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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3공 때 동장이셨다. 새마을 지도자셨고, 민주공화당 당원이셨다. 새마을 마크가 중앙에 달린 초록색 모자와, 썩어가는 돼지빛깔의 유니폼을 입고, 골목에 블럭을 깔고,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 모시고 춤추는 최전성기 때의 사진이 앨범 하나에 가득이다. 5공 때는 동네의 빌어먹을 자식들을 삼청교육대에 많이도 보냈노라고 자랑 삼아 얘기하신 적도 있다.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TV 앞에서 어린 손주랑 채녈 싸움이나 하며, 같이 늙어가는 마누라 괜한 흠잡아 닦달이나 하며 소일하고 계신다. 세월이 참 많이도 흐른 것이다.

그런 아빠 밑에서 자란 나의 어릴 적 가장 큰 걱정은 북한"괴뢰군"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왜 그리 북괴와 관련한 흉흉한 소문이 많았던지, 금강산 댐 사태에 이르렀을 때는 정말이지 당장에라도 전쟁이 날 것처럼 떠들어 댔었고, 아빠와 아빠의 큰 딸인 큰언니는 공식적인 규탄 대회에 참석하느라 바빴고, 나는 부랴부랴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전쟁이 날 경우 숨을 곳 찾기에 골몰했었다.

영화 실미도에 대해 알기 전까지, 그러니까 실미도 사건에 대해 제대로 알기 전까지 나는 김신조 사건이나 간첩단의 버스자폭사건 같은 것이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80년대 초반에 일어난 일인 줄로만 알았다. 십 몇 년 전의 일임에도 위쪽에서 방귀만 뀌었다 하면 당장에라도 똥을 뿌지직 싸 낼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대며 제2, 제3의 김신조 운운하던 어른들 덕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새삼 고맙다. 날 언제나 긴장과 불안 속에 살게 해 줘서.. 제길..

 “아무리 그래도 무장공비는 너무 심한 거 아냐?” 본격적으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은 강성진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 죽어갈 그 때부터였다. 뭐, 그 전에 설경구가 아버지의 월북으로 어머니는 평생 앉아서 잠을 잔다는 그 이야기를 할 때 찔끔 울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신파스러운 오버된 연기와 억지스러운 감정의 조장에 은근히 심사가 꼬이고 있던 중이었다. 그냥, 사건을 있는 그대로만 다큐멘터리 식으로 엮어 놓아도 충분히 감동적인 영화가 되어줄 소재를 참 이렇게도 80년대스럽게 만드나 싶어졌던 것이다.

영화가 중반으로 접어들 때부터 줄창 울어대던 동생도 맘에 안 들었다. 고만 좀 울라고 옆구리 쿡쿡 찌르다, 하긴 나도 영화가 끝날 무렵엔 엉엉 울고 말았다. 울면서도 이런 별로 마음에 들지도 않는 영화에 울고 있다니 싶어졌지만, 영화의 장면에 대한 눈물이 아니라 당시 그 실미도 대원들에 대한 눈물이다, 라고 생각하고 맘껏 울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들이 정말 슬펐고, 우리들의 무지가 정말이지 미안해졌다. 무슨 이런 개 같은 나라의 개 같은 국민이 다 있나, 아무리 그래도 정말 무장공비는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이 말씀이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왔는데, 옆자리 쫄로리 셋 앉은 여자들의 눈이 우리의 탱탱 붓고 벌건 눈에 비해 너무 말개서 무안했다. 아무리 영화가, 자기들끼리 너무 비장해서 우리가 비집고 들어가 몰입할 구석을 조금도 주지 않아도 그렇지 억울하게 죽어간 실존 인물들을 조의하는 마음에서라도 조금은 울어주는 게 예의가 아닌가...뭐...아님 말고...ㅡㅡ; 흠 아무튼, 나로 말하면 그렇게 개죽음한 그들을 무장공비라고 십수 년을 믿어 온 게 미안해서, 그리고 아무리 무장공비였대도 거 시원하게 잘 죽었네,라고 말했던 게 미안해서 울었다. 그러나 좀 울어보라고 준비해 둔 다음과 같은 장면, 그러니까 그들이 피로 자신의 이름을 버스 구석구석 써가는 장면이나, 허준호가 사탕을 떨어뜨리는 장면은 실제 그들이 그랬다고 해도 역시 신파조였다.  실미도와 강우석이라….아무래도 너무 안 어울리는 궁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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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경적 소리도 들리지 않고, 사람들의 고함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던져져 있지만, 다른 시공을 떠도는 기분. 이어폰을 꽂고 거리를 다닐 때면 나는 그런 짜릿한 경험을 한다. 그 순간이라면 뒤에서 차가 나를 들이받고 그냥 가 버려도 웃으며 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그냥 꿈이려니, 하면서.

끝이 없대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길, 그러나 출근길이 짧아서 두 곡이면 아쉽게도 가게 도착이다. 오늘 아침엔 eels 의 all in a day's work과 agony 두 곡을 들으면서 왔다. agony가 막 끝나고 all in a day's work을 시작할 때였다. 나는 사람과 차로 한창 붐비는 시장통에 접어 들었는데, 절망한 아이의 체념의 울음 같은 짧은 도입부의 기타 소리가 끝나고 잠든 세포를 모조리 깨워 일으킬 것 같은, 강하진 않지만 호소력 있는 드럼 소리와 함께, 금속성의 이펙트 입힌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 나오자 그만 정신이 아뜩해졌다.

순간 뒤에서 차 한 대가 다가오는 기운이 느껴졌는데, 이런 음악을 들으면서 종종거리며 그 차를 피한다는 게 좀 구차하게 느껴졌다. 그냥 걸어야지. 뒤를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고, 주변 사람들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대신에 귀에서 이어폰이 빠질까 더 꼭 끼워 넣고, 웃옷에 달린 모자를 그 위에 덮어 썼다. 더욱 깊은 eels의 세계. 그 때, 뒷허벅지에 받치는 강한 충격으로 내 몸은 앞으로 픽, 엎어졌고, 곧 그 엎어진 몸 위로 부드러우나 육중한 것이  내 뼈를 으스러뜨리고, 내 몸을 터뜨리면서 지나갔다.

아, 내가 죽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몸이 가벼워져 드럼 소리에 맞춰 행진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고,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소리가 비는 곡과 곡 사이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그 비명소리에 묻혀 음악이 사라지지나 않을까 걱정을 했으나, 음악은 다시 이어졌고, 나는 자꾸 몸이 가벼웠고, 자꾸 웃음이 났고,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렇게 좋은 기분으로 가게에 도착했고, 보니 나는 죽지도 않았고, 청소하고 커피 마시고, 이렇게 컴 앞에 앉아 이따위 잡글이나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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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연필 2003-12-25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재밌는 글이네요. 제가 아예 몽상가라서, 이런 글이 재밌단 말예요. 제 서재에 코멘트 달려있길래 놀러왔습니다. 이혜경의 소설 리뷰 참 잘 읽었습니다. 당장 읽고 싶어지는군요. 그런 내용인 줄 몰랐거든요. 메리 크리스마스하세요.

icaru 2004-04-24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정말......이따위 잡글이 아닌걸요^@^

soulkitchen 2004-04-24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일요일 낮, 죽음의 한 연구를 읽고 있다.

수도부는 벌써 몇 번째, 나와 유리 앞에서 그 숨을 거두고,

유리는 또 벌써 몇 번째, 그 모든 말을 수도부의 목구멍에 밀어 넣는다.

또 답답하다. 답답한 중에 며칠 전 들렀던 다음의 박상륭 까페에서 얼핏 본

그 까페 주인되는 이의 '남자고 여자고 물건 못 쓰게 될 줄 알아라'는

화통한 글투가 생각이 욕이나 한바탕 읽어 볼까 하고 들렀다가, 

이 동영상을 봤다.

그리곤 제길, 손님이 들어올지도 모르는 가게의 카운터 앞에서, 울었다.

망자와 어우러진 산 자들의 목소리와 그 얼굴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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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04-24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좋네요~! 더 이상 무슨 말이...
 


김 군의 홈피를 홈쳐 보다 스타세일러의 노래와 최민식의 '가다'에 뻑가 부랴부랴 현주에게 문자를 넣어 표를 예매하라고 했다. 마침 사장님네 제사가 있는 날이어서 운좋게도 9시 45분 프로를 볼 수 있었다. 대체적으로 모든 상황이 좋았다. 게다가 이건 또 웬 떡이냐. 영화관의 우리 자리 옆으로는 (냄새와 숨소리만으로도 황홀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귀염둥이들이 쭈루룩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러고보니 우리 자리 뒤쪽으로도 주루룩 다 늙거나 젊은 남자들이다. 구미는 지역 특성상, 어딜 가나 여자들의 무리로 버글거린다. 술집에도, 감자탕집에도, 나이트에도, 물론 영화관에도.  근데, 여자보다 남자가 많은 것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박찬욱의 영화며 일본 만화가 원작인 영화며,  무엇보다 최민식이 나오는 영화인 것이다. 

그런 영화가 있다. 기를 쓰고 실망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하는. 영화의 관계자도 아니고, 특별히 좋아하는 배우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감독의 정신세계를 진작부터 흠모해 왔던 것도 아니고,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도 아닐 텐데 보기도 전에 이건 아무리 지랄같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말자, 싶어지는 영화. 이 영화가 그랬다. 불편하고, 불쾌하고, 황당하고, 머리 아팠지만,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선뜻 권해지지는 않지만, 남들이야 욕을 하거나 말거나 나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글쎄 지랄같더라도 실망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괜찮기까지 하더란 말이다.

나는 김지하의 담시들을 좋아한다. 오적과 소리내력은 임진택이 소리를 한 테잎으로도 갖고 있는데 들을수록 구수하고 찰지고 맛난다. 그렇더라도 오르가즘 면에서는 똥바다보다 약하다. 몇 십 년을 참은 똥을 푸득푸득푸드득 싸내지르는 장면을 읽을 때면 짜릿함이 온 몸을 휘감아 오줌이 마려울 정도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행한 배설, 혹은 복수(를 보는 것)에도 또한 그런 쾌감이 있다(맞다. 내가 변태라 그렇다) 미도와 오대수의 섹스가 결국 이우진이 그토록 오래 갈아댄 칼로 내지른 복수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뒤늦게 무릎을 치며 당시의 이우진을 떠올렸다. 미치게 통쾌해하며 파안대소했었어야 했는데 둘을 관계하게 하기 위해 최면까지 걸었던 그는 이렇게 물었었다. 미도가 정말 오대수를 사랑하는 걸까...오마이갓.. 

이우진의 복수는 결국 무엇이었을까. 서로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행하게 된 섹스? 그렇다면 그는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알면서도 서로 사랑했어. 너네도 그래봐, 라고. 이우진은 누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게 아니라 누나와의 사랑을 슬퍼했던 것이며 진작에 동반자살이라도 했어야 할 것을 저희들의 아픈 관계를 다른 누군가에게 전이시키기 위해 15년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대상으로는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오대수가 적당했고, 그 전이는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15년 동안이나 보류해 두었던 자신의 죽음을 그제서야 행한다. 누나의 손을 놓은 바로 그 손으로.

그러나 거기서 끝낼 것이지 뭘 또 한 번 복잡하게 꽈 보겠다고 최면술사는 찾아 갔으며, 뭘 또 최면의 힘을 빌어 자아를 분리씩이나 하고, 뭘 몬스터가 어쩌고 그랬단 말인가. 나원.. 통 알 수가 없으니. 

아무튼 영화는 좋았다. 민식이 형님의 연기와 다소 어색하면서도 능청스러워 우스워 죽겠었던 보이스오버는 말할 것도 없고, 유지태의 우아한 몸놀림도, 강혜정의 깜찍한 연기도 좋았다. 근데...거...여자아이들의 젖꼭지들은 왜 그렇게들 음...색이 짙던지...흠...다들 그런가..ㅡㅡ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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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kitchen 2003-11-23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그 최면술사가 그러니까...어떤 기억을 지웠던가 보지...어떤 기억일까...나는 오대수와 미도의 관계가 밝혀지는 그 부분이라고 생각해. 오대수가 감금으로 인한 자신의 야수적인 성격 모두를 버리진 않았을 거라고, 그 기억은 남겨 뒀을 거라고 생각해. 근데, 미도의 관계가 밝혀지는 부분이 지워졌다고 한다면, 마지막에 미도가 사랑한다고 했을 때 왜 그런 웃음을 지은 거지?

soulkitchen 2003-12-17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바보...기억은 지워지지 않은 거였잖아...나는 보지 못했는데 마지막에, 그 빈 의자를 보여줄 때, 그 나무에 최면술사의 시체가 걸려있는 게 보였다고 한다. 바보..대체 뭘 본 거야? 역시...그래서 웃은 거였어....다시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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