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오 내부 둘러보기  

건물내부, 경기장의 뒤쪽 통로는 이곳의 역사에 대한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콜로세오의 형태의 일부를 모형으로 제작하고 조감도로 그려 놓아 한눈에 그곳의 옛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아레나에서 무수하게 죽어간 동물들의 뼛조각들이 수집되어있다.  

 

 

 

 

 

 

 

 

 

 

 

 

 

 

 

  

 

 

 

 

 

 

 

 

 

 

 

  

 

  

검투사들의 복장과 무기에 대한 친절한 설명서가 붙어있다.  

   

 

 

 

 

 

 

 

 

 

 

 

 

 

 

 

 

 

 

 

 

 

 

 

 

 

 

 

 

 

  

 

 

 

 

 

 

 

 

 

 

 

 

 

 

 

 

  

 

  

 

 

 

 

 

 

 

 

 

 

 

 

  

 

 

 

 

 

 

 

 

 

 

 

 

 

 

 

 

 

  

 

 

 

 

 

 

 

 

 

 

 

 

 

 

 

 

 

 

 

 

 

 

 

 

 

 

 

 

 

  

 

  

 

 투구 갑옷의 일부, 무릎과 다리부분을 보호하는 것으로 보이는 무쇠로 된 보장구, 그리고 창촉일것으로 짐작되는 무기들.. 

이런것들을 상대를 향해 겨누고 싸웠다는... 

  

 

  

 

  당시의 콜로세움의 모습을 그림으로 재현해놓았다.

 

 

 

 

 

 

 

 

 

 

 

 

  

 

 

 

 

 

 

 

 

 

 

 

 

 

 

 

  

  

 

 

이렇게 무거워보이는 것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싸웠을까??  

몸을 제대로 가눌수나 있었을까?  

게다가 묵직한 철갑옷에 무쇠창을 들고 상대를 향해 돌진하고 휘두르며 싸움질을 할 수나 있었을까??

  

 

 

 

 

 

 

  

 

 

 

 

 

 

 

  

 

 

 

 

 

 

 

 

 

 

 

 

   

  

 

  나팔인 듯, 관이 저렇게 길어서야 숨이 웬만큼 길지 않고서야 한번에 불어제낄 수나 있을지모르겠떠라는....

  

 

 

 

 

 

 

 

 

 

 

 

 

  

  

 

콜로세움은 여전히 보수중이다.  

다 허물어져버린 흔적을 한땀한땀 복원해놓는 것은 물론 그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세심하고 철저하게 관리하고 돌보는 듯 했다.  

  

 

 

 

 

 

 

 

 

 

 

 

  

 

  

  

 

콜로세오 관람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기 전, 내다본 외부 풍경이다. 

주변은 로마 역사지구, 로마 제국 전성기의 영광을 엿볼 수 있는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로마 제국의 전성기인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 쌓은 성벽 안쪽에 집중되어 있다. 성벽 안쪽에는 포룸 로마눔을 비롯, 원형 경기장, 포리 임페리알리 거리, 콘스탄티누스 황제 개선문, 마르첼로 극장, 카라칼라 목욕장,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 판테온, 상 파울로 푸오리 레 무라 교회, 산타 마리아 마조레 교회,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등이 있는데 유네스코의 보호를 받고 있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유명한 관광지에는 빠지지 않는 것이 기념품(SOUVENIRS) 상인들이다.  이 광장에도 몇몇 기념품노점상이 성업중이다. 

한 남자는 이곳을 떠나기전 대천사 미카엘 상을 구입했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천사들의 우두머리인 대천사 가운데 한 명으로, (죽음의 악마인 사마엘과 대립하는) 죽음의 천사이자 천상 군대의 지휘관으로 보고 있다.

미카엘은 “누가 하느님과 같은가?”라는 뜻으로, 이는 하늘나라에서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맞서 싸울 당시 그가 외쳤던 말이라고 전해진다. 그러한 이유로 미카엘은 일반적으로 사탄의 호적수로 여겨진다.

 

한남자는 묵직한 돌덩어리(사실은 아크릴 덩어리라고 짐작되는) 조각품을 어떻게 한국으로 가지고 가느냐고 별로 탐탁스러워하지않는 한여자의 눈초리를 진짓 외면하고 대천사 미카엘의 조각상을 신주단지 모시듯 사들고 돌아갔으나, 그날 저녁 숙소에서 열어본 조각상에서 예상치못한 흔적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것은 날개부분이 한번 부러졌다가 접착제따위로 얼렁뚱땅 붙여놓은 것처럼 보이는 명백한 흔적이었다. 

그것을 본 한남자의 얼굴은 황당함과 분노로 일그러졌고 다음날 반드시 정상적인 것으로 교환받고야 말겠노라는 깊은 결의를 다졌다.  

그런데, 이탈리아 사람들이 워낙 사기꾼이 많은데가 어리버리한 관광객에게는 결코 녹록치 않은 상대이므로 주의해야한다는 경고를 무수히 들어온 한남자는 살짝 덮쳐오는 근심을 뿌리치기 어려웠다...이것들이안바꿔주면 어쩌지...한번 보고 관광객이라고 이렇게 엉터리를 팔다니 참을 수 없다...내 삼단봉을 여지없이 휘둘러주마! 절대로 그냥 물러설 수 없지...한남자의  손떨림이 심해질수록 한여자도 은근히 두려운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다음날 두사람은 날이 밝자마자 결의에 찬 표정으로 다시 콜로세오 앞 광장으로 달려갔다.  

한남자는 한 손으로는 옆구리에 찬 삼단봉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한손으로는 부러진 날개를 덧붙여놓은 엉터리 미카엘 상을 노점상인에게 내밀며 어필했다.  

그러면서도 사실 두사람은 쉽게 바꿔주지 않을 때 어떻게해야 하는지 착잡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노점 상인은 선선히 그러라고 이야기했다. 

더욱이 그가 새로 꺼내놓은 대천사 상도 모두 똑같은 부분에 흔적이 있었다.  

그것은 하자가 아니라 제작과정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그가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중에서 네가 더 마음에 드는 것으로 가져가라'고 아랍에서 온듯 검은 얼굴의 청년 노점상인은 한남자에게 말했다. 그제서야 두사람은 찬찬히 여러 개의 대천사 상을 살펴보았으나 모두 날개부분에 같은 흔적이 있었고 그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고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날개가 부러진 대천사 상을 사들고 갔다가 속았다고 분통을 터뜨리며 밤잠을 설치고,다음날 결연한 표정으로 다시 찾아간 노점 앞에서 두사람은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깨닫고 헛웃음을 터뜨렸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개선문.  

 

  

 

 

 

 

 

 

 

 

 

 

 

 

 

 

  

 

 

 

관광지답게 갓 결혼한 커플들의 기념촬영 장소로도 유명한 듯,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312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서로마 통일을 기념하여 원로원이 건조하여 315년 봉헌하였다.  

높이 21 m, 너비 25.7 m, 안길이 7.4 m로, 본체는 백대리석, 아치 등의 일부에는 색채석을 사용.  

정면 기둥 위에 8개의 조상()이나 벽면 부조 등에는 전시대의 것을 다른 건물에서 옮겨 그대로 사용하였다.  

티투스 개선문(1세기 후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3세기 초) 등과 같은 종류의 로마 모뉴먼트에 비하여, 고전문화의 우아함을 지닌 작품이다. 

아득한 옛날, 우리가 기원후 20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 세상에 존재하리라고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던 시절을 혹독하게 살다간 사람들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로마의 역사 유적들 앞에서 겨우 100년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 존재는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깨닫게된다.  

이깟 몇 장의 사진으로  그곳의 흔적과 체취와 오래전 죽어간 생명들의 서글픔을 모두 전할 수는 없다. 아무리 진지한 사진일지라도 바로 그 현장에 발을 디디고 이리저리 휘도는 바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안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 하여 그곳을 몇시간 서성거렸다는 이유로 이제 조금 알게되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한여자는 바로 그 로마, 뜨거운 역사의 현실 속을 발길로 돌아 나온지 1년이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어느것 하나 현실이었음을 자신할 수도, 그 어느 것하나 꿈이 아니었음을 강하게 부정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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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자 2011-09-23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실 나도 저 콜로세오에선 묘한 페이소스에 사로잡혀 한동안 넋이 괴로웠다오...
뭐랄까, 정말 피비린내 같은 것이 느껴졌어...
인간이 살아가는 데 정녕 이토록 '잔인함'이라는 요소가 필요한 걸까?... 라는 깊은 회의 같은 것...
좌우간.. 나는 저곳을 이리저리 지나다니면서 손으로 계속해서 돌덩이를 만지작거렸었지..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맡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으니까...
아무도 안 보는 데선 볼따구도 문질러보았다니까....
젠장... 그래도 다시 가보고 싶으니...

그건 그렇고...
저 미카엘님께선 지금 내 오피스 책상의 10시 방향을 정확히 지키고 서서
창쪽에서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내쳐주고 계시지...
날개부분 균열흔적은 사실 균열이 아니라, 오래된 돌의 효과를 내다보니 그리 된 거라는 설명이 있었지요...
그러고 보니 조각상들 중 일부러 그리 만들어져 나온 제품들이 다수인 건 사실이고....
암튼 미카엘님에 조금이라도 상처 갈까봐 온갖 속옷꾸러미와 양말짝들을 동원해 돌돌 말고 또 싸매서
우리 대천사님 상당히 곤혹스러우셨을 테지만 덕분에 한국까지 안전하게 모셔올 수 있었다는....






 

 콜로세오 [ Colosseo ]

  


   

 

 

 콜로세오 역 앞.  

콜로세오 관람을 위해 모여든 관광객들....오전10시 경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로 이미 붐비고 있다. 

 

   

 

 

 

 

 

 

 

 

 

 

 

 

 

  

   

 

 멀리서 바라본 콜로세오 외관. 

  

 

 

  

 

 

 

 

 

 

 

 

 

 

 

  

 

  

 

 

 

 

 

 

 

 

 

 

 

 

  

 

 

 

 

 

 

 

 

 

 

 

 

  

 

 

콜로세오 는 로마의  포로로마노(고대명은 포룸로마눔) 동쪽 저지에 있는 로마 최대의 원형극장으로, 흔히 '콜로세움(Colosseum)'이라고 한다. 고대의 정식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mphitheatrum Flavium)>이다. 
 

플라비우스 왕조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본래는 비공식 이름이었던 콜로세움(Colosseum)의 유래에 대해서는 원형 경기장 근처에 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청동상(Colossus Neronis)과 명칭이 혼동되었다는 설과 '거대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콜로살레(Colossale)와 어원이 같다는 설이 있는데 중세에는 그 자체가 ‘거대한 건축물’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최대지름 188m, 최소지름 156m, 둘레 527m, 높이 57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 아래층에서부터 층층이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콤퍼지트식 등 당시 건축 기법을 총망라해 지어진 초호화 투기장이다.

내부는 최대지름 86m, 최소지름 54m의 아레나(투기장)를 중심으로 카베아(관객석)가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아레나 지하에는 맹수우리와 기구보관실이 있다. 7만5천명까지 수용이 가능.

이곳은 네로황제가 황금궁전의 일부인 인공못을 만들었던 장소로, 72년 베스파시아누스황제가 착공하여 80년 티투스 황제 때 완공되었다. 완공식때는 기념흥행으로 100일에 가까운 투기가 열렸다고 한다. 이 축제 기간 동안 9천마리의 야생동물과 2천여명의 투사들이 희생되었다 한다.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행사는 대개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투사끼리 벌이는 격투와 야생동물사냥이라 할 수 있는 베네이숀(Venatione)이 그것이다. 보통 야생동물사냥은 오전 중에 열리게 되고 투사끼리의 격투는 오후에 벌어지는 것이 통례였다.
  

 글라디아토르(검투사)의 시합과 맹수연기() 등이 시행되었으며,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에는 신도들을 학살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한편, 로마 정치가들에게 원형경기장은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화합을 도모하며 때로는 로마나 귀족의 권위에 불복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보복을 암시하는 공간이었다. 
 


 

 

 

  

 

 

 

 

 

 

 

 

   

 

그 시절의 검투사 복장을 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요금을 내면 관광객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어준다. 

 

  

 

 

 

 

 

 

 

 

 

 

 

 

 

 

 

 

 

 

 

 

 

 

 

  

 

 

  

 

 콜로세오 뿐 아니라 주변에도 보이는것이 모두 유적이다. 드넓은 광장은 온종일 관광객들로 붐빈다.

 그것은 이 지역이 로마 역사 지구이기 때문.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의해 건설된 로마는 로마 공화정과 로마제국의 수도로 전성기를 누렸으며 이후 8세기까지 지중해 문화의 중심 도시 역할을 했다. 유네스코는 1980년 로마의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이후 1990년 보존 지역을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쌓은 성벽 안쪽까지 넓혀서 지정했다.

로마 역사지구 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인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 쌓은 성벽 안쪽에 집중되어 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성벽은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270년 경 착공한 것으로 전체 길이 19km, 높이 6~8m에 총 14개의 문이 있으며 현재까지 대부분이 보존되어 있다.  

성벽 안쪽에는 포룸 로마눔을 비롯, 로마 제국 전성기의 영광을 엿볼 수 있는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원형 경기장, 포리 임페리알리 거리 콘스탄티누스 황제 개선문, 마르첼로 극장, 카라칼라 목욕장,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 판테온, 상 파울로 푸오리 레 무라 교회, 산타 마리아 마조레 교회,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등이 유네스코의 보호를 받고 있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콜로세오 내부 관람을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 

<로마패스>가 있으면 좀더 쉽게 빨리 입장할 수 있다. 

  


 
 

 

 

 

 

 

 

 

 

 

  

   

 

  

 

 

 

 

 

 

 

  

 

 

  

 

 오랜 시간의 흔적을 건축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지붕처럼 비스듬하게 된 부분이 계단식으로 된 객석.  

당시에는 모두 이어져서 계단식으로 원형경기장을 둘러싸고 만들어져있었을 것. 지금은 형태만 알아볼 수 있게되어있다는..

 

 

 

 

 

  

 

 

 

 

 

 

 

 

 

  

 

 

 

   

 

 

  

 

 

 

 

 

 

 

 

 

  

 

  

 

  아레나 아래쪽, 지하에는 맹수들을 가두어 놓았다가 경기가 열리면 머리 위의 경기장(아레나)으로 올라오게 된다.  

수많은 짐승들과 검투사들이 인간들의 쾌락을 위해 의미없는 격투를 벌이다 죽어갔다.

  

 

 

 

 

 

 

 

 

 

 

 

  

 

  

 

 지하 맹수우리 윗부분에는 현재 마루판으로 일부 덮혀있는데 경기장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짐작된다. 사진에서 멀리 사람들이 기대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난간이 있는 바닥면이 그것이다...

 

 

 

 

 

 

 

 

 

 

 

 

 
  

  

 

건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콜로세움은 매우 의미있는 유적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나 그 건축물의 용도는 과연 인류를 위한것인가....  

피지배계층의 관점이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다소 잔인한 측면이 있으나 고대 로마 시민들에게 원형 경기장은 경기를 보며 일체감을 느끼고 그 내용을 즐기는 하나의 공공 오락시설이었고 한다.
 

물론 쾌락 추구는 인간의 본성적 욕망이지만, 짐승과 인간을 한곳에 몰아넣고 누가누가 이기나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광경을 수천수만명이 함께 지켜보며 흥분하고 즐거워했다는 사실을 상기할수록 한 여자는 몸서리가 쳐지곤 했다..더구나 그 시설물을 수천년전의 잔혹사를 간직한 장소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는 것역시 그리 인간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는..

 

  

 

 

 

 

 

 

 

 

 

 

 

 

 

  


지하에는 십자가상이 잇는데 아마도 그 까마득히 오래전 인간의 탐욕스러운 쾌락 앞에 무참히 스러진 생명들에 대한 위로의 의미인 듯. 

  


 

 

 

 

 

 

 

 

 

 

 

 

 

 

 콜로세오 조감도.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이렇게 조감도를 그려두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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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언검투사 2011-08-24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만감이 교차한다'는 말처럼 적당한 표현을 찾기 힘든 곳이었지...
난 체질적으로 여행을 그리 즐기는 타입은 아니지만,
암만 생각해도 여행을 다니는 건 참 좋은 일인 것 같아.
그 순간 삶의 시공폭을 넓힌다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저런 곳을 다녀보고 나면 이후 내 코앞의 <생활>에 얼마나 큰 용기와 힘이 보태지는지....
무엇보다 당신과 함께했다는 사실이 내겐 가장 소중한 의미가 되는 건 물론이고...

그나저나 콜로세오 앞에서 만난 잡상인과의 이틀에 걸친 <혈투>도 다룰 거징?

 

 

20100902 로마 도착. 

8월16일새벽에 한국을 떠났으니 길위에 머문지 17일째,  

두 사람은 2일 아침 피렌체를 떠나 로마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후 1시30분     

 

   

 

 

 ROMA TERMINI-로마 역. 

기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이번에도 역시 미리 예약해둔 숙소의 이름과 지도만 가지고 길을 나섰다. 커다란 트렁크와 작은 배낭하나씩 메고. 

한참을 헤맨 끝에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3-4층 정도 되지만 좁고 길죽한 건물,  

우리식으로 하면 민박정도 되는 숙소.  벨을 누르면 주인이 누군지 확인하고 열어준다.   

  

 

 

 

  

 

 

 

 

 

 

 

 

 

 

 

 

 

   

 

 

 

올라가는 나선형 대리석 계단.  

2층이 데스크이고 3층에 두 사람의 방이 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처음에 두 사람은 당황했다. 커다란 트렁크를 옮겨야 하니까! 

그런데 마중나온 주인이 그 커다란 트렁크를 번쩍 들어서 데스크 앞까지 옮겨 주었다는... 

영화에서나 보던 지극히 이탈리아인답게 생긴 주인남자의 친절이었다.

  

 

 

 

 

 

 

 

 

 

 

 

 

 

 

 

 

   

 

 

 

바로 이 아저씨.  

그런데 그날 이후로 이 사람은 어디론가 휴가를 갔는지 보이지 않고 종업원인 듯 보이는 사람이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아니면 이 사람도 종업원이었을지도 모르겠따...-.-;; 

체크인하는 중... 

  

 

 

 

 

 

 

 

 

 

 

 

 

 

 

 

  

 

  

 

  요것이 세면대.

 왼쪽으로는 샤워부스, 오른쪽에는 변기가...

  

 

 

 

 

 

 

 

 

 

 

 

 

 

 

  

 

 

  

  

 

샤워실-겉보기에 멀쩡하고 이상없어 보이는.

 

전체적으로생각보다 깔끔하고 산뜻한 느낌의 방이 마음이 들었다.  

침대는 두개였고 위에보듯 화장실겸 욕실도 괜찮았다.  

그런데...세면대 왼쪽에 있는 샤워실은 문도 커튼도 따로 달려있지 않아서....샤워를 하는 순간부터 매우 곤혹스러웠다. 샤워하는 동안 물이 밖으로 그대로 다 튀어나오니까....도무지 그렇게 황당한 샤워실은 처음 겪었다는....  

그래서 두사람은 샤워 후 주변으로 쏟아져내린 물을 닦느라 죽을 고생을했다는...거의 6일 정도 그곳에 머물렀는데 그 방에만 샤워커튼이 없는건지 모든 숙소가 다 그 런건지 알수도 없었고 만약 모두 그런 식이라면 어떻게 샤워를 하는지 그나라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황당했던, 추억을 갖게되었다.   

일단 숙소에 짐을 던져놓은 두 사람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곳은 중국인 이민자들의 상점들이 즐비한 동네였다.  

  

 

 

 

 

 

 

 

 

 

 

 

 

 

  

 

 

 신발이나 옷가지들을 소매하는 건 아니고, 우리나라 남대문에 많은 중국 보따리 장사꾼들을 상대로하는 점포들처럼...그런 상점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아랍계 이민자들도 사는 동네같았다. 한 마디로 변두리. 하지만 큰 길에는 전차가 다녀서 그걸 타면 로마역까지도 몇분 안에 갈 수 있다.

 두 사람은 숙소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깜짝 놀랄만한 장소를 발견했다.  

숙소 바로 옆쪽에 오랜 역사를 지닌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었던 것!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남녀노소 구분없이 이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있다는 사실! 

날씨가 진짜 덥다 보니 로마시내를 돌아다니다보면 한집 건너 하나일 정도로 아이스크림 가게가 많았다.  

이 가게는 역사가 130년이나 된다고 하니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가게다. 

두 사람도 이곳에서 아이스크림을 맛나게 핥았다. 

  

 

 

 

  

 

 

 

 

 

 

 

 

 

  

 

   

 

 

 

 

 

 

 

 

 

 

 

 

 

 

 

 

  

 

 13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아이스크림 가게 대문.   

 

 

 

 

 

 

 

 

 

 

 

 

 

 

 

 

 

 

 

  

 

 이건 또 뭘까요? 서울이란 글자만 보면 괜히 반가워서리... 

 내용은 잘 모르겠고.... 

 그렇게 대충 로마에 도착한 첫날 오후, 숙소 주변을 둘러본 두 사람은 근처의 수퍼마켓에서 넉넉한 먹거리를 사다가 냉장고에 넣어 두고 맛난 저녁을 해치웠다.  

 

  

  

 

 

 

 

 

 

 

 

 

 

 

 

    

 

 

로마에서의 두번째 날. 아침, 본격적으로 로마 탐구를 위해 길을 나서기 전 두 사람은 약속된 아침식사를 제공받았다.   
   

이것이 조식 메뉴.  아침 8시30분경...

뜨거운 커피와 얼음처럼 차가운 오렌지 쥬스, 빵 몇 조각과 잼과 버터..그런데 이 숙소는 조식을 먹으로 식당으로 내려가는게 아니고 종업원이 이렇게 직접 트레일러에 챙겨서 방으로 가져다 준다는 사실... 

건물이 워낙 작아서 따로 식당을 마련할 여건이 안 되어 방마다 이렇게 배달해주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편하게 아침식사를 할 수 있었다는!   

에어컨이 틀거나 안 틀거나 상관없을 만큼 엉터리인 점과, 샤워커튼이 없다는 점만 빼면 이숙소도 그리 나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식사후 두사람은 본격적으로 거리로 나서기 전 지도와 로마패스를 챙겼다.   

 

 

 

 

 

 

 

 

 

 

 

 

 

 

   

 

 로마패스는 로마 관광에 있어 매우 필수적이고 요긴한 교통수단이다.

  

 

 

 

 

 

 

 

 

 

 

 

 

  

 

  

준비를 마친 두사람은 콜로세움을 향해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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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중 한 사람 2011-08-20 0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ㅋㅋㅋ 저 호텔... 이너넷 상 사진만 믿었다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암튼 아침에 룸서비스하며, 전체적으로 깔끔한 분위기하며, 수줍어하면서 영어를 더듬대는 착한 (알바?)종업원하며
비교적 재미난 집이었어....
저 아이스크림 가게의 둥근 등과 광장 같은 크기가 정말 이색적이었지.
요즘 주병진이 새로 오픈한 아이스크림 가게에도 저런 등을 밴치마킹한 것 같더만..
아... 로마... 가슴벅차라... 예상 일정을 사나흘 늘려 주저앉았을 정도였다면 뭐 말 다했지...


 

 

두 사람은 오후 1시경  드디어 피렌체에서의 둘째 날, 주요 목적지인 우피치 미술관에 도착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유적의 도시에 모인 관광객들이 한번씩 꼭 둘러보아야 할 곳이기도 한 우피치에 입장하려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다. 날도 더운데... 

그때부터 두 사람은 장장 1시간 반 동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미술관의 규모가 크니까 그냥 줄줄이 입장시켜도 될 것 같은데 약 30분 간격으로 20-30명씩 끊어서 입장시키곤 했다.  

그날 그 긴 줄에 늘어선 사람들 중에 두 사람과 같은 동양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한 여자는 매우 지쳐버렸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화장실을 찾지 못해 그 고통 역시 참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어딘가 골목으로 100여 미터를 가면 화장실이 있다는 표지를 보긴 했지만 미술관 입장을 위한 줄을 서는 일이 더 급하기도 했고, 미술관에 얼른 들어가면 그곳에서 해결해도 될 것이라는 만만한 생각을 했떤 탓이다. 하지만, 우피치는 그리 쉽게 두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1시간 반이 지난 2시반 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미술관에 입장했다.   

 

  

 

 

겉보기에도 무지 큰 건물이지만 내부는 더욱 넓고 커서 하루 온종일을 투자해도 꼼꼼히 진지하게는 둘러볼 수 없는 공간이었다. 내부는 물론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미술책이나 백과사전 등에서만 보아오던 명화들을 실제로 두눈으로 확인한다는 사실은 분명 야릇하고 가슴셀레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 )은 르네상스회화의 컬렉션으로는 질이나 양적으로 세계 제일의 미술관이다. 건물은 초대 토스카나대공이 된 메디치가의 코시모 1세(1519~74)의 정청이며 우피치궁()이라고도 한다.  

미술관의 역사는 이 건축이 완성된 1584년에 시작되나, 미술품 수집의 역사는 더 오래 되어, 15세기 전반부터 피렌체에 군림한 메디치가의 코시모 일 베키오(1389∼1465)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디치가의 최후의 6대 토스카나대공 잔 카스토네(1671∼1737)까지 거의 200년간에 막대한 미술품 제작을 예술가들에게 의뢰하고 또 작품이 수집되었다.  

코시모 1세의 시대부터,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메디치가와 그 집에 연고가 있는 미술품을 여 기에 모으기 시작하여, 1737년 메디치가의 최후의 사람으로서 우피치궁의 미술품을 계승하고 있던 안나 마리아 루드비카가 토스카나 대공국에 기증하였고, 그녀의 뜻에 따라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그 후 이탈리아 통일에 의하여 국립미술관이 되어 1800년에 조각류가 국립바르젤로미술관과 국립고고미술관에 분할되었다. 현재 3층에 회화, 2층에 소묘와 판화, 1층에 고문서류를 수장하고 있다. 회화에는 14∼16세기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가뿐만 아니라, 17∼18세기의 바로크와 로코코의 화가, 독일과 플랑드르의 북방 르네상스 화가들의 중요한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조토의 《성모자》, 마르티니의 《수태고지》, 보티첼리의《비너스의 탄생》, 다 빈치의 《수태고지》, 미켈란젤로의 《성가족》, 라파엘로의 《검은 방울새의 마돈나》, 티치아노의 《울비노의 비너스》, 카라바조의 《바커스》, 뒤러의 《삼박사의 예찬》, 휘스의 《목자들의 예배》 등이 유명하다.  
 

 미술관 마감시간인 오후 6시까지 꽉꽉 채워 자신의 심장에 감동을 채워넣은 한 남자와, 그를 출구에서 일찌감치 기다리다 지쳐버린 한여자는 우피치에서 나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아르노 강변으로 향했다.  

 아르노 강은 길이 240km. 유역면적 8,247km2. 아펜니노산맥에서 발원하여 산간지대를    

남 ·서 ·북서로 곡류하여 평지로 나와 피렌체, 피사를 거쳐 리구리아해로 흘러 들어간다.  

유역은 풍요한 농업지역으로, 밀 ·포도 ·올리브 등의 생산이 많다. 이탈리아 굴지의 양모공업지로서, 중세 이래 토스카나주 여러 도시 번영의 기초를 이루었다. 

1966년 사상 최대의 범람으로 피렌체의 중심지는 물바다가 되었으며 문화재도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아르노 강 


두 사람은 우피치에서 얻은 묵직한 덩어리를 하나씩 가슴에 안고 베키오 다리로 향했다. 한 남자는 우피치 미술관을 통과하며 훌륭한 예술품들에서 오는 묵직한 감동을, 한 여자는 그런 그를 기다리다 지쳐 묵직한 울화 한 덩이를 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오른  베키오 다리( Ponte Veccio)는  아르노 강 위의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345년에 건설되었으며 로마시대의 마지막 다리로 알려져 있다. 1944년 연합군의 추격을 받던 독일군이 강 양쪽 기슭의 집을 모두 파괴했으나 베키오 다리만 남겨두었다고 한다.  

원래 이 다리에는 푸줏간, 대장간, 가죽 처리장 등이 있었는데 1593년에 페르디난도 1세가 시끄럽고 악취가 난다며 모두 추방하였고 대신 금세공업자들이 다리 위의 상점에 세들었다.  

이후로 지금까지 베키오 다리의 금세공 상점들은 다양한 보석을 판매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판매하는 수공예 제품들은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베키오 다리 위의 골동품상점과 보석상점들.... 

  

 

 


 


 

 

 

 

 

 

 

 

 

  

 

베키오 다리 위에서 바라본 아르노 강 기슭의 카페.  지붕에 초록색 식물이 덮여있어서 시원해보이는-  

바로 앞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앉아 휴식을 취할 수있다.

 

이 날의 에피소드 

이날 미술관 관람을 위해 기다리는 시간부터 이미 지쳐버렸던 두 사람은 우피치 미술관을 나와 베키오다리로 향할때는 거의 분위가 아주 안좋은 상태였다.  

한 남자는 예술작품 감상에 대한 무리한 욕심때문에 심신이 매우 지치고 예민해진 상태였으며 한 여자 역시, 예술품에 심취하여 밖에 먼저 나가 자신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것에는 아랑곳없이 제 흥에 겨운듯이 보이는 한 남자에 대한 서운함으로 지쳐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겨우 겨우 베키오 다리까지는 함께 갔으나 그곳 다리 난간에 기대어 바람을 쐬고 사진 몇장을 찍는 동안 그만 헤어지고 말았다! 

한 여자는 추측하기로 한 남자가 스스로 너무 지친 나머지 한 여자를 챙길 여력이 없어 저 혼자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생각했다. 잠시 한눈 팔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아도 한 남자가 보이지 않게 되자 한 여자는 순간적으로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떻게 숙소로 돌아갈 것인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어떻게 돌아갈까...하지만 숙소에서 그곳까지도 걸어서 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는 곧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거리 상점의 주인들에게 피렌체역이 어느쪽인지 묻기 시작했다. 그들의 숙소는 피렌체 역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듬더듬 기억을 되살려 한여자는 무사히 조르지오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날 한 여자는 '궁하면 통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또한 어느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진다해도 어떻게든 죽지 않고 집으로 살아돌아 갈 자신감도 얻었다!^^  

한발 더 나아가, 까짓  혼자서도 얼마든지 낯선 어디로든 여행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  

그러나 그날 저녁, 숙소에서 두 사람은 한번 더 침을 튀겨가며 말다툼을 벌였다. 두사람 모두 지쳐있었기때문이었다... 한 남자는 몹시 화가 나서 비행기표를 바꾸어 당장 돌아가려는 제스처까지 취하기까지 했던 것이었다.  

한 여자 역시 속으로는 정말로 당장이라도 짐을 꾸려 그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는 사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짐을 꾸려 로마를 향해 다시 출발하고 말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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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피치사나이 2011-08-20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피치에서 오랜 시간 머문 건 둘러볼 것들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내 경우엔 한 작품 앞에서 이삼십분 이상 서있기 일쑤여서였어효...
예컨대 보티첼리 앞에서는 이삼십분이 아니라 이삼일 우두커니 서있어도
행복할 것 같았으니까... 대신 후들거리는 다리와 불규칙한 심장박동 땜에 나 역시 죽을 뻔했잖쑤...
우피치를 나와서 일이 그렇게 꼬인 건 당신 때문이라기보단 내 몸 자체가 완전히 실신 직전까지 간 상황이라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라우... 저 다리 위에서 내 소중한 님 잃어버린 나 역시 황당한 맴으로 돌아오면서
몇 번을 길가에 주저앉아 쉬어야했는지 모른당께.... "이역만리 이렇게 객사할 수도 있구나" 하믄서...
좌간 베키오 다리와 숙소에서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효..
수세기를 뛰어넘는 체험을 하면서 정작 눈앞의 reality는 돌아보지 못한 격이니 얼마나 어리석었던 건지...
반성합니다...

아... 그래도 내 맘은 아직도 여전히 '박하사탕' 오프닝 씬인 걸 어떡하나효...


 

피렌체 도착한 다음날 아침, 두사람은 일찌감치 조르지오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섰다. 

이날의 목적지는 우피치 미술관, 

우피치 미술관까지 걸어서 가는길에 두 사람은 산 로렌초 예배당(메디치 가문의 예배당)을 만났다.

메디치(Medici)가문은 이탈리아의 중부지방 피렌체공화국의 평범한 중산층 가문이었으나 은행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면서 유명해졌다. 메디치 가문이 역사에 드러난 때는 1400년부터이며 이때부터 1748년까지 약 350년간 지속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역사를 보면 피렌체공화국에서 공직을 맡아 수행했던 인물들이 배출되기는 하였으나 전통적으로는 상업을 통해 재력을 가진 평민가문이었다. 1378년 가문의 한사람인 살베스토로는 시의회에서 평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강경한 연설을 하여 치옴피(Ciom pi:방직 노동자 길드)의 반란이 일어나도록 했다.  

메디치 가문에는 대중의 입장을 지지하는 전통이 이어졌으며 1400년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었던 조반니 디 비치(Giovanni di Bicci, 1360∼1429)는 피렌체의 귀족들과 대립하여 평민들의 입장을 옹호하며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때부터 조반니를 중심으로 메디치 가문은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메디치가는 유럽 전역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하였고 교황청과 거래로 막대한 부를 쌓아갔다. 이를 기반으로 정계에도 진출하여 피렌체 공화국의 수반인 곤팔로니에레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귀족에게 유리한 세금제도를 철폐하고 평민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혁신하였고 상당한 돈을 공화국에 기부하여 귀족과 평민 양쪽의 지지를 받았다.  

문예부흥사업에도 자금을 쏟아부었다. 당시 세례당의 청동문을 제작을 두고 일어난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의 경합이 이때 일어난 일이며 피렌체에서 문예부흥운동인 르네상스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메디치 예배당은 누구나 둘러볼 수는 있으나 내부촬영은 금지되어 있었다. 

가문 사람들의 소지품(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누군가의 손가락 마디에서부터 화려한 장신구 등... 수많은 볼거리로 가득했따. 

  

 

 

 

 

 

 

 

 

 

 

 

 

 

 

  

 

 

 

 

 

 

 

 

 

 

 

 

  

  

 

 

메디치 예배당을 나와 우피치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시장골목. 

수많은 가죽제품들이 즐비하다. 많은 관광객들이 들르는 곳인듯.

작은 장신구, 가방 벨트 등등... 

이곳에서 한 남자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멋진 안경집을 구입했다.  

목에 걸 수 있는 줄이 달려있어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여행이 끝난지 1년여가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그의 목에 여전히 걸려있다는... 

     

그 다음 경유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Santa Maria del Fiore 대성당   

 

  

 

 아르노 강의 북쪽, 피렌체 시의 중앙부에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지도적 구실을 한 피렌체에 어울리는 대성당의 실현을 대망하던 시의 결의에 따라 1296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로 착공되었다.  

공사 도중에 그가 죽자 조토에 이어 A.피사노가 공사를 인계받아, 그 동안 조토가 새로 계획하였던 정면 오른쪽의 대종탑을 거의 완성하였다.  

또한 그 뒤를 이어받은 프란체스코탈렌티는 1357년 이래 건물 규모의 확장을 추진하여 1421년경에는 폭 42 m의 삼랑식 회당부와 지름이 이와 맞먹는 광대한 8각 평면의 내진, 그리고 여기서 세 방향으로 내물린 제실을 완성하였다. 

  

 

 

 

 

 

 

 

 

 

 

 

  

 

 

 성당 내부

  

  

 

 

 

 

 

 

 

 

 

 

 

 

 

  

  

 

 

 

 

 

 

 

 

 

 

 

 

 

 

 

 

  

  

 

 

 

 

 

 

 

 

 

 

 

 

 

 

 

  

 

  

 

 

 

 

 

 

 

 

 

 

 

 

  

 

 

  

 

 

 

 

 

 

 

 

 

 

 

 

 

 

 

  

  

 

 

 

 

 

 

 

  

 

 

 

 

  

 

 

 

성당 앞 광장, 거리의 화가-즉석에서 그림을 그려주거나 자기가 그린 그림을 판매한다... 

   

  

 

 

 

 

 

 

 

 

 

 

 

 

 

 

 

  

 

  

 

 

 가던 길에 두 사람은 Casa di Dante(단테의 집) 발견!  

'신곡'의 저자 단테가 살던 집을 박물관으로 활용하는 듯.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그냥 바깥만 구경하고 지나쳤다는...

  

 

  

 

 

 

 

 

 

 

 

 

 

 

 

 

 

 

 

 

  

 

 

 

 

 

 

 

 

 

 

 

 

 

 

  

 

   

 

 

 알리기에리 단테는 13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예언자, 신앙인이며 

피렌체 출생으로, 박해를 가한 조국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인류에게 영원불멸의 거작 《신곡 Divina Commedia》(1308∼1321)을 남겼고,  

이것으로 중세의 정신을 종합하여 문예부흥의 선구자가 되어 인류문화가 지향할 목표를 제시하였다  


 

  

 

 

 

 

 

 

 

 

 

 

 

 

 

 

 

 

   

 

 

 

 

 

 

 

 

 

 

 

  

 

 

 

이번 여행에서 둘러본 몇몇 이탈리아 도시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피렌체 역시 광장과 유적의 도시다.  

가는 곳마다 무슨무슨 광장이 펼쳐지고 도시 전체는 늘 영화속에서 보아오던 유적들로 즐비하다.  

아무 골목이나 돌아다녀도 보이는 것마다 모두 오랜 시간의 역사를 품고 있다.  

우피치 가는 길에 두사람은 또다시 유적들로 가득한 광장에 들어섰다.  

  

 

 

 

 

 

 

 

 

 

 

 

 

 

 

  

 

 

 

 

 

 

 

 

 

 

 

 

 

 

 

   

 

 

  

 

 시뇨리아 광장 [Piazza della Signoria]

  

 

  

 

 

 

 

 

 

 

 

 

 

 

 

  

  

 



 

 

 

 

 

 

 

 

 

 

 

 

 

  

 

  

  

 

 시뇨리아 광장의 다비드 상. 

  

 

 

 

 

 

 

 

 

 

 

 

 

 

 

 

  

 

   

 

피렌체는 14~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미켈란젤로, 지오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유명 예술가들의 걸작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이곳 피렌체 역사지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는데 사방 1km 정도의 좁은 구역이지만 지역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 가득 차 있다. 곳곳에서 걸작품들을 보면 ‘꽃’의 도시(피렌체는 꽃이라는 의미이다)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다. 

피렌체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예술과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메디치 가문 덕분이었다. 금융업을 통해 축적한 부를 기반으로 피렌체에서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했던 메디치 가문은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메디치 가문의 후원 덕분에 라파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단테, 보티첼리 등 쟁쟁한 거장들이 피렌체에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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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안경집 남자 2011-08-11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난 베네치아보다 피렌체가 좋더라구...

그나저나 '박하사탕'의 첫 장면에서 설경구가 외친 그 한마디 절규를 나는 이 블로그 볼 때마다 내지르고 싶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