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兵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맥아더>  

 

 

 <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년1월26일부터 1964년4월5일(1964-04-05))는 너무도 유명한 인물이며, 그만큼 그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다. 그러나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한국>의 입장에서는 큰 인상을 남겼던 인물이었으며, 그래서 지금도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과연 <그가 존경할 만한 인물인가?>하는 의문도 있으며, 그래서 현재도 인천에 세워진 그의 동상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인의 입장이며, 그는 세계의 전쟁사에서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던 것으로 해서 거의 패전으로 가고 있었던 <한국전쟁>을 역전시켰던 공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를 객관적으로 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라 그의 약력을 대충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그는 군인 출신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래서 군인으로, 정치가로 활약했으며, 나중에는 기업가, 사회운동가로도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1880년에 미국의 아칸소주(State of Arkansas)에서 태어났으며, 뉴욕에서 성장했고, 위로 형이 두 명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Arthur MacArthur Jr)도 군인이었고, 독실한 개신교(Protestantism) 신자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도 나중에 <웨스트포인트 미국육군사관학교(美國 陸軍士官學校-United States Military Academy, USMA 또는 별칭 West Point)>에 진학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아버지 아서 맥아더 주니어>

 

 

 그의 어머니(Mary Pinkney Hardy MacArthur)는 자식 교육에 열정적인 분이셨고, 그래서 그가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하자 그 근처에 방을 얻어 생활하면서 그의 뒷바라지를 했을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에 입학하려 했을 때, 대통령과 유력한 의원의 추전장이 필요했는데, 그때 그의 어머니가 나서서 그 자격을 획득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는 <웨스트사이드고등학교>에 입학해서 1년 반 동안 수험준비를 했던 결과 1899년에 750점 만점에서 700점을 획득해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가족사진-좌측이 맥아더-1883년에 차남 말콤은 病死함>

 

 

 하지만 그 학교생활은 아주 힘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는 나름대로 갈등도 했다고 했는데,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그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제42사단 참모장>으로 프랑스에서 복무했고, 이후 준장으로 승진한 후 사단장이 되었다. 그 후 <웨스트포인트 교장>이 되었으며 <1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최연소 육군 소장이 되었다. 그리고 1930년 미국의 제 13대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 후에는 임기를 마치고 1937년에 필리핀에서 최고 군사 고문을 지냈으며, 필리핀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가 되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지원해서 참전했다. 그 후 필리핀 주재 극동군 최고 사령관이 되었으며, 1944년에는 원수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에는 일본군을 격파하고 필리핀에 상륙했으며, 8월 30일에는 일본 본토에 상륙했다. 그리고 <연합국군최고사령관(連合国軍最高司令官-SCAP)>이 되어서 전후처리를 주도했는데, 이 부분에서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미심쩍은 부분>을 많이 남겼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민족의 원흉(元兇)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켰고, 그러자 그는 <유엔군 총사령관>에 취임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을 통해서 패색이 짙었던 전쟁을 역전시켰다. 그러나 그 사이에 <트루먼 대통령>과 사이가 나빠졌고, 그 입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해임되었다.

 

 

                       

                                                                       <트루먼과 함께>

 

 

 그 후, 그는 별 다른 활약은 없었으며, 대통령선거 출마에도 실패했다. 그리고 회사(레밍턴랜드)에 입사해서 회장 직을 지내기도 했지만, 주로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1960년에 요도의 질환으로 입원을 해서 수술을 받았고, 1964년 <워싱턴>에서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는 한 인간으로 봤을 때, 충분히 <영웅적인 기질>을 타고난 사람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라든가,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는 등 <천재적인 면>도 충분히 보여준 인물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과유불급>이다. 그래서 그런 독특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들이 많고, 그 때문에 스스로 자멸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그래서 그 역시도 그런 면 또한 충분히 보여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전후처리>와 <한국전쟁>을 통해서 애증(愛憎)의 면을 보인 바 있었고, 그래서 지금도 미워할 수도, 그렇다고 무조건 인정할 수도 없는 인물로 남아 있다.

 

 

 

 

 

 

 

                              

                                                                             <1960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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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歷史)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끝없는 투쟁(鬪爭)>

 

 

  

 

 

 <역사(歷史)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끊임없는 투쟁(鬪爭)이다!>

 신채호(申采浩, 1880년 12월 8일~1936년 2월 21일 또는 11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 사학자, 사상가, 조선근대의 역사학(民族史學)을 확립했던 역사가였다. 그리고 호(號)는 단재(丹齋)였고, 고향은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도리산리(또는 도리미)였으며, 아버지 신광식과 어머니는 박(朴) 씨(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어렸을 때 가정은 아주 가난했다지만, 그러나 서너 살 때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이미 그때 천재성을 나타냈다고 하고, 16세 때는 조 씨(豊壤 趙氏)와 결혼했다. 그리고 18세 때부터 그는 <갑오경장> 후에, 학부대신과 법무대신 등을 두루 거쳤던 <신기선>을 따랐으며, 그러자 그 <신기선>의 추천으로 1898년 가을에 성균관 경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위의 <경영과>는 현재의 그런 과목이 아니라, 일종의 유생(儒生)으로, 유학경전을 주로 배웠으며 거기다 신문물을 추가 습득했던 정도였다고 한다.

 1898년, 그는 <독립협회>에 가입해서 활동했으며, 그러던 중에 일제(日帝)의 탄압에 의해서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고, 그 후에는 고향과 서울을 오가면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1901년에는 고향 근처(인차리)에서 지인들(신규식·신백우)과 함께 학교(문동학교)를 세워서 젊은이들을 교육하기도 했고, 그 2월에는 성균관 생도 30명과 함께 법규의 시정을 위한 <헌의서>를 중추원의장에게 제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1904년에는 외무대신 <이하영>의 매국음모를 규탄했던 등, 그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04년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성토하는 성토문이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작성되자 그에 연명하기도 했고, 그리고 또 1905년에는 성균관박사가 되었지만, 그러나 그 다음날 바로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 후에 <황성신문>의 사장이었던 <장지연>의 권유로 <황성신문> 논설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리고 11월 20일 <장지연>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한 후 투옥되자, 그는 <장지연>을 대신해서 <황성신문>을 이끌었다. 그리하여 <국채보상운동-담배를 끊어 국채를 갚자(斷烟報國債)라는 제목의 논설을 발표함, 등)>에도 적극 관여했으며, 그 후에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베델>이 운영했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었다. 그래서 그 시기에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었지만, 그러나 일제(日帝)의 탄압이 점점 더 거세지자 1910년에 애국자들과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 후, 애국지사(愛國志士)들 간에 <독립군기지창건> 문제로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그 조직은 와해되었고, 그러자 그는 그해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그리고는 여러 신문의 주필(主筆)을 거쳤던 등, 계몽에 앞장섰지만, 그러나 건강이 너무 악화되었기 때문에 1913년 봄에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으며, 8월 19일에 상해에 도착했다. 그 후 <신규식> 등의 도움으로 <박달학원>을 개설해서 청년들을 가르쳤으며, 1914년에는 <윤세용>과 <윤세복> 형제의 초청으로, 그들이 서간도에 창설했던 <동창학교(東昌學校)>로 가서 교사로 재직했다. 그리고 그 후에 백두산과 만주 등, 고구려유적을 둘러보는 여행을 떠났으며, 그 여행에서 그는 많은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915년, 서간도에서 활동했던 그는 <이회영>의 권유로 북경으로 이동했고, 그 후에는 역사연구와 집필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후, 1919년의 3·1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그곳에서 약 4년간 체류했는데, 그 기간 동안 그는 대종교(大倧敎)운동에도 적극 가담했으며, 대종교의 제1대 교주였던 <나철>이 <구월산>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글을 남기고 자결하자, 그 비통한 심정을 <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으로 지어서 <나철>의 영혼을 달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이동해서,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지인들과 함께 <임시정부수립>에 적극 참여했다. 하지만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임정(臨政)을 나왔으며, 그 후에는 <신대한>이란 신문을 창간해서 임정(臨政)을 맹렬히 비판했다. 하지만 그 다음해(1920년)에 <신대한>의 발행이 중지되었고, 그러자 그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서 <보합단(普合團)> 조직에 참여해서 항일운동에 매진했으며, 이어서 독립운동의 행동대였던 <다물단(多勿團)>의 고문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러던 중에 당시 28세의 <박자혜>와 결혼했으며, 1921년 1월에는 독립운동잡지 <천고>를 창간했다.

 그리고 1922년에는 <김원봉>이 이끌었던 <의열단>의 고문으로 가입했던 그는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했고, 5월 10일에는 <군사통일준비위원회>에 참가했다. 하지만 또 <이승만>에 대한 실망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었으며, 그러자 그도 그 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또 1923년 1월에 열렸던 <국민대표회의>에서 그는 <창조파>의 편에 섰으며, 그리하여 1923년 6월에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겼다. 하지만 또 소련정부에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러자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몹시 실망했다.

 그 후, 소련정부에 의해서 <창조파>가 해체되자, 그는 1924년에 <북경>으로 다시 돌아가서 승려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무정부주의적인 성격을 더욱 강하게 하면서, 1927년에는 <남경>에서 열렸던 <아시아 9개국 대표>가 수립했던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해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고, 그 대회의 선언문도 작성했다.

 그 후(1928년) 그는 무정부주의활동을 위해서 위조화폐에까지 손을 댔다가 체포되어 구속되었으며, 1929년 5월에는 조선총독부의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뤼순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35년,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가석방 이야기도 나왔지만, 그러나 그 보증인들 중에 친일파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을 거절했고, 그리하여 1936년 2월 18일에 뇌일혈로 쓰러진 후, 그 사흘 뒤에 감방 안에서 홀로 사망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57세였다. 그러자 그 후였던 1962년 3월에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훈 2등)>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그의 저서로는, 조선사론(朝鮮史論)/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최(영장군)도통전/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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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보다 큰 상대와 싸워도...>

 


 

 

 

 사람은 자기보다 큰 상대와 싸워도, 기어이 이겨보려는 오기(傲氣) 또는 승부욕(勝負慾)이 있어야 한다

 

 신익희(申翼熙-1894년 6월 9일부터 1956년 5월 5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가였고, 호(號)는 해공(海公)이었다. 그리고 경기도의 광주(廣州) 출신의 사람이었으며, 1908년에 <한성관립(漢城官立)외국어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와세다(早稲田)대학>의 정치경제(政治經濟學)학부에 입학했고, 그 후에는 한국의 유학생들과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해서 기관지(機關紙)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했던 등 학생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1913년에 귀국해서 <경성중동(京城中東)학교>와 <보성법률상업(普成法律商業)학교>에서 교편(敎鞭)을 잡기도 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후(前後)에는 북경(北京)과 상해(上海) 등을 오가면서 최린(崔麟-天道敎幹部, 독립운동가, 나중에 親日派로 전향)과 송진우(宋鎭禹-독립운동가)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 등의 연락 역(連絡役)을 맡아서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그리고 1919년의 삼일운동(三一運動)에도 참가했으며, 그 때문에 일경(日警)에 쫓기게 되자 상해(上海)로 망명했다.

 그 후,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수립(樹立)에 참여해서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초대(初代) 내무장관(內務長官)에 취임했고, 그 후로는 내무총장(內務總長), 법무(法務)총장, 문교부(文敎部)장, 외무부(外務部)장 등을 역임했으며, 국무원비서실장(國務院秘書室長)과 의정원부의장(議政院副議長)도 겸임했다.

 그 후, 임정(臨政) 내에서 노선(路線)으로 인한 갈등이 고조되자 김구(金九) 등과 행동을 같이 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임정(臨政)에서 자금난(資金難)이 생겼고, 그래서 그는 그 자금을 구하기 위해서 아편장사까지 했던 등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1933년에는 남경(南京)에서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해서 대일(對日) 항전(抗戰)을 했었고, 1937년에는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1942년부터는 임정(臨政)의 외교위원회부의장(外交委員會副議長) 직을 맡아서 외교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1945년 12월 3일에 귀국했으며, 그 후에는 김구(金九) 등 임정(臨政) 계통(系統)과는 다른 길을 선택해서 이승만(李承晩)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또 그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1945년 9월 16日일, 서울에서 결성되었던 보수정당으로, 宋鎭禹가 初代主席이었고, 그가 12월에 암살되자, 金性洙가 뒤를 이었다)을 친일파(親日派)라고 비판했으며, 그 때문에 한민당(韓民黨)과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는 그해 열렸던 신탁통치(信託統治)반대운동에 참석했으며, 1946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부위원장(大韓獨立促成國民會副委員長)과 국민대학교초대학장(國民大學校初代學長) 그리고 자유신문사사장(自由新聞社社長)을 맡았던 외에, 미군정(美軍政) 하(下)에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장(南朝鮮過渡立法議院議長)도 맡았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미군정(美軍政)에 대한 쿠데타에 적극 관여했지만 실패했고, 1947년에는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과 합작해서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을 결성한 후, 그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1948년 5월 10일에 치러졌던 초대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해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5월 31일에는 대한민국제헌국회부의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당시, 의장(議長)이었던 이승만(李承晩)이 대통령에 선출되자 그는 의장(議長)이 되었고, 그리고 이어서 김성수(金性洙)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다음 1949년에는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을 결성해서 그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1950년 5월에 치러졌던 제2대총선거에서 제2대국회의원에 당선한 후, 국회의장에도 피선(被選)되었다.

 그 후, 한국전쟁(韓國戰爭)이 발발해서 대한민국은 혼란을 겪었으며, 그 사이에 정치적으로도 많은 문제들이 생겼다. 그리고 1955년에 그는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을 중심으로 했던 반(反) 이승만(李承晩) 세력이 결집해서 발족했던 민주당(民主黨)의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1956년에 치러졌던 제3대대통령선거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민주당(民主黨)의 대표로 대통령후보에 나섰다.

 그리고 이승만(李承晩)을 압박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러나 또 유세(遊說) 중이었던 5월 5일 장면(張勉)과 함께 열차를 타고 전주(全州) 유세(遊說)를 가던 도중에 뇌일혈(腦溢血)로 쓰러진 후 그대로 사망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61세 또는 63세였다(생일에 약간의 오차가 있음). 그리하여 그의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생애도 그렇게 해서 모두다 끝이 났고, 그러자 1962년 3월 1일, 그에게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이 수여(授與)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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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을 잡으려면 그 소굴로 들어가야 한다 >

 


 


<거사 3일 전에 찍은 사진>


 윤봉길(尹奉吉-1908년 6월 21일부터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尹奉吉)은 한국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였으며, 교육자(敎育者)였고, 시인(詩人)이었다. 본관(本貫)은 파평(坡平), 본명(本名)은 윤우의(尹禹儀), 호(號)는 매헌(梅軒), 충청남도 예산(禮山)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상해(上海)에서 열렸던 천장절(天長節-텐쵸우세츠, 日王 탄생일의 옛 이름) 행사에서 폭탄을 투척했던 사건을 일으켰던 장본인이었으며,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를 테러리스트 또는 민족주의자로 불렸다.
 

 


<김구와 함께>

 


 그는 1931년 상해(上海)로 건너가서 김구(金九)를 만나기 전에, 조선(朝鮮) 국내에서 많은 교육을 받았으며, 큰 뜻을 품고 출가(出家)한 후, 일경(日警)에 붙잡혀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리고 상해(上海)로 건너가서 김구(金九)가 조직했던 항일무장조직한인애국당(抗日武装組織韓人愛國黨)에 참가해서 사건을 준비했다. 그리고 제1차 상해사변(上海事變) 정전(停戰) 교섭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1932년 4월 29일, 상해(上海) 일본인(日本人) 거주지에 있던 홍구공원(虹口公園-현재의 魯迅公園)에서 열렸던 천장절(天長節) 축하식전회장(祝賀式典會場)에서 해군군악대(海軍軍樂隊)의 연주로 일동(一同)이 키미가요(君が代)를 부르고 있었을 때(관습에 따라서 2회째 부르고 있었을 때), 윤봉길(尹奉吉)은 11시 50분경에 수통(水桶)과 도시락으로 위장했던 폭탄을 일본관계자들이 있었던 단상(壇上)으로 투척했다.

 

 


<사건 현장>



 그리하여 그 식(式)에 참석했던 상해파견군사령관육군대장(上海派遣軍司令官陸軍大將)이었던 시라카와요시노리(白川義則-그로부터 3일 후에 사망)와, 상해일본인거류민단행정위원장(上海日本人居留民團行政委員長)으로, 의사(醫師)였던 카와바타테이지(河端貞次-즉사)가 죽었고, 제9사단장(第9師團長) 우에다켄키치(植田謙吉-왼쪽 발가락을 잃음) 중장(中將)과 제3함대사령장관해군중장(第3艦隊司令長官海軍中將) 노무라키치사부로우(野村吉三郞) 그리고 상해주재총영사(上海駐在總領事) 무라이쿠라마츠(村井倉松)와 상해주재공사(上海駐在公使) 시게미츠마모루(重光葵-한쪽 다리를 잃음), 상해일본인거류민단서기장(上海日本人居留民團書記長) 토모노모리(友野盛) 등, 많은 사람들이 중상(重傷)을 입었다.
 

 

 


<사건 직전의 일본 要人들, 좌로부터 白川, 重光, 野村>


 

 그러자 윤봉길(尹奉吉)은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부르짖으며 자살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에 붙잡혀서 군법회의(軍法會議)에 넘겨졌다. 그리고 그 후, 5월 25일에 상해파견군군법회의(上海派遣軍軍法會議)에서 사형(死刑)판결을 받았고, 11월 18일 오오사카(大阪)로 이감(移監)되었다. 그리고는 12월 18일, 육군제9사단(陸軍第9師團)의 주둔지가 있었던 이시카와현(石川縣) 카나자와시(金澤市)로 연행(連行)되었으며, 그리고는 연병장(練兵場)이 있었던 시내(市內-金澤刑務所)의 미츠코우지야마(三小牛山)에서,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에 총살(銃殺)된 후, 인근의 노다야마(野田山) 카나자와시공동묘지(金澤市共同墓地)에 매장(埋葬)되었다고 했지만, 그에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 

 

 

 


<尹奉吉 資料館・梅亭-魯迅公園>



 그리고 유해(遺骸)는 1946년 3월 6일에 조선인들에 의해서 발굴되어, 경성(京城-서울)으로 간 후,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그 후에 국립(國立)효창공원(孝昌公園)에 개장(改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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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아래는 위의 명언(名言)이 처음 소개되었던 것으로, 그래서 윤봉길 의사가 그것을 인용했던 것으로 생각되는 것인데, 어쨌든 본인의 글 <大中國>에서 소개했던 것을 참고로 올리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 반초<班超-32년부터 102년(建武9년-永元14년)> 그는 중국 후한(後漢) 때의 정치가였고, 군인이였으며, 자(字)는 중승(仲升)이었다. 그리고 반고(班固)의 동생이었고, 31년간이나 서역<西域-Xinjiang Weiur-현재의 新疆(신장)웨이우얼(위구르)자치구 근처>에서 머물면서 당시, 흉노(匈奴)의 지배 아래에 있던 서역(西域)의 국가들을 정복했고, 그리하여 후한(後漢)의 세력권을 파미르지방 동서(東西)에까지 넓혔으며, 그 공으로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후한서(後漢書)에서는 그를 칭해 <연함호발(燕頷虎髮)>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부(父)는 반표(班彪). 여동생은 반소(班昭)였으며, 일가(一家)는 역사가의 집안이었다. 자(子)는 三男 반용(班勇) 등이 있었다.

 ※ 반소(班昭-45년?부터 117년? 또는 49년부터 120년)는, 중국 후한(後漢)의 작가(作家) 또는 시인(詩人)이었고, 중국 최초의 여성역사가였다. 그리고 일명(一名) 희(姬), 자(字)는 혜희(惠姬) 또는 혜반(惠班)이었고, 부풍안륙(扶風安陸=湖北省)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역사가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14세에 조세숙(曹世叔)에게 시집을 갔다. 그 후에 남편이 죽자 그녀의 재명(才名)을 전해들은 화제(和帝)의 초청으로 궁중으로 들어갔고, 그 후, 후궁(後宮)들과 후비(后妃)들의 스승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서 조대가(曹大家)로 불려졌다. 그 후, 오빠였던 반고(班固)가 투옥되어 한서(漢書)를 끝내지 못하고 사망하자 8표(八表) 천문지(天文志)를 자신이 써서 완성시켰다. 그리고 또 다른 저작으로는 <여계(女誡) 7장(章)>과 <속(續) 열녀전(列女傳)> 2권도 그녀가 선정(選定)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한, 그녀 자신의 저서로는 조대가집(曹大家集)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사부(辭賦)에 길이 남을 부(父) 표(彪)의 <북정부(北征賦)>에 답해서 동정부(東征賦)를 지었다고 하며, 그리하여 <문선(文選)>에 수록된 한대(漢代) 여성작가들 중에서 제일로 손꼽혔다고 한다.

 ○
사부(辭賦)는, 중국의 초사(楚辭) 형식에 의거한 산문에 가까운 운문(韻文)을 말하며, 서정적 시(詩)인 사(辭)와 서사적 시(詩)인 부(賦)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곧 시문(詩文)을 이른다. 굴원(屈原)의 <이소(離騷)>를 중심으로 해서 한(漢)나라 때 발전하였고, 궁전의 장관(壯觀)이나, 도성의 번화함 그리고 사냥의 호쾌함 등을 노래했다.

 ○
문선(文選)은,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양(梁)의 소명(昭明)태자 소통(蕭統)에 의해서 편찬되었던 시문집(詩文集)으로, 전(全) 30권. 춘추전국시대부터 양(梁)까지의(약 천년) 문학자 131명이 썼던 부(賦)와 시(詩) 문장(文章) 800여 작품을 37장르로 분류해서 수록했다.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으나, 거의 안제(安帝)시대였던 원초(元初) 연간(年間) 114년에서 119년 사이에 사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그때가 향년(享年) 70여세였다고 후한서(後漢書)는 전한다.


 아무튼, 그는 형 반고(班固)와 함께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배웠다. 그러나 명제(明帝)의 칙명(勅命)에 의해서 두고(竇固)의 흉노토벌군이 조직되자 그도 참전했다.
그 후, 그가 선선국(鄯善國)에 사자로 갔을 때, 그 나라는 처음에는 그를 환대하더니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점차로 분위기가 나빠졌다. 그래서 알아본즉, 그곳에는 흉노(匈奴)의 사자도 함께 와있었던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또 그때, 그 때문에 몹시도 두려워하던 부하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아주 유명한 말을 했다. <不入虎穴焉得虎子!-호랑이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또는 호랑이굴로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새끼를 얻을 수 없다!> 그 다음,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서 무작정 흉노(匈奴)의 사자단(使者團)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의 숫자는 불과 36명뿐이었다. 그리고 흉노(匈奴)의 사자단(使者團)은 그보다 훨씬 더 숫자가 많았는데,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기습을 받았던 때문이었던지 흉노(匈奴)의 사자단(使者團)은 그대로 흩어졌고, 그들은 대승(大勝)했다. 그 후에도 그는 그 근처에 있던 흉노(匈奴)들을 모두 토벌했고, 그리하여 서역(西域)의 남쪽은 완전히 후한(後漢)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75년(永平 18년)에 명제(明帝)가 죽었고, 이어서 장제(章帝)가 즉위하자 그들에게 귀환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또 한군(漢軍)이 철수하면 그곳은 당연히 흉노(匈奴)들의 차지가 될 것이었고, 그리고 또한 그때까지 한(漢)에 협조를 했던 사람들은 몰살을 당할 것이 뻔했다. 그러자 또 그때, 그에 두려움을 느꼈던 서역(西域)의 왕들과 귀족들이 그를 찾아와서 울며불며 매달렸고, 그러자 그는 결국 그곳에 남기로 결정을 내렸다. 다음 91년(永元 3년), 그는 흉노(匈奴)의 후원을 받고 있던 구자(龜茲)를 토벌했고, 이어서 조정(朝廷)으로부터 서역도호(西域都護)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또 97년(永元 9년), 그는 부하였던 감영(甘英)을 사자로 보내서 대진(大秦=로마제국)과 조지(條支=현재의 시리아 지역)에 국교(國交)를 요구하려했지만, 감영(甘英)은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 감영(甘英-생몰불상)은, 중국 후한(後漢)의 무장으로, 영원(永元) 9년(97)에 반초(班超)의 명을 받아서 대진(大秦)으로 가기 위해 서역(西域)을 거쳐서 시리아에 도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그 후, 중국에 서아시아에 관한 지식을 전했다.

 아무튼 또 100년, 그는 서역(西域)에서 체류한지 31년 만에 한(漢)나라 땅이 그리워져서 조정(朝廷)에 귀국 탄원서를 냈다. 그러자 102년에 그의 소원은 성취되었고, 이어서 낙양(洛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망했다. 그러자 그 후, 그가 없었던 서역(西域)은 다시 흉노(匈奴)의 독무대가 되었고, 그러자 또 한(漢) 조정(朝廷)에서는 그의 아들이었던 반용(班勇) 등을 파견해서 다시 그곳을 회복해보려 했지만, 그러나 그 후로도 그가 있던 당시만큼의 세력은 회복하지 못했다.

 ※
반고<班固-32년부터 92년(建武8年-永元4年)>

 중국 후한(後漢) 초기의 역사가, 문학자. 자(字)는 맹견(孟堅). 반초(班超)의 兄이었다.그는 한서(漢書)의 편찬자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문학자로서 <양도부(兩都賦)> 등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부(父) 반표(班彪)도 역사가로서, 반고(班固) 이전에 벌써 65편을 편찬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반고(班固)는 칙명(勅命)에 의해서 부(父)의 업적을 계승했으며, 그리하여 한서(漢書)를 거의 완성했지만, 그러나 바로 그때에, 사원(私怨)에 의해서 중상(中傷)을 받아서 투옥되었고, 그 옥중에서 죽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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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어둠을 물리칠 수 없다...>

 

 

 

 


 Darkness cannot drive out darkness: only light can do that.
 Hate cannot drive out hate: only love can do that.


 

 어둠은 어둠을 물리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빛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증오(憎惡)는 증오를 물리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사랑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 2세(Martin Luther King, Jr-1929년 1월 15일부터 1968년 4월 4일)는 미국(美國)의 침례교(浸禮敎-Protestant Baptist)목사(牧師), 인권(人權)운동가, 흑인해방을 주장했던 사람이었으며, 아프리카계(系)의 미국인 공민권(公民權)운동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로 잘 알려진 웅변가였고, 1964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에는 의회명예황금훈장(議會名譽黃金勳章)을 수상(受賞)했으며, 특히 미국계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인종차별(人種差別)의 역사(歷史)를 설파(說破)했던 중요한 인물 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1929년에 미국의 남동부에 위치한 조지아(Georgia) 주(州)의 애틀랜타(Atlanta)에서 벱티스트(Baptist) 파(派)의 목사(牧師)였던 <마이클 루터 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 <마이클>은1935년에 종교개혁(宗敎改革)을 단행했던 <마틴 루터>의 이름을 따서 <마틴>으로 개명(改名)했기 때문에, 그는 주니어(junior)를 붙여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되었고, 그의 아버지는 <마틴 루터 킹 시니어(senior)>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어렸을 때(6세경) 동네에서 백인아이와 놀다가 그 백인아이의 어머니가 그 백인아이에게 <흑인(黑人)과는 놀지 말라>고 했던 말을 들었던 것으로 처음으로 인종차별(人種差別)을 경험했다고 하고, 그 후에 고등학교에 다녔을 때 토론(討論)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했는데, 그런데 돌아오던 도중에 버스 안에서 백인(白人)들로부터 자리를 양보할 것을 강요받았다. 그러자 그는 그 일로 해서 격노(激怒)했고, 그것은 나중의 <몽고메리버스보이코트(Montgomery Bus Boycott-1955년) 사건(事件)>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소개하기로 하며, 아무튼 그 후에 그는 <모어하우스대학(Morehouse College)>을 졸업한 후,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주(州)의 <크로저신학교(神學校-Crozer Theological Seminary)>를 거쳐서, 자기 아버지와 같게 <뱁티스트 파>의 목사(牧師)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였던 1955년에는 <보스턴대학(Boston University)>에서 신학박사(神學博士)가 되었는데, 그리고 그때, 그러니까 그 <보스턴대학>에 재학 중이었을 때, 그는 부인이었던 코렛타(Coretta Scott King)를 만나서 결혼했고, 그 후 4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그 <코렛타>는 그가 죽은 뒤에도 인권운동(人權運動)을 활발히 펼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2005년 8월 16일에 뇌졸중(腦卒中)으로 쓰러진 후, 2006년 1월 31일에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무튼, 그가 그 <보스턴대학> 재학 중에 어떤 식당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가 흑인(黑人)이라는 이유로 주문(主文)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점원(店員)은 인종차별(人種差別) 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는 그 일로 해서 남부(南部)출신의 흑인(黑人)들이 북부(北部)에서도 인종차별(人種差別)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깨달았다고 한다.

 그 후 <간디(Gandhi, Mohandas Karamchand)>의 영향을 받았던 그는, 철저한 비폭력주의(非暴力主義)의 입장에서 인권운동(人權運動)을 주도했고, 1963년 8월 28일에 행해졌던 <워싱턴 대행진(大行進)>에서는 <링컨기념관> 앞에서 자신의 유명했던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를 연설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또 즉흥적으로 행해졌던 것이었다고는 했지만, 그러나 그 내용은 높이 평가되어서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케네디>의 연설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名)연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1964년 7월 2일에 공민권법(公民權法-Civil Rights Act)이 제정(制定)되어, 당시까지 건국(建國) 이래(以來) 근 200년이나 이어져 내려왔던 미국(美國) 법(法) 상(上)의 인종차별(人種差別)이 막을 내렸다. 그러자 그에 대한 평가로 그에게 노벨평화상이 수여(授與)되었는데, 그것은 또 미국에서는 12번째였고, 흑인으로서는 세 번째, 그것도 최연소수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노선이었던 비폭력(非暴力) 문제로 해서 <맬컴엑스(Malcolm X)>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가 암살당하자 그는 그 일을 안타까워하기도 했고, 베트남전쟁이 발발하자 그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또 그 때문에 그의 적(敵)은 늘어갔으며, 그리하여 결국 1968년 4월 4일, 유세(遊說)활동 중이었던 <테네시 주(州)>의 <멤피스>에 있었던 <메이슨 템플(Mason Temple)>에서의 연설을 마치고(I've Been to the Mountaintop-나는 결국 산 頂上에 올랐다), 멤피스 시내의 모텔 <로렌(lorraine)>의 발코니에서 백인우월주의 자였던 <제임스 얼 레이(James Earl Ray)>가 쏜 총에 맞아서 사망했다.

 그러자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그의 비폭력(非暴力)운동도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러나 또 나중에 밝혀졌던 여성(女性)들과의 관계 또는 추문(醜聞) 등에 의해서 그 평가는 저하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아래는 그의 유명했던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의 일부를 소개한 것이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on the red hills of Georgia, the sons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owners will be able to sit down together at the table of brotherhood...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지아의 레드 힐에서, 과거 노예였던 자들의 자식들과 그 주인이었던 자들의 자식들이 형제애라는 이름으로 만든 자리에서 함께 앉을 수 있을 날이 오기를 바라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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