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처음 갔던 건 15년 전쯤. 그땐 제주시와 서귀포시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바보였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온식구가 서귀포 일대를 돌아다녔다. 숙소는 제주시에 있어서 돌아가려면 (당연히) 한라산을 넘어야 했는데, 아아.. 서귀포의 날씨와 한라산 중산간의 날씨는 천국과 지옥의 간극만큼 컸다. 여기가 제주야 설악산이야 할 만큼 엄청난 눈과 비바람... 결국 우리는 산을 넘지 못하고 다시 서귀포로 내려가 바닷가를 빙빙 돌아 제주시로 귀환했다. 이것이 제주에 대한 나의 첫번째 기억. 

엉뚱하게도 제주 하면 하얀 눈밖에 기억나는 것이 없던 내게 제주를 새로이 보게 한 것은 한권의 그림책이었다. 권윤덕 선생님의 <시리동동 거미동동>.  

이 책을 냈을 무렵, 마침 제주와 서귀포에 '기적의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제주에서 작은 도서관을 운영해오시던 허순영 선생님의 제안으로 이 책의 원화 전시회를 열기로 했는데, 권윤덕 선생님의 열정과 꼼꼼함이 더해져 그냥 그림만 갖다 거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제주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게 되었다. 신동일 선생님이 노래도 만들어주시고 애니메이션 회사 '오돌또기'와 함께 짧은 애니메이션도 제작했다. 권윤덕 선생님은 제주에서 활동하는 작가와 함께 서랍장을 만들어서 전면에는 그림을 붙이고, 서랍을 열면 그 그림과 관련된 사물들(제주의 돌, 해녀 사진, 물고기 사진 등등...)을 볼 수 있도록 했다. 까마귀, 아이, 토끼를 손가락 인형으로도 제작했다.  

담당 편집자였던 나는 이 일들을 진행하면서 제주에 여러 번 왔다갔다했다. 그림책으로 보았던 풍경들이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가 입체영화처럼 자꾸자꾸 내 앞에 펼쳐졌다. 제주에서 전시를 도와주시던 분들,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도서관 개관을 함께 기뻐해주던 제주의 동화작가들은 나에게 해녀들의 숨비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었고, 오름 꼭대기에서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용눈이 오름, 다랑쉬 오름, 따라비 오름... 오를 때마다 나는 울었다. 그냥, 모든 것이 다 너무 아름답고 슬퍼서... 그래서 제주에 놀러간다는 사람들에게 꼭!꼭! 오름에 올라가라고 얘기한다. 마치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일 거라고. 체력이 되면 다랑쉬 오름을, 안 된다면 용눈이 오름을 추천한다.

  

 

 

 

 

 

 

이 책들을 쓴 작가 오경임 선생님도 제주 분이다. 따라비 오름에서 라면을 끓여 주고 한라산 소주를 따라 준... <교양 아줌마>에 실려 있는 <숨비 소리>라는 단편은 참으로 걸작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언젠가는 더 스케일 크고 더 가슴 저미는 작품을 꼭 쓰실 거라고 믿고 있다. <주희>는 글과 그림 모두가 제주의 색이 잘 전해지는 작품이다.

 

 

 

 

 

 

 

이 책들에 그림을 그린 화가 이승민 씨도 제주 사람이다. 일하면서 맺은 인연을 이용(!)해 나는 참 뻔뻔하게도 제주에 내려가면 이 집 신세를 지곤 한다. (콘도 회원권이 있기는 한데, 거기서 머문 기억이 이제 희미하다.)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거문오름 바로 아래가 집인데, 노루가 내려와서 애써 키워놓은 밭작물이랑 어린 나뭇잎을 망쳐놓고 가곤 했다. 그런데 이젠...  

아니, 세계자연유산으로 정해졌으면 가만히 잘 놔둬야지 왜 거기다 자연유산센터라는 콘크리트 건물을 짓는 걸까?????? (물음표를 몇 개 해야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라나) 거대한 건물과 주차장이 이 집 바로 뒤에 들어설 예정이다. (그나마 마을 주민들이 열심히 싸워서 주차장 규모를 축소시켰다.) 지금은 포크레인이 공사를 시작했다. 이렇게. (사진은 승민 씨 부부의 홈페이지에서 가져왔다)  예민하기 짝이 없는 노루들은 어디로 숨어들었을까...  

 어, 그런데 원래 내가 쓰려던 글은 이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글 쓰다가 지금 제목도 바꾸었다.)  

제주에 관한 (여행)책이 나오면 거의 다 읽어본다. '제주올레'가 생긴 뒤로 엄청 많은 책들이 나왔다. 깜짝 놀랄 정도로 많았다. 그 가운데서 내가 추천하고픈 책들에 대해 쓸 참이었는데, 개인적인 얘기들만 하고 말았네.   

그럼 본격적인 책 얘기는 다음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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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0-08-27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편도 기다릴게요. 아침에 제주도 여행 다녀온 직장 동료의 사진을 봤는데 여기서 다시 제주를 만나요.^^

또치 2010-08-27 11:59   좋아요 0 | URL
어젯밤에 마저 다 써버리려고 했는데, 기운이 딸려서 못하겠더라구요 ;;
괜히 기대감만 부풀리는 거 아닌가 몰라요 ㅜㅜ

딴 얘긴데,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가시나요? 전 티켓 일찌감치 샀답니다 호호호 ^^

마노아 2010-08-27 12:49   좋아요 0 | URL
가려고 하는데 아직 티켓은 못 구했어요. 언니가 조카 데리고 가라고 해서 고민이 되고 있어요. 조카는 이제 9살...ㅎㅎㅎ

치니 2010-08-27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음 편 기대! 제주에서 살아볼까 고민 중인데, 또치님의 고견을 듣고 싶어집니다.

2010-08-27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7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궁화 2010-12-30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주의 책을 찾다 우연히 만난 곳, 시간이 지난 후에도 다음 글을 찾지 못하는 것은 이 시대와 친하지 못함이겠지요. 마음에 드는 글 잘 읽었습니다.

또치 2010-12-30 14:3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
다음 글은 http://blog.aladin.co.kr/dotch/4148076 <-- 여기에 썼어요.
최근에 또 한권 괜찮은 책을 발견해서 올해가 가기전에 리뷰를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