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떠나간 후에

 

   허리를 굽혀

   나비모양의 리본을 푼다.

   나의 서러운 노래는

   부드러운 너의 무릎 위에 떨어진다.

 

   그 아픔의 노래를 들으며

   너는 나의 진실한 고백에

   경악하고 있으리라.

   내가 멀리 떠나고 난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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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The supreme happiness of life is the conviction that we are loved.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빅토르 마리 위고(Victor-Marie Hugo-1802년 2월 26일부터 1885년 5월 22일)는 프랑스의 낭만주의의 시인(詩人), 소설가, 극작가였고, 7월 왕정시대부터 프랑스 제2공화국시대의 정치가였다. 그리고 그는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작가(作家)로서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정치가로서는 역경(逆境)의 연속이었고, 특히 어렸을 때부터 가정환경이 불행의 연속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프랑스> 동부의 도시 <브장송(Besançon)>에서 <나폴레옹 군대>의 군인이었던 <조제프(Joseph Le'opold Sigisbert Hugo)>의 3남으로 태어났고, 태어났을 때 몸이 아주 작았기 때문에(겨우 부엌칼정도만 했다고 함) 몹시 허약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태어나자마자 유럽의 각지로 이사를 다녀야했으며, 특히 순수한 <보나파르트주의>였던 그의 아버지와 <왕당파(王黨派)>였던 그의 어머니 <소피(Sophie-Franc,oise Tre'buchet)>는 정치사상(政治思想)의 차이로 불화(不和)가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은 나중에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에 반영되었다고 하며, 그리고 자주 집을 비웠던 아버지 때문에 그는 <머더 콤플렉스(mother complex-어머니에게 강한 의지와 반발을 하는 정신상태)>에도 몹시 시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1812년에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가서 1814년에는 <기숙(寄宿)학교>에 입학했으며, 그 사이에 그의 아버지는 <나폴레옹>의 패배로 인해서 스페인귀족의 지위가 박탈되었고, 그래서 그 후에는 <프랑스군>의 1개 대대장으로 몰락했다. 그리고 그는 그 기숙학교에서 4년 정도를 다녔으며, 나머지 2년은 <리세 루이 르 그란(Lycee Louis le Grand) 고등학교>에도 다녔는데, 그러던 1816년 7월 10일의 시(詩) 습작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고 한다.

 <샤토브리앙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다>

 

 


<샤토브리앙>

 

 

 그리고 그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1768년 9월 4일부터 1848년 7월 4일)>은 이미 여러 번 소개가 되었지만, 어쨌든 <프랑스 빈체제(體制-Vienna system, Vienna Settlement. 나폴레옹에서 이미 자세히 소개가 되었으며, 그리고 내용이 너무 길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함)> 하에서의 정치가였고, 작가였다.

 그리고 또, 그의 어머니는 일찍부터 그의 문학적(文學的)인 재능을 인정해서 그가 문학으로 성공하기를 바랐지만, 그러나 그의 어렸을 때 소꿉친구였고, 나중에 애인이 되었던 <아데르(Ade`le Foucher)>와의 결혼은 맹(猛) 반대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의 어머니도 1821년 6월 27일에 세상을 떠났고, 그러자 그는 열렬한 사랑으로 그 <아데르>와 결혼했으며, 그러자 또 그 후였던 1823년 7월 16일에 장남(長男-Le'opold)이 태어났다. 하지만 또 그해 10월 9일에 사망했으며, 그리고 또 1824년 8월 28일에는 장녀(長女-Le'opoldine)가 태어났다. 그리고 1825년 4월 29일, 그는 23세라는 어린 나이에 벌써 <레지옹 도뇌르 훈장(勳章)-프랑스최고훈장>을 받았고, 그해 5월 29일에는 <랭스(Reims-프랑스북부)>에서 열렸던 <샤를10세>의 성별식(聖別式)에도 참석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그동안 소원(疏遠)했던 아버지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래서 그 아버지를 위해서 <나폴레옹>을 찬양하는 시(詩)를 쓰기도 했는데, 그런데 또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나폴레옹>을 더욱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존경까지 하게 되었고, 그리고 또 그 성별식(聖別式)에서 들었던 것을 계기로 해서 <셰익스피어>도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였던 1826년 11월 2일에는 차남(次男-Charles)이 태어났고, 창작열(創作熱)이 가속화되고 있었던 1828년 1월 28일에는 그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또 그해 10월 31일에는 3남(Franc,ois--Victor)이 태어났는데, 그런데 그 아이는 그의 재능을 이어받았던 아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7월 혁명이 한창 중이었던 1830년 7월 28일에는 차녀(次女-Ade`le)가 탄생했다. 그 후 <에르나니(Hernani-Hernani, ou l'Honneur Castillan-drama)>의 대성공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 그는 많은 돈을 벌게 되자, 1832년 10월 8일에 살던 집을 떠나서 <로얄광장((Royal 廣場-현재의 place des Vosges)>에 있었던 붉은색기와의 호화저택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또 그 즈음에 아내 <아데르>가 자신의 친구였던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Charles Augustin Sainte-Beuve-1804년 12월 23일부터 1869년 10월 13일. 19세기 프랑스의 비평가, 근대비평의 아버지라고 불렸음)>와 불륜(不倫)에 빠졌기 때문에 그는 그런 슬픔을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는 8월 말경에 <생트뵈브>와 교제를 끊었고, 그러자 또 그 다음해 <상트뵈브>가 그의 작품 <황혼의 노래(Les Chants du crépuscule. 1835>를 혹평하자, 그것으로 결렬(決裂)은 결정적(決定的)이 되었다.

 

 


<생트뵈브>

 


 그리고 그 역시도, 31세 직전의 <참회화요일(Mardi gras-프랑스어로는 肥沃한 火曜日)> 또는 1833년 2월 19일 밤에 <쥬리에트(Juliette Drouet-1806년부터 1883년. 프랑스의 배우)>란 여배우의 애인이 되었는데, 그날은 그의 작품 <레미제라블>에서 <마리우스(Marius)>와 <코제트(Cosette)>가 결혼을 하는 날이었다.(2월 16일이 아닌, 19일임)

 

 


<쥬리에트>

 

 하지만, 그 후에도 그에게는 불행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그래서 또 <아카데미프랑세즈(l'Académie française-프랑스의 국립학술단체)>에 두 번이나 낙선(落選)했었다거나(1836년 2월 18일과 12월 29일), 아내 <아데르>와의 문제로 발광(發狂)했던 둘째 형이 정신병원에서 자살을 했다거나(1837년 3월 5일) 했었지만, 그러나 또 그 사이에 희곡(戱曲)과 시(詩)를 쓰면서 각지(各地)를 여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1837년에는 <루이필리프 1세(Louis-Philippe Ier)>의 장남(長男-Ferdinand Philippe d'Orléans) 결혼식에 초대되기도 했고, 38세(1840년 1월) 때에는 문예가협회장(文藝家協會長)이 되었지만, 그러나 또 동년(同年) 2월 20일에는 다시 <아카데미프랑세즈>에 낙선했다. 하지만 또 그 다음해 1월 7일에는 그렇게 열망했던 <아카데미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고, 41세의 생일을 바로 앞두고는 장녀(長女)의 결혼도 목도(目睹)했다.


 하지만 또 그해 9월 4일, 그녀는 남편(Charles Vacquerie)과 함께 19세의 어린 나이로 <센 강>에서 사고로 익사(溺死)했으며, 그러자 또 그 5일 후였던 9월 9일에 그는 애인 <쥬리에트>와 함께 했던 여행 중에, 그 비보(悲報)를 접하고 9월 12일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그에게 아주 큰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또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대단한 정력가(精力家)였기 때문에, 그 사이에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런데 1845년 7월 5일에는 화가(畵家)였던 <오귀스트 비야르(Auguste Biard)>의 아내(Le'onie Biard)와 간통(姦通)을 하던 현장이 경찰에 발각되었다. 그러자 그는 귀족원(貴族院)의원의 불가침권(不可侵權)을 이용해서 곧 풀려났지만, 하지만 그녀는 당시의 법률에 의해서 감옥으로 보내졌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그는 다른 의원(議員)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그러자 또 그를 아꼈던 <루이필리프>가 화가(畵家) <비야르>에게 <베르사유궁전>의 벽화(壁畵)를 그리는 일거리를 주어서 달랬다. 그러자 결국 그녀는 수도원(修道院)에서 몇 달간 근신(謹身)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고, 그 후(同年 8월 14일)에 <비야르> 부부의 별거(別居)판결이 내려지자, 그는 그때부터 그녀의 생활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로도 오랫동안 두 사람은 사랑을 계속했고, 그러자 또 그 때문에 <쥬리에트>의 상심(傷心)도 깊어졌다.

 그래서 또 그런 이유들로 해서, 그는 1843년부터 1852년까지 약 10년간, 단 한편의 작품도 출판하지 못했는데, 하지만 그 후에 그는 프랑스문학사상(史上) 굴지(屈指)의 명작(名作)이라고 불려졌던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不幸한 사람들. 원래는 Les Mise'res(가난한 사람들)>의 집필을 시작했고(1845년 11월 17일), 그 이유에 대해서는 또 제설(諸說)이 있지만, 어쨌든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이 어렸을 때 목격했던 <기요틴(guillotine-단두대처형)>에 대한 기억이 그 글을 쓰게 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튼 또 그는, 1845년 4월 13일에, 자신의 지지자 중 한사람이었던 <오를레앙 공작(公爵-Ferdinand Philippe d'Orléan-1810년 9월 3일부터 1842년 6월 13일) 부인(夫人-Helene Luise Elisabeth zu Mecklenburg-1814년 1월 24일부터 1858년 5월 17일)>의 후원(後援)으로 <루이필리프>로부터 자작(子爵)의 위(位)를 받았고, 그러자 귀족(貴族)이 되었던 그는 정치활동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또 1948년 2월에 혁명(2월혁명)이 발발했고, 그러자 <루이필리프>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참고: 1848년 혁명 또는 2월혁명은, 1848년에 유럽 각지(各地)에서 일어났던 혁명이었으며, 그것으로 <빈 체제>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그리고 특히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그 2월혁명은, 다음 달 유럽 각지(各地)로 전파되어서 3월혁명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그 2월혁명과 3월혁명을 아울러서 <제(諸)국민(國民)의 봄(春)-Printemps des peuples, Völkerfrühling, Primavera dei popoli)>이라고도 부르는데, 그러나 더욱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함.

 

 


<헬레네 또는 에레느>

 



 아무튼, 그러자 그는 <오를레앙 공(公)>의 유아(遺兒)였고 <루이필리프>의 적손(嫡孫)이었던 <파리 백(伯-comte de Paris) Louis Philippe Albert d'Orléans-1838년 8월 24일부터 1894년 9월 8일>을 어떻게든 즉위(卽位)시켜보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그러자 프랑스는 <제2공화정(共和政)>으로 이행되었다.

 

 


<파리 백>

 

 

 그러자 또 그는 동년(同年) 6월에 입헌의회(立憲議會)의 보궐선거(補闕選擧)에 입후보했고, 그 결과 보수파의 지지를 받아서 당선했다. 그러자 또 그는 정치가로서 1930년대부터 계속해서 사형폐지운동을 벌였으며, 교육의 개혁과 사회복지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1848년에는 공화파(共和派)가 되어서, 그해 12월 10일에 치러졌던 대통령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Charles Louis-Napoléon Bonaparte)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을 지지했지만, 그러나 또 그 후에 <루이 나폴레옹>이 독재(獨裁)를 시작하자 오히려 강력한 반대자로 돌변했다. 그러자 또 그 <루이>는 1851년 12월 2일에 쿠데타를 일으켜서 독재(獨裁)체제를 수립(樹立)했고, 이어서 반대파의 탄압에 들어갔다. 그러자 그 역시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그러자 또 그는 그 12월 11일에 <벨기에>로 망명을 떠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약 19년 동안 망명생활이 이어졌다.

 

 

 


<루이 나폴레옹>

 


 그 후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로 갔던 그는, 그 즉시 <루이>의 비판을 개시했고, 그리하여 1852년 8월에는 <루이>를 탄핵(彈劾)했던 <어린 나폴레옹(Napole'on le Petit)>을 출판했던 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때부터 왕성한 집필을 시작했다. 하지만 또 그 <어린 나폴레옹>의 인기에 의해서 <루이>의 압력이 <벨기에>로 전해질 것을 염려했던 그는 <영국(英國)> 령(領) <채널제도(諸島-Channel Islands)>의 <저지 섬(Bailiwick of Jersey)>으로 이주해서 1855년까지 머물렀다.

 

 

<채널제도-노르망디 부근>

 

 

 그리고 또, 그러던 중이었던 1853년에는 계속해서 <루이>를 탄핵하는 <징벌시집(懲罰詩集-Les Cha^timents)>을 발표했으며, 1855년에는 옆의 섬 <건지(Bailiwick of Guernsey)>로 이주했고, 그리고는 1870년에 <프랑스>로 다시 귀환했을 때까지 약 15년간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또, 그 사이였던 1856년에는 <정관(靜觀) 또는 명상(冥想) 시집(詩集)-Les Contemplations>을, 그리고 1859년에는 <제(諸)세기(世紀)의 전설(傳說) 1부(部)-La Le'gende des sie`cles>를, 그리고 또 1862년에는 그동안 중단했던 <레미제라블>을 완성해서 <벨기에>에서 출판했는데, 그러자 아주 큰 반응을 받았다. 그리고 또 당시의 에피소드로, 그는 <레미제라블>에 대한 반응이 궁금해서 출판사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였다고 하고, 그러자 또 출판사에서는 "!"라고 답장을 보냈다는데, 그 뜻은 <아주 좋다>는 뜻이었다고 하며, 그래서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내용의 편지가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였던 1870년에 발발했던 <프랑스와 프로이센왕국의 전쟁(Guerre franco-allemande de 1870)>에서 <프랑스>가 대패(大敗)했고, 그러자 <프로이센왕국>의 포로가 되었던 <나폴레옹 3세>는 실각(失脚)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귀국해서 영웅적(英雄的)인 대접을 받았으며, 그 후였던 1877년에는 <제세기의 전설 2부>를 발표했던 등, 활발한 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1885년 5월 22일 <파리>에서 그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유명했던 작품들 중에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노트르담의 꼽추(Notre-Dame de Paris-1831년)> 등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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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리들>

 

너의 이파리들이 가늘게 떠는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말자

이파리에게 탈피의 시간이 필요하다

 

세상에 넘쳐나는 이파리들

그것에는 모두 기호들이 있다

바코드처럼 고유번호가 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기만 한 이파리들

한여름 뜨거운 한낮, 이파리들의 환호성

그것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다

 

하지만 가을과 겨울

이파리들은 운명을 달리한다

그 아픔과 상실감은 봄까지 이어진다

 

그러므로 화려한 여름을 마음껏 즐겨라

할 일이 없어도 관심을 가지고 보라

그저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이파리들의 몸짓들

 

나의 이파리는 아직 없다

어쩌면 아주 옛날에 져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도 이파리를 가질 수 없는지도 모른다

 

이파리들이 손을 흔들 때는 같이 흔들어주자

예쁜 웃음을 지을 때면 같이 웃어주자

그 아름다운 때는 얼마 가지 못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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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의 어느 날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름날.

   지금 밖은 더없이 고요하고

   꽃향기와 아름다운 새소리는

   평온한 하루의 저녁을 축복하고 있다.

   아, 지금은 여름의 절정.

   가득 찬 그의 술잔 너머로

   노을이 붉게 타고 있다.

   그와 함께 보내는 마지막 밤.

   금빛 샘물을 가득 부어 잔을 채우고

   이 저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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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세상에 <더러운 돈>은 없다고 한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고 한다

 

그래도 손이 내밀어지지 않는 돈은 있다

그래도 머리 숙여지지 않는 돈은 있다

 

돈은 적힌 액수만큼의 효과를 낸다

그렇지 않은 것도 얼마든지 있다

 

면상에 뿌려지는 돈을 받는 기분은

바닥에 떨어진 젖은 돈을 줍는 기분은

 

돈은 정당한 노력의 대가로 받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런 돈은 어디 도망도 잘 가질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갔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주인을 떠나면 돈은 얼굴을 바꾸기 때문이다

 

제발 돈에 인생을 걸지 말라

자기 인생에 충실하면 돈이 따라온다

 

분에 넘치는 돈은 이미 돈이 아니다

돈이 아닌 자기의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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