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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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예비소집에서 알파벳 쓰기 숙제를 받아오던 순간부터 나는, 영어를 잘 하고 싶었다. 영어가 참, 쓰기 편한 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처럼 초중종성이 따로 있지 않아 한 줄로 길게 쓰기도 편하고, 가끔은 줄 위로 치솟거나 줄 아래로 늘어뜨려지는 글자들이 있어 멋스러워 보였다. 대문자와 소문자로 나뉘어져 있는 것도 신기하고, 대문자와 소문자를 구별해서 써야하는 것도 신기했다. 발음은 또 어떤가. 혀가 요상하게 말려 들어가는 r 발음은 세련되어 보였고, 뭔가 약오르게 들리는 뻔데기 발음은 재미있었고, g와 z, p와 f 발음의 차이 같은 것들도 신선했다.

 

그날로부터 삼십 년이 지난 오늘도 나는 영어를 잘 하고 싶다. 삼십 년이면 배우고 익히기 충분했겠구만, 배우는 건 어설프고 익히는 건 귀찮아, 나는 아직도 영어를 잘 하고 싶기만 할 뿐 전혀 잘 하지는 못한다. 아, 잃어버린 삼십 년이여.

 

쭘파 라히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1994년 동생과 이탈리아 여행을 하던 중, 이런 마음을 느끼게 된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났는데 금방 어떤 인연, 애정이 느껴지는 사람. 아직 알아야 할 게 많은데도 오래전부터 알아온 것 같은 느낌. 이탈리아어를 배우지 않으면 날 채울 수 없고 내가 완성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내 안 빈 공간, 그곳에 이탈리아어를 편히 자리 잡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p.21

 

그래서 그녀는 치열하게 공부를 시작하고 드디어 2015년, <IN OTHER WORDS(IN ALTRE PAROLE)>라는 제목의 이탈리아어로 이 책을 내게 된다. 이미 영어권 작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녀에게 영어로 글을 쓴다는 건 “장비를 잘 갖추고 쉽게 산에 오르는 것처럼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치열하게 공부했다’라고 나는 간단하게 적고 있지만, 그 치열함은 이 책 곳곳에 풀어져 있고, 나를 부끄럽게 한다.

 

“나는 노력을 좋아한다. 다른 언어로 읽는다는 건 성장과 가능성의 끝없는 상태를 내포한다. 배우는 초심자로서의 내 일은 절대 끝나지 않으리라.”p.42

 

내 텅 빈 삼십 년과 그녀의 꽉 찬 이십 년의 차이는, 결국 열정과 노력이었다. 언제나 정답은 일찍 찾는데, 언제나 열쇠는 일찍 꽂는데, 정답이 적힌 답안지는 성적으로 매겨져 돌아오지 않고, 꽂힌 열쇠는 녹이 슬어 돌아가지가 않는다. 다시 자극을 받았으니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 기대해보지만, 사람이란 게 쉬이 달라지는 물건이 아니더라.

 

이 작고 아름다운 책의 백미는 그러나 따로 있으니 바로 제목의 저 한 문장이다. 이 문장은 작가가 사전에 대해 쓴 문장에서 따 온 것이다.

 

“이 사전으로 나는 다른 책들을 읽고, 새로운 언어의 문을 열 수 있다...

사전에는 비밀들이 가득하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p.18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이 책의 소개를 신문에서 처음 봤던 그 날부터 이 짧은 문장은, 책을 대하는 내 마음을 대변하는 아포리즘으로 자리잡았다. 이 문장이 너무나 멋있고 좋아서 내가 좋아하는 모든 책의 저자들에게 이렇게 얘기하며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당신이 쓰신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큽니다.

나를 한 뼘 더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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