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이라는 말이 점점 더 좋아진다. 자기소개할 때 "저, 살림하는 여자예요."라고 꼭 한번 말해보고 싶은데, 내 머릿속에선 이게 맞는 말인데 사회적으로는 내 뜻과 다르게 통용되니 아주 친한 무리들 사이에서만 장난스럽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15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살림'에의 로망이 있는 나는 가끔 <리빙센스> <까사 리빙> <행복이 가득한 집> 같은 잡지들을 사거나 들춰보거나 하는데, 몇해 전 잡지에서 보고 알게 된 효재의 일상은 ... 정말 부럽기가 그지없었다.  왜냐면, 내가 꿈꾸는 '살림살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쁘지 않은 것은 어렸을 때부터 못 참았다는 사람, 괴짜 피아니스트 임동창에게 시집 가면서 그릇 100 박스, 만화책 100 박스짜리 이삿짐을 꾸렸다는 사람, 집에 오는 수많은 손님 홀대하는 법 없고, 빈손으로 보내지 않고 뭐든 보자기에 싸서 돌려 보내는 사람, 고운 한복을 짓는 것으로 밥벌이를 삼고, 그가 손으로 수를 놓아 만든 행주니 변기커버니 등등이 한국 상류층에게 환호 받으며 팔려나간다고 하고, 그러나 돈 욕심은 하나도 없어 보이는 도인 같은 여자.  

<효재처럼>이라는 책을 통해서 효재의 음식 레시피를 얻어 보고, 조금이라도 예쁘게 꾸미고 단정하게 정돈할 줄 아는 눈썰미를 배웠다. (그러나 실제 나의 살림살이는 '단정'과는 영 거리가 멀다만 ;;)  

효재의 살림은 (자기 딴에는) 돈 들이는 것과는 상관이 없지만, 이 책 뒤쪽에 나온 물건들 리스트를 보면 좀 기가 죽기는 한다. 효재야 지인들로부터 얻거나 선물받거나 만들어 쓰거나 하는 것들이겠지만, 이런 것들이 사실은 정말 명품 중의 명품인 거다. 손님 오면 내오는 각상만 해도 그렇고, 놋그릇이며, 도자기 그릇이며... 다 (준)인간문화재급 명인들이 만든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나는 이 책에서 손수 만들어 쓰는 기쁨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었고, 작은 정성 하나가 얼마나 타인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 배웠다. 꽃 하나 뚝 꺾어다가, 나뭇잎 하나 뚝 따다가 음식 데코레이션하는 건 나도 이제 엥간하면 하는 짓이기도 하다. 아, 그리고... 동거녀 네꼬씨에게 가끔 하는 말인데, 내 주제에 효재처럼 그릇 욕심 내다가는 패가망신할 테니 조심하자는 것. 정말 그릇 욕심을 참을 수 없을 때는 공방에 가서 배운 다음에 만들어 쓰려고 한다 -,.-

 효재의 보자기 포장만 가지고도 책이 따로 나오기도 했다. 나는 효재처럼 비단 보자기 포장은 못해줘도, 생협에서 파는 오트밀 색깔 행주로 반찬그릇을 싸서 선물을 하면 누구든 다 너무너무 기뻐하곤 했다. ㄹ백화점에서 고기나 굴비 선물세트를 싸주는 금색 보자기는 어머니한테 몇 개 얻어왔다가 케이크나 머핀을 선물할 때 한 겹 싸서 주면 참 좋았다.  

 이렇게, 어설프지만 나름 효재의 '정신'을 따라하면 나도 '살림하는 여자'의 반열에 드는 것 같았다. 

  

 이번에 나온 책이다. 중앙 M&B에서 나온 이전 책들과는 달리 '실용서'가 아니라 '에세이'여서, 사실 나한테는 좀 시시했다. 그렇다고 '효재처럼' 살고 싶은 초보자(?)들에게 효재식 생활의 가이드 역할을 충분히 해줄 만한가 하면 그것도 좀 아니다. 2006년에 나온 <효재처럼>이 읽을거리 면에서나 화보 면에서나 실생활 응용도에서나 훨씬 나은 것 같아 좀 아쉽다.  

하지만 2006년의 시골집이 아니라 서울 성북동에 자리를 마련한 효재의 터전은 또 새롭게 구경할 만하고,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남편 임동창씨와의 소통 방법도 살짝 엿볼 수 있다. 다만, 말로 설명하기 힘들긴 할 테지만 마치 남남 같으면서도 사실은 서로에게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두 사람의 의사소통 방식이 좀더 친절하게 서술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기는 한다.  

효재의 일상은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사는 모습을 찍어놓은 사진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실 쩌르르~하게 와닿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번 신간은 2006년에 나온 책보다 별로 낫다고 할 만한 게 없는 것 같다. 퇴근길에 휘리릭 보고서... 중고로 팔까 어쩔까 생각하는 중이다. 

이 생각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선물이랍시고 딸려온 수틀이다. 



발로 찍은 사진이지만, 딱히 이쁘게 연출해 찍을 일도 없기에 올린다. 아니, 어떻게 다른 책도 아니고 효재의 책인데 이딴 걸 딸려 보내나 그래?  

차라리 책을 산 사람 몇몇한테 단단하고 고운 대나무 수틀을 추첨해서 준다고 했으면 좋았을걸, 이 퍼런 싸구려 플라스틱 수틀을 어따 쓰라는 거임? 저자가 알면 아마 기절초풍할 것이다. 벽에 있는 콘센트 구멍까지도 보기 싫다고 수놓은 천으로 다 가리는 양반인데, 그런 사람 책에 이런 부록이 웬말이야? 

책 사고 딸려온 선물 때문에 화가 나보기는 또 처음이다. 나도 나름, 안 예쁜 건 못 참는 살림꾼이라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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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05-21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티비에 나온 걸 봤어요.
마침 전인화씨가 집에 놀러간 참이었는데, 입에 칭찬이 마르지 않더군요.
이창동과의 결혼생활은 행복해보이지 않았고, 어쩐지 저는 살림에 매달리는게 천성이라기보다 집착처럼 보였었는데, 이 글을 읽으니 제가 살림을 몰라서 괜히 꼬아 본 거구나 싶어요.
^-^;;
책 같은 건 책 자체가 선물인게 젤 좋죠, 딸려오는 게 필요 없을 정도루.

또치 2009-05-21 14:19   좋아요 0 | URL
임동창씨나 효재씨나, 괴팍한 예술가죠 뭐. 무지하게 예민하고 자아가 강한 두 사람 같어요.
사람들이 효재처럼, 효재처럼... 하지만 '선망'할 뿐이지 감히 뭐 따라할 수나 있겠나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