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忍耐)는 정신(情神)의 제일로 훌륭한 선물(膳物)...>

 


 

 

 

 인내(忍耐)는 정신(情神)의 제일로 훌륭한 선물(膳物)이다.

 하지만 마치 자전거(自轉車)를 처음 배울 때처럼, 그 습득(習得)에도 뇌(腦)의 훈련(訓練)이 필요하다.

 

 (Toleration is the greatest gift of the mind; it requires the same effort of the brain that it takes to balance oneself on a bicycle)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1880년 6월 27일부터 1968년 6월 1일)는 세상에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미국의 교육가(敎育家)였고, 사회복지활동가, 저작가(著作家)였으며, 자기도 중병을 앓고 있었으면서도 세계 각지를 역방(歷訪)하면서 신체장애자들의 교육과 복지에 힘썼던 여성(女性)이었다.

 그녀는 1880년 6월 27일, 미국의 앨라배마 주(州) 터스컴비아(Tuscumbia)에서 태어났으며, 가족사항에 대해서는 생략합니다. 그리고 1882년, 2세(생후 19개월)였을 때 고열(高熱 또는 성홍열, 뇌막염)에 시달렸지만, 의사와 가족들의 노력으로 겨우 치료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녀는 청력과 시력을 잃었고,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양친(兩親)으로부터의 교육도 받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그녀는 수화(手話)로 가족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1887년에 그녀의 양친(兩親)은 당시 청각장애아의 교육을 연구하고 있었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전화의 발명자)을 찾아가서 도움을 구했다. 그러자 벨은 당시 매사추세츠 주(州-Watertown)에 있었던 퍼킨스맹(盲)학교(Perkins School for the Blind)를 소개해주었고, 그러자 그녀의 양친(兩親)은 그 학교의 교장에게 편지를 써서 그녀를 도와줄 사람을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그해 3월 3일에 가정교사로 왔던 여성이 바로 당시 그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그녀 본인도 어려서부터 약시(弱視)였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는 수술을 해서 조금 호전되었다고 했던 20세의 앤 설리번(Anne Sullivan 또는 Annie Sullivan Macy, Johanna Mansfield Sullivan Macy-1866년 4월 14일부터 1936년 10월 20일. 통칭은 애니, 그러나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이었고, 그리하여 그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던 두 여인은 그때부터 서로 의지하면서 노력하기 시작했다.

 

 


<앤 설리번>


 그 후, 헬렌은 그녀로부터 여성의 기본교육이라든가, 지문자(指文字-시각적 의사소통수단의 하나로, 손과 손가락의 모양으로 글자를 나타내는 것 등, 또는 손바닥에 글을 써주고 익히는 방법 등), 단어의 습득 등을 교육받았다. 그러자 그때부터 헬렌은 포기하고 있었던 타인과의 대화(對話)가 가능해졌으며, 그 후로 설리번은 약 50년간 헬렌의 좋은 스승으로 또는 친구로 헬렌의 의지가 되었다.

 그 후, 몇 곳의 학교를 전전했던 헬렌은 1897년 설리번과 충돌했던 케임브리지(Cambridge) 여학원(女學院)을 퇴학하고 랜섬(Wrentham-매사추세츠 州)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또 한명의 가정교사와 함께 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래드클리프(Radcliffe)여자대학(현재의 하버드대학)에 입학했으며, 1902년에는 <나의 생애(生涯)>를 출판했다. 그리고 1904년에 동(同) 대학을 졸업했으며, 문학사(文學士)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1906년에는 매사추세츠 주(州)의 맹인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1909년에는 미국사회당에 입당했다. 그리고는 부인(婦人)참정권(參政權)운동과 산아제한운동, 공민권(公民權)운동 등, 많은 정치적이며 인도적(人道的)인 항의(抗議)운동에 참가했으며, 저작가(著作家)로서의 활동도 계속했다. 그리고 1916년에는 세계산업노동조합(IWW)에 관심을 가져서 그 활동에 참가했으며, 1917년에는 러시아혁명을 옹호했다.

 하지만 또 그때, 피로 누적으로 설리번의 눈병이 재발했고, 그러자 두 사람은 그때부터 폴리톰슨(Polly Thompson女史, 나중에 秘書)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1936년 10월 20일에 설리번은 사망했는데, 그런데 또 바로 그 직전에 이와하시타케오(岩橋武夫-1898년 3월 16일부터 1954년 10월 28일. 일본의 사회사업가) 등의 요청으로 일본에서의 초청이 들어와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설리번은 주저(躊躇)하던 헬렌에게 그 요청을 받아들일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앤 설리번과 함께, 헬렌 8세경>

 

 그리하여 설리번은 세상을 떠났으며, 헬렌은 1937년 4월 15일에 설리번의 유언을 따라서 톰슨과 함께 일본의 요코하마항(横浜港)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신주쿠교엔(新宿御苑)으로 가서 환영회에 참가해서 <일본 왕(昭和)>을 만났으며, 그 후에는 일본 각지를 방문했다.

 그리고 헬렌은 그때, 당시 <일본의 헬렌 켈러>라고 불렸던 나카무라히사코(中村久子-1897년 11월 25일부터 1968년 3월 19일)도 만났으며, 그때 또 헬렌이 <아키타이누(秋田犬)>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그 개 두 마리도 나중에 선물로 받게 된다. 하지만 또 그때 약간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다고 했는데(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코하마 항의 客船대합실에서 헬렌이 毛布를 取했다고 함. 그러나 일본에서는 훔쳤다고 신문에 보도됨), 그러자 일본 각지에서 성금(誠金)이 쇄도(殺到)해서 원 모포(毛布) 가격의 10배 이상이 모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였던 8월 10일에 헬렌은 일본을 떠났으며, 1946년에는 <해외맹인미국협회>의 대표가 되어서 톰슨과 함께 유럽을 방문했다. 그리고 1948년에는 두 번째로 일본을 방문했으며, 그러자 또 일본에서는 그 일을 기념해서 <헬렌 켈러 재단(財團)>이 설립되기도 했다. 그리고 1951년에는 남부아프리카를 방문했으며, 1952년에는 프랑스정부로부터 <레지옹도뇌르훈장(勳章-L'ordr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 프랑스의 최고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또, 그때부터 1957년까지 중동(中東)과 중부아프리카, 북유럽, 일본 등을 차례로 방문했으며, 그 중의 1955년에는 설리번전기(傳記) <선생님>을 출판했다. 그리고 세 번째의 일본방문에서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그때의 방문목적 중의 하나는 그때까지 친구로 지냈던 이와하시타케오(岩橋武夫)가 1954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영전(靈前)에 꽃을 바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헬렌은 그 이와하시(岩橋)의 이름을 부르고 울면서 일본을 떠났고, 1960년에는 의지했던 톰슨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헬렌도 1961년에 병이 들었으며, 그때부터 서서히 외부와의 접촉을 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4년 9월에 미국정부로부터 <대통령자유훈장>이 주어졌고, 1968년 6월 1일 코네티컷(Connecticut) 주(州) 이스턴(Easton)의 자택(自宅)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 87세였다. 그러자 일본에서도 훈일등(勳一等) 즈이호우쇼우(瑞寶章)가 증정(贈呈)되었다.

 그리고 헬렌은 이미 알려진 대로 복지(福祉)활동뿐만이 아니라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서 광범위(廣範圍)한 활동을 했던 여성이었고, 그래서 또 당시로서는 선진적(先進的)인 사상(思想)을 가지고 남녀동등권론자(男女同等權論者)로서 부인참정권(婦人參政權)이나 피임구(避妊具)의 사용(使用)도 주장했던 여성이었다. 그리고 또, 인종차별반대론자(人種差別反對論者)였기도 했던 그녀는, 그래서 또 과혹(過酷)한 어린아이들의 노동(勞動)과 사형제도(死刑制度)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의 살육(殺戮)에도 반대를 했다. 그러자 에프비아이(FBI)에서는 그녀를 요조사인물(要調査人物) 또는 요주의인물로 지목하기도 했으며, 최초의 일본방문 때에는 특별고등경찰(特別高等警察)의 감시(監視)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녀와 설리번의 이야기는 "The Miracle Worker(기적을 이룬 사람들 또는 내용적으로 기적을 이끌어낸 설리번)"란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으며, 그것은 또 일본에서도 <기적(奇蹟)의 인물>이란 제목으로 수차례 상영되기도 했는데, 하지만 또 그것은 설리번의 이야기를 헬렌의 일로 오해했던 결과였다고 한다. 그래서 또 당시, 헬렌은 일본에서는 <기적(奇蹟)의 대명사(代名詞)>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그것은 또 당시 설리번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래서 그 설리번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던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 역시도 하나의 불완전한 인간임을 잘 보여준 케이스였다고 할 수 있었고, 그것은 신체적인 불완전함과 정신적인 불완전함이 합쳐진 것으로, 니체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 한 예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격려와 함께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가운데, 그럼에도 거의 폐기될 수도 있었던 한 인생을 그렇게도 역전시킬 수 있다는 한 예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도 세계적으로 <위대한 여성>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불편한 사람들과 함께,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삶의 용기와 희망을 전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Life is either a daring adventure or nothing"
 인생은 두려움을 모르는 과감한 모험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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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踏雪野中去...>

 

 

                                                       

<1932년 4월 윤봉길과 함께> 

 

 

 <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러이 가지 말라. 오늘 걸은 나의 걸음이 뒷사람의 길이 될 수 있으므로... 

 

 백범 김구(白凡 金九,1876년 8월 28일부터 1949년 6월 26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었고,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역임했으며,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그는 황해도 해주 출신이며, 아버지 김순영(金淳永, 당시 24세)과 어머니 곽낙원(당시 17세)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원래 창암(昌巖)이었으나 19세 때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 때 구(九)로 바꾸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 가난했기 때문에 독학으로 한글과 한문을 배우다, 교육열이 강했던 어머니 덕분에 한학 등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안중근>과 비슷하게 어려서부터 혁명적인 기질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현실과 사회를 비관적으로 보게 되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과거에 응시했으나, 오히려 그곳에서도 부정부패가 만연한 것을 보고 벼슬길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 후에 동학운동에 참가했다거나, 승려로도 활동을 했고, 28세 때는 기독교에 입문을 했기 때문에 동학도에서 불교도 그리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한 때 교육자로도 활동을 했다.

 

 

                                         

<교육자 시절의 모습>

 그는 21세 때 소위 <치하포(황해도 ) 사건>을 일으켜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었다. 그리고 사형선고를 받고 기다리던 중 <고종>의 특사로 사형을 면했다. 그리고 1898년 3월에 동료들과 탈옥에 성공했고, 공주 <마곡사>에서 불교에 입문했다. 하지만 그 후에 환속했고, 우여곡절 끝에 감리교에 입교했다. 그리고 그 후에 교육에 힘쓰며 잠시 관직(농상공부 種桑委員)을 맡기도 했다.

 

 

<105인 사건 관련자들 체포 장면>

 

 

 1911년, 그는 105인 사건(百五人事件=安岳事件)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감옥에서 이름을 九로 개명했다. 그리고 1915년 8월에 가출옥했고,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단에 참여했다. 그리고 1919년 8월에는 <안창호>의 천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활약 끝에 1923년에는 내무총장에 재임되었고, 국무총리 대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26년에는 국무령에 선출되었고, 이후 초대 주석이 되었다.

 

 

<임시정부 피난 시절 가흥에서 촬영. 중앙 김구 중심으로

송병조, 이동녕, 이시영, 조성환, 엄항섭, 조완구, 차리석 등과 부인들.

맨 앞줄의 어린이들은 엄항섭의 자녀들>

 

 

 1920년대 이후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조직은 와해의 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1932년 <이봉창>을 <일본 도쿄>로 보내서 천황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윤봉길>의 거사는 성공했는데, 그 때문에 그는 피신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1933년에는 장개석을 만나서 도움을 받았으며,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훈련반을 설치해서 한국인 92명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1937년부터는 형편이 나아져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국민당에서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40년 9월에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그러나 장개석이 임시정부의 지휘를 반대해서 <광복군>은 <국민당 군>에 예속되었다.

 1941년 12월,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그리고 1944년 8월에는 중화민국으로부터 <광복군>의 통수권을 돌려 받았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갑자기 일본이 항복하자 김구는 임시정부의 힘으로 광복을 하지 못한 것을 통탄해했다. 그리고 11월 3일,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김포공항).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하지만 12월 말에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반대운동을 주관하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그 후에 <찬탁>이라고 생각되었던 <송진우 암살사건(1945년 12월 30일)>이 발생했고, 그 배후로 김구가 지목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발생했던 <장덕수 암살 사건(1947년 12월 2일)>의 배후로 <이승만>은 그를 지목했는데, 그 때문에 김구는 이승만과 결별했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의 송진우> 

<장덕수 1945년>

 


 그는 1948년 4월 19일에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 목적으로 북쪽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김일성=김성주>에게 완전히 농락당하고 5월에 다시 남쪽으로 넘어왔다. 그 후, 그는 <김일성>에게 당한 것을 분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그 후의 2차 회의 초대는 거절했다.

 

 

<38선을 넘어 가는 김구 일행>

 

 

 그리고 그 후에 터졌던 <여순반란사건(1948년 10월 19일~27일)>의 배후로도 그가 지목된다. 그 후, 그는 칩거생활에 들어갔지만, 1949년 6월 26일 육군포병 소위였던 안두희(安斗熙)에게 저격되어 사망했고, 그때가 74세였는데, 그 배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경교장에 안치된 김구>

 

 

 이상, 간단하게 살펴보았지만, 그는 대한민국의 위인(偉人) 중 1인으로, 또한 독립운동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한민국 역사에 굵은 한 획을 그은 인물임에 확실하다. 하지만,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과 행동주의적 태도로 인해서 많은 뒷 예기를 남겼다. 그래서 양(陽)으로 포장된 그의 명성(名聲) 만큼이나 음(陰)의 면도 많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陽의 면이 더욱 많이 부각되어 있으며, 그래서 한국인에게는 영원한 독립운동가로, 또한 독립투사로, 그리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독립과 자강(自彊)을 위해서 노력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참고: 위의 시는 김구선생이 직접 쓴 작품이 아니고, 평소 애송하였던 시이며

       <서산대사> 또는 조선 후기 문신 <이양연(1771~1853)>의 시로 알려진 작품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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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부터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항일 의병장 겸 정치사상가였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고려 시대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 그는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며, 1909년 10월 26일 한국통감 이토히로부미를 민족의 이름으로 척살했던 것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日帝의 복수>로 1910년 3월 26일에 <살인의 죄명>으로 뤼순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것으로 그의 높은 뜻은 다시 묵살되었다.

 

 

 

<사건 당시의 이토 모습>

 

 그 후에 그는 많은 중국인들에 의해 추앙되었으며, 조선인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옥중에서 쓴 미완성의 작품 <동양평화론>도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으며, 그 이유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유해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유해를 찾는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 생전에 매우 열정적이고 열성적인 성격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부모 등, 가족과 친지들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높은 뜻을 세웠으며, 그 후에 많은 일들에 가담했고 나름대로의 성과도 올렸다. 그러나 强盜 日帝와 그것을 주도했던 <쥐새끼(안중근의 표현으로) 이토>를 처형하는데 그의 마지막 힘을 모았으며, 그 때문에 더욱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기회를 상실한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이토>라는, 당시로서는 <거대한 산> 하나를 무너뜨린 것으로도 그의 업적은 충분히 높을 수 있었으며, 특히 죽음 앞에서 보였던 의연했던 태도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것은 자신의 확고한 신념이 없으면 보여주기 힘든 태도였다. 그러므로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나라를 걱정했던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으며, 그래서 지금도 많은 충열지사, 우국지사들과 함께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한 빛>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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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빼앗긴 죄인이, 무슨 호사(豪奢)를 누릴 것인가?!>

 

 

                                                                      

 

 

 나라를 못 찾고 있는 죄인이 무슨 가족을 생각하겠소?!

 그러니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을 때까지, 나는 이 생활을 계속할 것이오!

 이시영(李始榮-1868년 12월 3일부터 1953년 4월 19일)은 조선(朝鮮)과 대한제국(大韓帝國) 때의 관료(官僚)였고, 그 후에는 독립운동가, 정치가, 교육자로서 활약했으며, 대한민국(大韓民國) 초대부대통령(初代副大統領-1948년 1951년)을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본명은 성흡(城翕), 호(號)는 성재(省齋 또는 始林山人), 본관(本貫)은 경주(慶州)로 알려져 있고, 대대로 고관(高官)을 지냈던 집안에서 태어나서 서당(書堂)에서 글을 배운 후,1885년에 사마시(司馬試-조선시대, 생원과 진사를 뽑았던 과거시험)에 합격한 후, 관료(官僚)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1894년에는 당시, 개화파(開化派) 정치가 중 한사람이었던 김홍집(金弘集-1842년부터 1896년 2월 11일. 조선 후기의 문신, 사상가, 정치가로, 1884년 甲申政變의 주역이었으나, 그 후에 親日派로 몰려 俄館播遷 때 살해되었던 인물이었으며,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함)의 사위가 되었지만, 그러나 또, 그 김홍집(金弘集)이 사망하자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905년에 외부교섭(外部交涉)의 장(長)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그에 강력히 반대해서 그는 사직(辭職)을 했지만, 그러나 또 그 후에 다시 관직에 복귀해서 여러 직을 전전하던 중, 일본에의 저항과 근대화의 계몽에 노력했는데, 그러나 결국, 1910년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그는 가족들 4,50인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했다.
 
 그 후, 그는 독립운동과 인재육성을 위해서 길림성(吉林省)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수립 때는 재무총장(財務總長), 국무위원(國務委員), 법무위원(法務委員), 재무부장(財務部長), 감찰위원장(監察委員長) 등, 중요 직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 후,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자 그는 다른 임정(臨政) 요인들과 함께 귀국했으며, 그 후에는 서울에 현재의 <경희대학> 전신(前身)이었던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을 개교했고, 이승만이 이끌었던 한국독립촉성중앙협의회(韓國獨立促成中央協議會)에도 참가했다.
 
 하지만 또 그 후, 좌우 파(左右派)의 대립이 격심해졌고, 그리하여 임정(臨政)계의 정치가들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그리고 이승만의 속셈이 교차하던 중에, 그는 일시 정계(政界)를 떠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또 남북(南北)의 분열이 확실해지자, 그는 신익희(申翼熙)와 지청천(池靑天), 이범석(李範奭), 장택상(張澤相) 등과 함께 남한(南韓)의 단독정권수립(單獨政權樹立)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 후, 이승만 등에 의한 대한민국(大韓民國)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부통령에 취임했으며, 그 후에 또 한국전쟁(韓國戰爭)이 발발하자, 이승만 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갔지만, 그러나 또 그곳에서 발생했던 국민방위군사건(國民防衛軍事件)을 계기로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참고: 국민방위군사건은,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 1월, 1·4 후퇴 때 제2국민병으로 편성되었던 국민방위군의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12월에서 2월 사이에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었던 사람들 중에서 아사자와 동사자가 약 9만에서 12만여 명이나 나왔던 사건을 말하며, 그 후에 이시영을 비롯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승만과 그 정권의 처사에 실망을 해서, 등을 돌리게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그 후, 그는 다시 정계를 떠났지만, 그러나 또 일시 재기를 꿈꾸어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실패했고, 그 후에는 또 이승만 독재(獨裁)를 규탄하는데 앞장서기도 했지만, 그러나 결국, 피난지였던 부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1964년에 유체(遺體)가 서울로 이장되었고, 그러자 또 사람들은 그를 청렴결백하고,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했던 모범적인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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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나라의 보배(寶貝)요, 희망(希望)이며, 이상(理想)>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寶貝)요, 희망(希望)이며, 이상(理想)입니다.

 안창호(安昌浩-1878년 11월 9일부터 1938년 3월 10일)

 안창호(安昌浩)의 호(號)는 도산(島山),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였고, 그래서 <독립(獨立)의 아버지>라고 추앙(推仰)되고 있는 분이다. 그리고 그는 평안남도(平安南道-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 일명 도롱섬)에서 안흥국(安興國)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그리고 또 당시, 그의 부친(父親)은 빈농(貧農)의 선비로 27세였고, 어머니 황씨는 32세, 형으로 치호(致浩)가 있었다. 그리고 또 그는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니면서 한문과 유학(儒學)을 배웠고 16세 때 상경(上京)해서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했다.

 그 후였던 19세(1897년) 때는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해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참석했으며, 그 후에 평양에서 <만민공동회 관서지부(關西支部)>를 발기(發起)했고, 그러던 중에 연설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그 후, 웅변가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연설을 했던 그는, 1898년 11월에는 서울 종로에서 열렸던 <만민공동회>에서 7대신(大臣)을 탄핵했고, 6개조의 정치혁신안(政治革新案)을 건의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독립협회>가 해산되었고, 그러자 그는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웠던 등, 농촌활동과 기독교의 포교활동에 힘쓰기도 했다.

 1902년, 그는 24세 때 '이혜련'과 결혼했으며(9월 3일), 그 다음날 부부동반으로 인천항을 출발해서 미국(美國)으로 향했다. 그 후,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미국(美國) 생활을 했으며, 1905년에 을사5조약(乙巳五條約)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권(國權)이 일제(日帝)에 침탈(侵奪)당하자, 1907년에 귀국(歸國)해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으며 <신민회(新民會)>의 창립과,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했던 등, 민족교육에 힘썼다.

 1909년,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의 의거(義擧)와 관련해서 잠시 옥고(獄苦)를 치렀던 그는, 그 다음해 4월 7일에 행주를 출발해서 외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때 <거국가(去國歌)>를 남겼다고 하며, 그 후에 이갑(李甲) 등과 함께 위해위(威海衛)와 북경(北京) 그리고 청도(靑道) 등을 거쳐서 상해(上海)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떠돌았으며, 그 후에 청도(靑島)에서 독립 운동자들과 합류해서 <청도회담>을 개최했다. 그리고 한일합병(韓日合倂)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귀국(歸國)한 후, 1911년에는 북만주의 밀산현(密山縣)에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세울 계획을 가졌으나, 제반여건이 여의치 못해서 러시아와 독일 그리고 영국 등을 거쳐서 다시 미국의 뉴욕으로 갔다.

 그리고 그 다음해 11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중앙총회>를 조직해서 초대회장에 선임되었고 <흥사단(興士團)> 조직에도 착수했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1919년에는 임시정부(臨時政府)에 참여해서 내무총장(內務總長)이 되었으며, 이어서 국무총리(國務總理)대리에도 취임했다. 그러나 그 후에 임시정부(臨時政府) 내에서 갈등이 고조되자, 1923년에 <이상촌(理想村)> 건설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그러나 자금과 부지확보 등의 곤란으로 실패했다.

 그리고 또 1927년에는 길림(吉林)에서 군사행동단체의 통일과 대(大)독립당의 결성을 토의하던 중, 무기(武器) 등의 반입을 수상하게 여겼던 중국의 경찰에 의해서 동지 200여명과 함께 체포되었지만, 그러나 또 중국 내의 여론이 비등하여 20일 만에 석방되기도 했고, 그 다음해에는 이동녕, 이시형, 김구 등과 함께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결성했으며, 그때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하기도 했다.

 하지만 또, 1932년 4월 29일에 상해(上海)의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의 의거(義擧)가 발생하자, 혐의(嫌疑)를 받아서 일본군(日本軍)에 체포되었고, 그 후에 한국으로 연행된 후, 징역 4년을 선고받아서 복역(服役)했다. 그 후, 1935년에 가석방되어 은거(隱居)했지만 그러나 또 1937년 6월에 발생했던 <동우회사건(同友会事件)>으로 다시 체포되었으며, 그러나 또 수감(收監) 중에 받았던 고문 등으로 얻었던 병이 악화되어 석방되었지만, 간경변(肝硬變) 등, 합병증(合倂症)으로 <경성제국대학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위의 내용과 같이, 그리고 다른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과 같이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분이었지만, 그러나 또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테러에 의한 무력행사 등에는 일관되게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자아혁신(自我革新)과 민족혁신(民族革新)이라는 표어(標語)를 내걸고 인재양성(人才養成)을 주장했으며, 그래서 또 그 실천으로 남녀공학의 사립학교였던 점진(漸進)학교 등, 근대적인 제도를 채용했던 학교들을 설립했다. 그리고 또 청년 단체였던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와 수양(修養) 단체였던 흥사단(興士團)을 설립하기도 했으며, 거기다 근대적인 제도를 채용했던 주식회사(株式會社)도 설립했고, 출판(出版) 등, 산업진흥(産業振興)에도 힘썼다.

 그리고 또,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해서, 김구(金九)와 여운형(呂運亨) 등, 장래 한국을 이끌어나갈 리더들을 육성(育成)하는데도 노력했고, 미국(美國)과 러시아에 한국인연휴단체를 설립하기도 했으며, 생활개선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평소에 담배를 너무 좋아해서 끊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으며, 특히 일본인(日本人)들에 대해서도 당시 흔하게 말해졌던 <왜(倭)놈>이란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日本) 자체(自體)에도 경의(敬意)를 표했기 때문에 일본인들로부터 <고매(高邁)한 인격의 소유자>로 알려졌다고 하며, 그래서 현재까지도 한국과 일본의 역사가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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