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등, 남부지방의 수해에 이어서

 

이번에는 중부지방에 큰 재해가 닥쳤습니다.

 

사고를 당하신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리며

 

앞으로도 더욱 조심하시길 당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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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감자밭>


주인이 심은 알곡을 다 캐고 가버리면

밭 주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검은 밭으로 뛰어든다

주인의 배려로 그것은 묵인된다


밭에 뛰어든 사람들은 주로 여자들이다

몸뻬를 입은 여자들은 전부 비슷하다

머리에는 수건을 덮어쓰고 손에는 바구니를 들었다

눈에는 광채가 나고 손은 부들부들 떨린다


조금이라도 빨리 캐야 큰 것을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엉덩이를 쳐들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알이 굵은 감자만 많이 캐면 되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가족의 끼니다


남자들은 술을 퍼마시고 여자들은 낙곡(落穀)을 줍는다

남자들은 노름을 하고 여자들은 생명을 줍는다

여자들은 그런 남자를 위해 밥상을 차린다

감자밭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알곡 앞에서는 선후배나 서열도 무시되기 일쑤다

여기저기서 다투는 소리가 나지만 줍는 것은 멈추지 않는다

그녀들이 다 가고 나면 그곳엔 시커먼 흙만 남는다

그것이 얼마나 검은지 눈이 부실 지경이다


세상이 온통 검은색뿐인 것 같다

감자줍기는 내년에도 계속될 것이다

밭주인은 그때도 모른 척할 것이다

여인들은 그때도 감자밭으로 뛰어들 것이다


남자들은 술을 마시고 여자들은 알곡을 줍고

밭주인은 모른척하고 여자들은 알곡을 줍고

아이들은 밭 가에서 엄마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시커먼 흙은 그대로 또 다음해를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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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를 위하여-기도>

   당신과 만났던 날

   나는 당신이 나에게

   무관심한 것을 알았습니다.

   너무도 슬펐던 나는

   세상에 혼자가 된 느낌으로

   거리를 배회하였습니다.

   지독한 배고픔과

   견딜 수 없는 향수병에 시달리며

   오직 당신에게만 기대고 싶었던 그때

   그러나 당신은 너무도 냉정했습니다.

   당신의 그 냉랭했던 시선

   그 깜깜하고 두려움에 떨며 보냈던 긴 밤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그때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매일 당신이 그리워서 괴로워했던 그때

   매일 당신과 만날 수 있게 하늘에 기도했던 그때

   그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나의 어머니

   매일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셨을 어머니였습니다.

   아, 어머니! 저는 너무도 모자란 자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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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사는 곳이 지방 소도시라...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오늘은 8월의 첫날...

 

그런 의미에서라도 밖으로 나갔다.

 

풍요로운 여름의 모습...

 

넉넉한 평야의 모습을 감상하며 갔는데...

 

갑자기 낡은 바퀴가 문제를 일으켰다!

타이어가 펑크가 난 것이다... ㅠㅠㅠㅠ

대략난감...

 

날씨가 너무 더워 근처 숲으로 가서 조금 쉬었다.

저 앞의 아파트군을 지나, 도보로 약 30분쯤 더 가야 하는 곳에 자전거 수리점이 있는데...

그래서 마치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자전거를 끌고 모험을 떠나기로 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자전거 수리점...

주인 아저씨가 열심히 수리를 하고 계신다.

 

그것을 보면서...

역시,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그곳까지 걸어오면서 느꼈던

수많았던 생각과 죽을 것 같았던 순간들...

 

수리비는 35000원이었지만

오히려 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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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나라여야, 크게 발전할 수 있다>

 

 

  


 

 

 정도전(鄭道傳-1337년 또는 1342년부터 1398년 8월)

 정도전은 고려(高麗) 말기와, 조선(朝鮮) 초의 문신(文臣), 유학자(儒學者), 시인(詩人), 외교관,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였고, 호(號)는 삼봉(三峯),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아버지는 형부상서를 지냈던 정운경(鄭云敬), 어머니는 우(禹) 씨였다. 그리고 고향은 경북 영주(榮州)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버지가 개경(開京)으로 갔을 때 함께 가서 이곡(李穀)의 아들이었던 이색(李穡)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유학(儒學)을 배웠으며, 1360년(공민왕 9)에는 성균시(成均試)에, 136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으로 나갔다.

 1366년, 아버지에 이어서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영주>로 내려가서 3년간 여묘(廬墓)를 했으며, 1370년에 이색(李穡)이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그는 개경으로 올라가서 성균박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고, 이어서 예의정랑이 되었다. 그리고 1374년에 공민왕(恭愍王)이 암살당하자 그 사실을 명나라에 알릴 것을 주장해서 이인임(李仁任)의 미움을 받았다. 그리고 또 1375년(우왕 1)에는 성균사예(知製敎)가 되었으나, 그러나 또 이인임 등의 친원정책(親元政策)에 반대해서 전라도 나주(羅州)로 귀양을 갔다.

 그 후, 유배생활이 풀리게 되자 그는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그러던 중에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그러다 1383년에는 함흥에 있었던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가서 인연을 맺었으며, 1384년에는 전교시부령(典校侍副令)에 복직되어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리고 또 1388년에는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고, 그 다음해 이성계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하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田制)개혁을 추진했는데, 그 과정에서 친했던 정몽주(鄭夢周)와 스승 이색(李穡)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1389년 11월에는 공양왕(恭讓王)을 즉위시키는데 가담했으며, 그 공(功)에 의해서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그리고 1390년에는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모함을 해명하기 위해서 명(明)나라를 다녀왔다. 하지만 그 후에 정몽주(鄭夢周)의 탄핵을 받아서 영주로 다시 유배를 갔으며, 그 후에도 정몽주(鄭夢周)의 집요한 살해(殺害)시도에도 살아남았다가 끝내 공양왕의 덕분으로 1392년에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그해 3월에 이성계가 낙마(落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도 탄핵을 받아서 잠시 투옥되기도 했지만 곧 풀려났고, 그 4월에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하자 6월에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달에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했으며, 그러자 그는 이성계의 후광을 등에 업고 모든 실권(實權)을 장악했다.

 그 후, 그는 정적(政敵) 등을 제거했던 등, 한바탕의 피바람을 불러일으켰고, 1394년(태조 3년) 10월에 이성계는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했다. 그러자 그는 새 왕조(王朝)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서 많은 일을 했지만, 그러다 또 명나라와의 외교문제로 인해서 모든 공직(公職)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또 그 후에도 요동(遼東)정벌의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던 중, 조준(趙浚)의 강력한 반대로 난항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러던 중에 그의 처사에 불만을 품었던 이방원(李芳遠) 등에 의해서 그는 처형되었다. 그러자 그 후, 그는 이방원(李芳遠) 등에 의해서 역적(逆賊)의 상징이 되었지만, 그러나 또 나중에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복권되었다. 그리고 또 그의 저작으로는 <삼봉집(三峯集)>과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그리고 <경제문감(經濟文鑑)>과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이 있었다.


 그래서 결국, 조선(朝鮮)하면 그를 빼놓고 이야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조선(朝鮮)의 성립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었고, 그래서 또 나름대로 큰일도 많이 했었던 인물이었지만, 그러나 또 과유불급(過猶不及) 즉, 지나친 것은 못 미치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의 독단(獨斷) 또는 독주(獨走)는 여러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던 면이 있었는데, 그리하여 결국 그에 위기를 느꼈던 이방원(李芳遠)이 그 해결사로 나서게 됨으로 해서 그는 말년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의 원대했던 꿈들도 그렇게 해서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고사(故事)를 보고 느끼면서, 특히 이 험난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좋을지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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