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청백리(淸白吏)의 땅>을 더럽히고자...


 

창녕은 예로부터 한반도에서 아주 중요한 도시였다. 그러나 지형적인 이유 등으로 외면을 당했던 후에 지금까지도 외지의 느낌을 받고 있는 고장이다. 그런데 앞의 <홍준표>란 자()에 이어서 이번에는 <박원순>이란 자()가 그 땅을 더럽히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인생이 마감을 하면서 바랄 수 있는 작은 희망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땅은 그들이 자신들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이용만 한 것보다 훨씬 거룩한 땅이란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그런 짓을 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옳았다. 그러므로 결국 그들은 그 좋은 땅에서 나서 입신양명했지만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청백리>로 이름을 드높이셨던 <조식(南溟曺植) 선생님>께서 혼을 닦으시고 정신을 맑게 하셨던 곳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 땅의 영험이 <기를 자><죽일 자>를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또 우리가 잘 아는 <허유와 소부>의 고사에서도 잘 알 수가 있다. 그럼에도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을까? 그렇게 죽었다면 그저 한 줌의 흙으로 아무 곳에서나 흩여져서 사라져버리면 그만이었을 것을, 굳이 그것도 그렇게 성스러운 땅을 더럽히려 한 발상은 그 자()가 끝까지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者란 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그 아버지의 그 딸(박다인)이라고, 최소한의 상식도 모르고 그런 것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마이크 앞에 선 딸을 보았을 때, 평소 그 자()의 가정교육이란 것도 엿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자(者)는 <남의 귀한 딸>을 함부로 대하고, 정신병자적인 모습으로 악마근성을 보여주었던 것도 모자라서, 참으로 죽어서까지 <뻔뻔스러운 인간>이란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그는 유서에서 <저 때문에 고통당하신 그 여성에게 죽음으로 사죄하며, 그리하여 저승에 가서도 잘못을 빌고 또 빌 것이니 부디 슬픔을 거두소서...>라는 글만 썼어도 이 아름다운 나라의 국민들은 그렇게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애매하게 의미도 없는 말을 끼적거려놓고 죽어버리는 무책임함을 보였으며, 그것으로 영원히 그의 죄는 사해지지 않았고, 그렇게 해서 그는 영원히 <더러운 시장(市長)>이란 오명을 스스로 만들고 죽은 사람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래서 그 <청백리의 땅>을 더럽히려는 그의 <찌꺼기>를 과연 <창녕 사람들>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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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斷罪>


 

 

<단죄>를 사전에 찾아보면 <죄를 처단함>이라고 나와 있다. ,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해서 처단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과연 같은 사람을 처단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 인간은 하나의 동물일 뿐이며, 그래서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므로 실수나 잘못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베이스로 깔고 나타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위 <처단 또는 단죄> 같은 말에는 여러 가지의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고, 그래서 결국 이것도 인간의 불완전함만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인간불완전필연설>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고, 또 어떤 이는 <그 죄는 바로 인간이 지은 것이므로 그 인간을 처단해야 한다><인간범죄(犯罪)결정론>을 강조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 + <>의 형태일 수는 있어도, 결국 <인간이 죄를 짓는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전자를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단죄>하더라도 그 행위자인 <인간을 처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을 놓는 자들은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국면을 전환시켜볼 목적으로 왈가왈부하게 되는데, 그야 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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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Love does not consist in gazing at each other, but in looking together in the same direction.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앙투안 마리 장 바티스트 로제 드 생텍쥐페리(Saint-Exupéry, Antoine de=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comte de Saint-Exupéry 또는 Antoine, Jean-Baptiste, Marie, Roger de Saint-Exupéry -1900년 6월 29일부터 1944년 7월 31일)

 생텍쥐페리는 그의 성(姓)이었으며, 프랑스의 작가(作家), 조종사(操縱士)였고, 우편수송을 위해서 유럽과 남미(南美) 사이의 비행항로 개척에도 힘썼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왕자-Le Petit Prince> 등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의 리옹(Lyon-프랑스 남동부)에서 태어났으며, 예수회(會-Societas Iesu. 크리스트교와 가톨릭교회의 男子修道會)의 노트르담 드 생 크로(Notre-Dame de Sainte Croix)학교를 거쳐서<또는 1909년 10월 7일에 입학했던, 父親(Jean de Saint-Exupéry)의 母校, 聖十字聖母學院 또는 학교>, 스위스의 프라이부르크<Freiburg-스위스의 북동쪽, 독일 슈바르츠발트(Black Forest) 서쪽의 도시)>에 있었던 성(聖) 요한(St.John-마리아 修道會) 학교에서 문학(文學)을 배웠다.(1915년 1월부터)

 그 후, 그는 해군(海軍)에 입대하기를 원했지만 2번이나 낙방했고, 그러자 또 그는 1921년 4월 9일에 자원(自願)을 해서 군(軍)에 입대했다. 그리고는 육군비행연대(陸軍飛行聯隊)에 소속된 후, 군용기(軍用機) 조종사(操縱士-士官)가 되었다.

 그 후, 퇴역(退役)해서 자동차 판매원 등의 일을 했지만, 다시 민간항공(民間航空) 업체에 들어가서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1926년에 그는 26세의 나이로 본격적인 작가(作家)의 길로 들어섰으며, 과작(寡作) 후에 자신의 비행사(飛行士)로서의 경험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했다.<南方郵便機(Courrier Sud-1929년 6월, 夜間飛行(Vol de Nuit-1931년 10월 등)>

 

 그러자 그는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의 작품은 세계인들에게 읽히게 되었지만, 그러나 같은 비행사들 사이에서는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또 그를 좋아했던 독일인들 중에서는 <나중에 적(敵)으로 싸우게 되었을 때, 그가 소속되었던 부대와는 싸우지 말자>고 했던 사람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1939년 9월 4일에 세계 제2차 대전에 소집되었고, 툴루즈(toulouse-프랑스 남서부)에서 비행교관 직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전선(前線)으로 보내줄 것을 희망했고, 그리하여 주위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그 희망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정작 그 전선(前線)에서 그를 거부했고, 그러자 결국 그는 1939년 11월 9일에 샹파뉴(champagne-파리의 동쪽) 지방의 <오르콘트>라는 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정찰대(偵察隊-II/33 部隊)에 배속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부대(部隊)는 큰 피해를 받아서 알제리(Algeria)까지 후퇴했지만, 그러나 또 그 후에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그는 동원해제(動員解除)되어서 프랑스로 돌아왔고, 그 후에 미국(美國)으로 망명했다.(1940년 12월 21일 리스본출항, 12월 31일 뉴욕도착)

 하지만 그 후에 그는 다시 지원(志願)을 해서 북아프리카에 있었던 원(元) 부대(部隊)에 복귀했고(1943년 6월), 이어서 신예기(新銳機)의 훈련을 받은 후 실전(實戰) 배치되었지만, 그러나 또 금방 착륙실패로 인한 기체(機體)의 손상사고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해 8월에 비행금지처분을 받았고, 그것으로 사실상 제대(除隊) 당했다.

 

 하지만 또 그는 지인(知人) 등을 통한 필사적(必死的)인 노력을 해서 다시 복귀했지만, 그러나 또 폭격기조종사로서 I/22부대(部隊)에 배치되었던 명령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르디니아(sardinia-지중해 Corsica섬의 남쪽에 있는 이탈리아령의 큰 섬)에 있었던 알게로(Alghero Airport-Fertilia Airport) 기지(基地)로 간 후, 본대(本隊)였던 II/33부대(部隊)에 1944년 5월에 몰래 숨어들어갔다. 그러자 부대는 그 후에 코르시카(corsica-나폴레옹의 출생지) 섬으로 진출(進出)했다.

 그리고 1944년 7월 31일, 프랑스 동남부의 그르노블(Grenoble-프랑스 남동부 Isère 현의 주요도시) 등(Chambéry, Annecy)을 사진(寫眞)정찰하기 위해서 록히드(Lockheed) F-5B(P-38 偵察機型)를 타고 볼로냐공항(Bologna Guglielmo Marconi Airport-이탈리아 북동부)을 단기(單機)로 출격(出擊)한 후, 지중해(地中海) 상공(上空)에서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완전히 행방불명되었지만, 그러나 또 1988년 9월 7일에 자신의 이름과 아내의 이름(Consuelo) 그리고 연락처(c/o-뉴욕의 Reynal & Hitchcock출판사)와 소재지(所在地-1943년에 어린왕자를 처음 출판했던 발행처) 등이 새겨져 있었던 브레이스릿(bracelet-팔찌 등)으로 보였던 은제품(銀製品)이 트롤(trawl) 선(船)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우여곡절을 겪었던 후에 그가 타고 갔던 비행기의 잔해도 발견되었으며, 그리고 또 2008년 3월 15일에는 프로방스(provence) 지방지(地方紙)에 당시 Bf109의 파일럿이었다던 사람(Horst Rippert)이, 자신이 그의 정찰기를 추격했다는 증언(證言)의 기사(記事)가 공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저도 그 분 작품의 애독자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제가 추격시켰던 그 조종사가 제발 그가 아니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정말이지 만약에 그때 내가 그였던 줄 알았더라면, 그런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의 많았던 작품들 중에서 잘 알려진 것들 중 몇이다.

 동방우편기(南方郵便機-Courrier Sud. 1929년 6월)

 야간비행(夜間飛行-Vol de Nuit. 1931년 10월)

 인간의 대지(大地) 또는 땅(Terre des Hommes. 1939년 3월)

 싸우는 조종사(操縱士-Pilot de Guerre. 1942년)
 어린왕자(Lettre à un Otage. 1943년 2월 또는 6월)
 그리고 사후(死後)에 편집되어 출판된 것으로, 성채(城砦-Citadelle. 1948년, 未完)

 등이 있었고, 지금도 그는 세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 중 한명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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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이런 글을 쓰지 않기로 했던 것이 벌써 1년이 넘었다.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썼지만, 특히 <전라도인(?)>들의 많은 항의와 공격을 받고 쓰기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작금의 시대 상황이 또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 같아서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그러므로 보기에 불편하신 분들은 처음부터 보지 말기를 바라며, 특히 <전라도인>들과 <문재인 정부 옹호자>들은 절대로 보지 말기를 바란다.

 


 

<바보들의 행진...>

    

이번 일을 보고 참으로 안타깝게 느끼는 것은 <인간은 절대로 진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체된 물이 바로 인간이란 이야기다. 옛날 프랑스혁명 같은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유행이었을 뿐이었다. 그 외의 수많은 전쟁들은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증명하는 짓>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 한 <멍청한 인간>이 또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그의 죄는 몇 가지나 되기 때문에 여기서 밝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의 <안희정>이라거나, <조국>, <오거돈> 같은 <덜떨어진 인간들>을 보고서도 그런 전철을 밟았고, 더욱이 <노무현>처럼 제 마누라 지키기 위해서 자살을 한 것 같이, 자신의 나약함과 비겁함을 표현하기 위해 자살을 <해버렸다>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움이 많다. 하지만 지금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다만 밝혀지지만 않았을 뿐이지 잠재적으로 땅 밑에서 기고 있는 그런 지렁이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이 이 나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제발 남자들, 특히 <가진 남자>들은 정신을 차리길 바란다. <겨우 여자 하나>가 아니라, 동서고금의 진리인 <남자가 조심해야 할 것>들 중의 그런 몇 가지 때문에 자기 목에 칼을 꽂는 짓은 부디 하지 말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그런데 더 문제는, 그런 추악하고 비겁한 인간이 죽었는데, 이 나라의 소위 <좀 있다는 인간>들이 줄을 서서 조문을 했다는데 정말 경악했다. <이 나라의 희망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바보들이 점령하고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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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婦人)들도 국민 중의 한 분자(分子)입니다!>

 

                                 

                                                                  

 


 <남자가 하는 일을 여자라고 왜 못하나? 조선 사람이 조선의 독립 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김마리아(金瑪利亞. 光山 김씨. 1891년6월18일부터 1944년 3월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였고, 그 모진 일제(日帝) 하에서 여성운동을 주동했던 분이었다. 그래서 <애국부인회장>과 <상하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 등을 지냈으며, 본명은 김진상(金眞常) 또는 김근포(金槿圃)로도 불렸다. 그리고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김순애(金淳愛. 1889년6월10일부터 1976년5월17일.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회운동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함)>도 친척이었으며, 그런 것을 보아서도 소위 <집안 내력> 또는 <뼈대 있는 가문>이란 것이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래서 또 여기서 한 위대한 <여성독립운동가> 한 분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김순애 20세경>


 

 김마리아 선생은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으로, 아버지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는 김몽은(金蒙恩) 사이에서 세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학자였으며, 서상륜(徐相崙-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운 인물.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함)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김마리아는 1895년에 아버지가 세운 <소래초등학교>에 입학해서 4년만에 졸업했다.

 선생의 집안은 원래 서울의 명문양반가문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했다. 그래서 선생의 아버지 김윤방은 생전에 많은 사업을 할 수 있었으며, 친척들도 모두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선생도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성장했다. 그리고 참고로 선생의 셋째 삼촌 김필순(金弼淳)은 <안창호>와 <신민회원>으로 활동했고, 한국최초의 의사가 되어서 만주 등지에서 <한인촌>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셋째 고모 김순애(金淳愛)는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의 부인이었으며, 역시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둘째 고모부 서병호(徐丙浩)는 <신한청년당>과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한국 YWCA>의 창설자이며, 민족교육자였던 <김필례>도 넷째 고모였다.

 그렇듯 애국지사의 가문에서 성장했던 선생은 그러나 조실부모(早失父母)한 후에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서 서울로 올라가 1906년에 이화학당에 입학했다가 다시 학교를 옮겨서 1910년에 연동여학교(지금의 정신여자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 후에 광주의 <수피아여학교-당시 큰언니 김함라(金函羅)가 교사로 있었다>에서 교사를 지낸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1918년에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가담했으며, 1928년에는 <2·8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그 후, 선생은 <조국광복을 위해서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졸업을 포기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귀국했고 <3·1운동 사전준비운동>에 진력했다. 그러나 모교(母校)에서 체포된 후(3월5일) 모진 고문을 받았다.

 

<수감 때의 모습>

 

 그 후, 석방된 선생은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여성항일운동>에 힘썼으며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다시 체포되었고, 그때 선생은 <조선인이 조선을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라든가 <나는 일본의 연호 같은 것은 모른다!>는 등, 확고한 자주독립의 의지를 피력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도 남자들도 쉽지 않았던 것으로, 그런 것으로도 선생의 위대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후, 병보석으로 풀려난 선생은(1920년 5월 22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고, 그 후에 조선을 탈출해서 상해로 망명했다. 그리고 <상해애국부인회> 간부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몸이 조금 완쾌되자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했고, 1923년 6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1924년 9월에 <파크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

<1923년 파크대학 졸업 관련 사진>

 그 후였던 1928년에 선생은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30년에는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지인이었던 <황에스터(황애덕)>와 <박인덕(朴仁德)> 등을 만났으며 <근화회(槿花會: 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해서 회장으로 추대된 후, 일제(日帝)의 악랄한 식민정책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데 힘썼다.

 그리고 1933년(또는 1932년 7월)에 귀국한 후 원산으로 가서 기독교 전도와 신학 발전에 기여하였는데, 그것은 일제의 감시와 압박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그곳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강연을 하였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나름대로 일제(日帝)에 항거했지만, 결국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평양기독병원에서 순국하셨다. 그런데 그때가 광복을 거의 1년 앞 둔 시점이어서 그 안타까움은 더했고,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와 같이 선생은 확고한 민족 정신을 가진 분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노력하셨던 분이었다. 그리고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었던 상황에서도 결혼도 하지 못하고 처녀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뒷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유관순 열사>와 당시에 日帝에 의해 고문을 당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선생도 <추악하고 더러운 왜놈>들에 의해서 고문을 당하면서 <한 쪽 가슴을 잃어야> 했고 <여성의 상징을 인두로 지짐 당하는> 천하가 공노할 고문을 당했던 수치심에 스스로 여성으로서 떳떳함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을 생각해서도 <한국인이라면> 저 <일본놈>들을 <왜놈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을 공감할 것으로 생각하고, 저 <강도에다, 저질의 족속이며, 천박한 난쟁이>들을 영원히 증오하는 것이 마땅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이 땅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친일(親日) 쓰레기>들은 모두 불에 태워서 소각시켜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반성은 커녕 오히려 이 나라를 다시 손아귀에 넣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저 <더러운 강도 왜놈들>을 보면서 가슴 깊이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너무도 <소박한 원함><가장 최소한의 우리의 자존감>을 위한 것으로, 다시 그 <인간 말종>들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짐승들>의 손에 의해 온갖 <욕보임>을 다시 당하지 않기 위함인 것이다. 그래서 <안창호 선생>은 생전에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10명만 있었더라면 한국은 벌써 독립이 되었을 것!>이란 말을 남겼다고 하고, 그리하여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라는 선생의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져서, 우리 후손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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