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오후 1시경  드디어 피렌체에서의 둘째 날, 주요 목적지인 우피치 미술관에 도착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유적의 도시에 모인 관광객들이 한번씩 꼭 둘러보아야 할 곳이기도 한 우피치에 입장하려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다. 날도 더운데... 

그때부터 두 사람은 장장 1시간 반 동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미술관의 규모가 크니까 그냥 줄줄이 입장시켜도 될 것 같은데 약 30분 간격으로 20-30명씩 끊어서 입장시키곤 했다.  

그날 그 긴 줄에 늘어선 사람들 중에 두 사람과 같은 동양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한 여자는 매우 지쳐버렸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화장실을 찾지 못해 그 고통 역시 참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어딘가 골목으로 100여 미터를 가면 화장실이 있다는 표지를 보긴 했지만 미술관 입장을 위한 줄을 서는 일이 더 급하기도 했고, 미술관에 얼른 들어가면 그곳에서 해결해도 될 것이라는 만만한 생각을 했떤 탓이다. 하지만, 우피치는 그리 쉽게 두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1시간 반이 지난 2시반 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미술관에 입장했다.   

 

  

 

 

겉보기에도 무지 큰 건물이지만 내부는 더욱 넓고 커서 하루 온종일을 투자해도 꼼꼼히 진지하게는 둘러볼 수 없는 공간이었다. 내부는 물론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미술책이나 백과사전 등에서만 보아오던 명화들을 실제로 두눈으로 확인한다는 사실은 분명 야릇하고 가슴셀레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 )은 르네상스회화의 컬렉션으로는 질이나 양적으로 세계 제일의 미술관이다. 건물은 초대 토스카나대공이 된 메디치가의 코시모 1세(1519~74)의 정청이며 우피치궁()이라고도 한다.  

미술관의 역사는 이 건축이 완성된 1584년에 시작되나, 미술품 수집의 역사는 더 오래 되어, 15세기 전반부터 피렌체에 군림한 메디치가의 코시모 일 베키오(1389∼1465)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디치가의 최후의 6대 토스카나대공 잔 카스토네(1671∼1737)까지 거의 200년간에 막대한 미술품 제작을 예술가들에게 의뢰하고 또 작품이 수집되었다.  

코시모 1세의 시대부터,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메디치가와 그 집에 연고가 있는 미술품을 여 기에 모으기 시작하여, 1737년 메디치가의 최후의 사람으로서 우피치궁의 미술품을 계승하고 있던 안나 마리아 루드비카가 토스카나 대공국에 기증하였고, 그녀의 뜻에 따라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그 후 이탈리아 통일에 의하여 국립미술관이 되어 1800년에 조각류가 국립바르젤로미술관과 국립고고미술관에 분할되었다. 현재 3층에 회화, 2층에 소묘와 판화, 1층에 고문서류를 수장하고 있다. 회화에는 14∼16세기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가뿐만 아니라, 17∼18세기의 바로크와 로코코의 화가, 독일과 플랑드르의 북방 르네상스 화가들의 중요한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조토의 《성모자》, 마르티니의 《수태고지》, 보티첼리의《비너스의 탄생》, 다 빈치의 《수태고지》, 미켈란젤로의 《성가족》, 라파엘로의 《검은 방울새의 마돈나》, 티치아노의 《울비노의 비너스》, 카라바조의 《바커스》, 뒤러의 《삼박사의 예찬》, 휘스의 《목자들의 예배》 등이 유명하다.  
 

 미술관 마감시간인 오후 6시까지 꽉꽉 채워 자신의 심장에 감동을 채워넣은 한 남자와, 그를 출구에서 일찌감치 기다리다 지쳐버린 한여자는 우피치에서 나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아르노 강변으로 향했다.  

 아르노 강은 길이 240km. 유역면적 8,247km2. 아펜니노산맥에서 발원하여 산간지대를    

남 ·서 ·북서로 곡류하여 평지로 나와 피렌체, 피사를 거쳐 리구리아해로 흘러 들어간다.  

유역은 풍요한 농업지역으로, 밀 ·포도 ·올리브 등의 생산이 많다. 이탈리아 굴지의 양모공업지로서, 중세 이래 토스카나주 여러 도시 번영의 기초를 이루었다. 

1966년 사상 최대의 범람으로 피렌체의 중심지는 물바다가 되었으며 문화재도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아르노 강 


두 사람은 우피치에서 얻은 묵직한 덩어리를 하나씩 가슴에 안고 베키오 다리로 향했다. 한 남자는 우피치 미술관을 통과하며 훌륭한 예술품들에서 오는 묵직한 감동을, 한 여자는 그런 그를 기다리다 지쳐 묵직한 울화 한 덩이를 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오른  베키오 다리( Ponte Veccio)는  아르노 강 위의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345년에 건설되었으며 로마시대의 마지막 다리로 알려져 있다. 1944년 연합군의 추격을 받던 독일군이 강 양쪽 기슭의 집을 모두 파괴했으나 베키오 다리만 남겨두었다고 한다.  

원래 이 다리에는 푸줏간, 대장간, 가죽 처리장 등이 있었는데 1593년에 페르디난도 1세가 시끄럽고 악취가 난다며 모두 추방하였고 대신 금세공업자들이 다리 위의 상점에 세들었다.  

이후로 지금까지 베키오 다리의 금세공 상점들은 다양한 보석을 판매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판매하는 수공예 제품들은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베키오 다리 위의 골동품상점과 보석상점들.... 

  

 

 


 


 

 

 

 

 

 

 

 

 

  

 

베키오 다리 위에서 바라본 아르노 강 기슭의 카페.  지붕에 초록색 식물이 덮여있어서 시원해보이는-  

바로 앞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앉아 휴식을 취할 수있다.

 

이 날의 에피소드 

이날 미술관 관람을 위해 기다리는 시간부터 이미 지쳐버렸던 두 사람은 우피치 미술관을 나와 베키오다리로 향할때는 거의 분위가 아주 안좋은 상태였다.  

한 남자는 예술작품 감상에 대한 무리한 욕심때문에 심신이 매우 지치고 예민해진 상태였으며 한 여자 역시, 예술품에 심취하여 밖에 먼저 나가 자신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것에는 아랑곳없이 제 흥에 겨운듯이 보이는 한 남자에 대한 서운함으로 지쳐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겨우 겨우 베키오 다리까지는 함께 갔으나 그곳 다리 난간에 기대어 바람을 쐬고 사진 몇장을 찍는 동안 그만 헤어지고 말았다! 

한 여자는 추측하기로 한 남자가 스스로 너무 지친 나머지 한 여자를 챙길 여력이 없어 저 혼자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생각했다. 잠시 한눈 팔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아도 한 남자가 보이지 않게 되자 한 여자는 순간적으로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떻게 숙소로 돌아갈 것인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어떻게 돌아갈까...하지만 숙소에서 그곳까지도 걸어서 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는 곧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거리 상점의 주인들에게 피렌체역이 어느쪽인지 묻기 시작했다. 그들의 숙소는 피렌체 역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듬더듬 기억을 되살려 한여자는 무사히 조르지오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날 한 여자는 '궁하면 통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또한 어느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진다해도 어떻게든 죽지 않고 집으로 살아돌아 갈 자신감도 얻었다!^^  

한발 더 나아가, 까짓  혼자서도 얼마든지 낯선 어디로든 여행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  

그러나 그날 저녁, 숙소에서 두 사람은 한번 더 침을 튀겨가며 말다툼을 벌였다. 두사람 모두 지쳐있었기때문이었다... 한 남자는 몹시 화가 나서 비행기표를 바꾸어 당장 돌아가려는 제스처까지 취하기까지 했던 것이었다.  

한 여자 역시 속으로는 정말로 당장이라도 짐을 꾸려 그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는 사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짐을 꾸려 로마를 향해 다시 출발하고 말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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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피치사나이 2011-08-20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피치에서 오랜 시간 머문 건 둘러볼 것들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내 경우엔 한 작품 앞에서 이삼십분 이상 서있기 일쑤여서였어효...
예컨대 보티첼리 앞에서는 이삼십분이 아니라 이삼일 우두커니 서있어도
행복할 것 같았으니까... 대신 후들거리는 다리와 불규칙한 심장박동 땜에 나 역시 죽을 뻔했잖쑤...
우피치를 나와서 일이 그렇게 꼬인 건 당신 때문이라기보단 내 몸 자체가 완전히 실신 직전까지 간 상황이라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라우... 저 다리 위에서 내 소중한 님 잃어버린 나 역시 황당한 맴으로 돌아오면서
몇 번을 길가에 주저앉아 쉬어야했는지 모른당께.... "이역만리 이렇게 객사할 수도 있구나" 하믄서...
좌간 베키오 다리와 숙소에서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효..
수세기를 뛰어넘는 체험을 하면서 정작 눈앞의 reality는 돌아보지 못한 격이니 얼마나 어리석었던 건지...
반성합니다...

아... 그래도 내 맘은 아직도 여전히 '박하사탕' 오프닝 씬인 걸 어떡하나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