라는 생각에 암담해지기 일쑤였다. 또한 뱃속에 있는 자식에게 어떠한 애정도 못 느껴서 술을 먹고, 불룩한 배를 내밀고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기도 했는데, 그 모습은 거의 엄마로서 자포자기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딸 앙젤이 탄생하자 루이즈의 마음은 이전의 것이 아니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갈망, 앙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다. 후반부에서 루이즈가 앙젤의 표정에서, 작은 시선에서 엄마의 흔적을 느끼는 장면은 내겐 마치 모녀의 불편했던 감정을 모두 내려놓고, 화해를 하는 것처럼 기적적으로 느껴졌다.

 

      소설은 자기중심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본 것 같은 느낌이다. 과거시제와 현재시제로 종종 바뀌기도 하고, 자유화법을 사용해서 시점과 주체의 행위가 헷갈리며 모호한 문장도 눈에 띈다. 이러한 특징이 거슬리는 독자도 분명 있을 거다. 주인공의 극단적인 말투와 건조한 사고방식 또한 독자를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에겐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더라도 소설 속의 인물의 삶을 내 것처럼 공감하고, 마치 또 다른 인생을 산 것처럼 여겨져 진다면, 그만큼 가슴 벅찬 기쁨이 있을까 싶은 것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맺을 수 있는 다양한 관계 중에도 ‘모녀 관계’는 필연적이다. 루이즈처럼 엄마에 대한 불편한 기억이 가득한 사람도, 엄마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도 자신을 낳아준 ‘엄마’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다. 나는 루이즈가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넘나들면서 토해낸 고통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엄마’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했다. 나 또한 엄마를 떠올리면 무조건적인 애정과 사랑으로 벅차오르는 건 아니다. 도리어 섭섭하고, 미워했던 엄마의 모습도 조금씩 떠오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를 절실하게 사랑함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엄마도 나를 사랑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루이스와 알리스의 관계도 사실은 그렇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내가 느끼기엔 알리스가 ‘엄마’라는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연민이라는 희미한 테두리가 그 단어를 보호하고 있는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물론 성인이 되어도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를 앞으로 엄마가 된 루이스가 이해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기대와 희망을 걸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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