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Love does not consist in gazing at each other, but in looking together in the same direction.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앙투안 마리 장 바티스트 로제 드 생텍쥐페리(Saint-Exupéry, Antoine de=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comte de Saint-Exupéry 또는 Antoine, Jean-Baptiste, Marie, Roger de Saint-Exupéry -1900년 6월 29일부터 1944년 7월 31일)

 생텍쥐페리는 그의 성(姓)이었으며, 프랑스의 작가(作家), 조종사(操縱士)였고, 우편수송을 위해서 유럽과 남미(南美) 사이의 비행항로 개척에도 힘썼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왕자-Le Petit Prince> 등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의 리옹(Lyon-프랑스 남동부)에서 태어났으며, 예수회(會-Societas Iesu. 크리스트교와 가톨릭교회의 男子修道會)의 노트르담 드 생 크로(Notre-Dame de Sainte Croix)학교를 거쳐서<또는 1909년 10월 7일에 입학했던, 父親(Jean de Saint-Exupéry)의 母校, 聖十字聖母學院 또는 학교>, 스위스의 프라이부르크<Freiburg-스위스의 북동쪽, 독일 슈바르츠발트(Black Forest) 서쪽의 도시)>에 있었던 성(聖) 요한(St.John-마리아 修道會) 학교에서 문학(文學)을 배웠다.(1915년 1월부터)

 그 후, 그는 해군(海軍)에 입대하기를 원했지만 2번이나 낙방했고, 그러자 또 그는 1921년 4월 9일에 자원(自願)을 해서 군(軍)에 입대했다. 그리고는 육군비행연대(陸軍飛行聯隊)에 소속된 후, 군용기(軍用機) 조종사(操縱士-士官)가 되었다.

 그 후, 퇴역(退役)해서 자동차 판매원 등의 일을 했지만, 다시 민간항공(民間航空) 업체에 들어가서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1926년에 그는 26세의 나이로 본격적인 작가(作家)의 길로 들어섰으며, 과작(寡作) 후에 자신의 비행사(飛行士)로서의 경험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했다.<南方郵便機(Courrier Sud-1929년 6월, 夜間飛行(Vol de Nuit-1931년 10월 등)>

 

 그러자 그는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의 작품은 세계인들에게 읽히게 되었지만, 그러나 같은 비행사들 사이에서는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또 그를 좋아했던 독일인들 중에서는 <나중에 적(敵)으로 싸우게 되었을 때, 그가 소속되었던 부대와는 싸우지 말자>고 했던 사람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1939년 9월 4일에 세계 제2차 대전에 소집되었고, 툴루즈(toulouse-프랑스 남서부)에서 비행교관 직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전선(前線)으로 보내줄 것을 희망했고, 그리하여 주위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그 희망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정작 그 전선(前線)에서 그를 거부했고, 그러자 결국 그는 1939년 11월 9일에 샹파뉴(champagne-파리의 동쪽) 지방의 <오르콘트>라는 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정찰대(偵察隊-II/33 部隊)에 배속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부대(部隊)는 큰 피해를 받아서 알제리(Algeria)까지 후퇴했지만, 그러나 또 그 후에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그는 동원해제(動員解除)되어서 프랑스로 돌아왔고, 그 후에 미국(美國)으로 망명했다.(1940년 12월 21일 리스본출항, 12월 31일 뉴욕도착)

 하지만 그 후에 그는 다시 지원(志願)을 해서 북아프리카에 있었던 원(元) 부대(部隊)에 복귀했고(1943년 6월), 이어서 신예기(新銳機)의 훈련을 받은 후 실전(實戰) 배치되었지만, 그러나 또 금방 착륙실패로 인한 기체(機體)의 손상사고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해 8월에 비행금지처분을 받았고, 그것으로 사실상 제대(除隊) 당했다.

 

 하지만 또 그는 지인(知人) 등을 통한 필사적(必死的)인 노력을 해서 다시 복귀했지만, 그러나 또 폭격기조종사로서 I/22부대(部隊)에 배치되었던 명령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르디니아(sardinia-지중해 Corsica섬의 남쪽에 있는 이탈리아령의 큰 섬)에 있었던 알게로(Alghero Airport-Fertilia Airport) 기지(基地)로 간 후, 본대(本隊)였던 II/33부대(部隊)에 1944년 5월에 몰래 숨어들어갔다. 그러자 부대는 그 후에 코르시카(corsica-나폴레옹의 출생지) 섬으로 진출(進出)했다.

 그리고 1944년 7월 31일, 프랑스 동남부의 그르노블(Grenoble-프랑스 남동부 Isère 현의 주요도시) 등(Chambéry, Annecy)을 사진(寫眞)정찰하기 위해서 록히드(Lockheed) F-5B(P-38 偵察機型)를 타고 볼로냐공항(Bologna Guglielmo Marconi Airport-이탈리아 북동부)을 단기(單機)로 출격(出擊)한 후, 지중해(地中海) 상공(上空)에서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완전히 행방불명되었지만, 그러나 또 1988년 9월 7일에 자신의 이름과 아내의 이름(Consuelo) 그리고 연락처(c/o-뉴욕의 Reynal & Hitchcock출판사)와 소재지(所在地-1943년에 어린왕자를 처음 출판했던 발행처) 등이 새겨져 있었던 브레이스릿(bracelet-팔찌 등)으로 보였던 은제품(銀製品)이 트롤(trawl) 선(船)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우여곡절을 겪었던 후에 그가 타고 갔던 비행기의 잔해도 발견되었으며, 그리고 또 2008년 3월 15일에는 프로방스(provence) 지방지(地方紙)에 당시 Bf109의 파일럿이었다던 사람(Horst Rippert)이, 자신이 그의 정찰기를 추격했다는 증언(證言)의 기사(記事)가 공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저도 그 분 작품의 애독자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제가 추격시켰던 그 조종사가 제발 그가 아니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정말이지 만약에 그때 내가 그였던 줄 알았더라면, 그런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의 많았던 작품들 중에서 잘 알려진 것들 중 몇이다.

 동방우편기(南方郵便機-Courrier Sud. 1929년 6월)

 야간비행(夜間飛行-Vol de Nuit. 1931년 10월)

 인간의 대지(大地) 또는 땅(Terre des Hommes. 1939년 3월)

 싸우는 조종사(操縱士-Pilot de Guerre. 1942년)
 어린왕자(Lettre à un Otage. 1943년 2월 또는 6월)
 그리고 사후(死後)에 편집되어 출판된 것으로, 성채(城砦-Citadelle. 1948년, 未完)

 등이 있었고, 지금도 그는 세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 중 한명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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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婦人)들도 국민 중의 한 분자(分子)입니다!>

 

                                 

                                                                  

 


 <남자가 하는 일을 여자라고 왜 못하나? 조선 사람이 조선의 독립 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김마리아(金瑪利亞. 光山 김씨. 1891년6월18일부터 1944년 3월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였고, 그 모진 일제(日帝) 하에서 여성운동을 주동했던 분이었다. 그래서 <애국부인회장>과 <상하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 등을 지냈으며, 본명은 김진상(金眞常) 또는 김근포(金槿圃)로도 불렸다. 그리고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김순애(金淳愛. 1889년6월10일부터 1976년5월17일.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회운동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함)>도 친척이었으며, 그런 것을 보아서도 소위 <집안 내력> 또는 <뼈대 있는 가문>이란 것이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래서 또 여기서 한 위대한 <여성독립운동가> 한 분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김순애 20세경>


 

 김마리아 선생은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으로, 아버지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는 김몽은(金蒙恩) 사이에서 세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학자였으며, 서상륜(徐相崙-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운 인물.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함)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김마리아는 1895년에 아버지가 세운 <소래초등학교>에 입학해서 4년만에 졸업했다.

 선생의 집안은 원래 서울의 명문양반가문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했다. 그래서 선생의 아버지 김윤방은 생전에 많은 사업을 할 수 있었으며, 친척들도 모두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선생도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성장했다. 그리고 참고로 선생의 셋째 삼촌 김필순(金弼淳)은 <안창호>와 <신민회원>으로 활동했고, 한국최초의 의사가 되어서 만주 등지에서 <한인촌>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셋째 고모 김순애(金淳愛)는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의 부인이었으며, 역시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둘째 고모부 서병호(徐丙浩)는 <신한청년당>과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한국 YWCA>의 창설자이며, 민족교육자였던 <김필례>도 넷째 고모였다.

 그렇듯 애국지사의 가문에서 성장했던 선생은 그러나 조실부모(早失父母)한 후에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서 서울로 올라가 1906년에 이화학당에 입학했다가 다시 학교를 옮겨서 1910년에 연동여학교(지금의 정신여자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 후에 광주의 <수피아여학교-당시 큰언니 김함라(金函羅)가 교사로 있었다>에서 교사를 지낸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1918년에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가담했으며, 1928년에는 <2·8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그 후, 선생은 <조국광복을 위해서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졸업을 포기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귀국했고 <3·1운동 사전준비운동>에 진력했다. 그러나 모교(母校)에서 체포된 후(3월5일) 모진 고문을 받았다.

 

<수감 때의 모습>

 

 그 후, 석방된 선생은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여성항일운동>에 힘썼으며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다시 체포되었고, 그때 선생은 <조선인이 조선을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라든가 <나는 일본의 연호 같은 것은 모른다!>는 등, 확고한 자주독립의 의지를 피력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도 남자들도 쉽지 않았던 것으로, 그런 것으로도 선생의 위대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후, 병보석으로 풀려난 선생은(1920년 5월 22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고, 그 후에 조선을 탈출해서 상해로 망명했다. 그리고 <상해애국부인회> 간부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몸이 조금 완쾌되자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했고, 1923년 6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1924년 9월에 <파크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

<1923년 파크대학 졸업 관련 사진>

 그 후였던 1928년에 선생은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30년에는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지인이었던 <황에스터(황애덕)>와 <박인덕(朴仁德)> 등을 만났으며 <근화회(槿花會: 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해서 회장으로 추대된 후, 일제(日帝)의 악랄한 식민정책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데 힘썼다.

 그리고 1933년(또는 1932년 7월)에 귀국한 후 원산으로 가서 기독교 전도와 신학 발전에 기여하였는데, 그것은 일제의 감시와 압박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그곳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강연을 하였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나름대로 일제(日帝)에 항거했지만, 결국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평양기독병원에서 순국하셨다. 그런데 그때가 광복을 거의 1년 앞 둔 시점이어서 그 안타까움은 더했고,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와 같이 선생은 확고한 민족 정신을 가진 분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노력하셨던 분이었다. 그리고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었던 상황에서도 결혼도 하지 못하고 처녀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뒷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유관순 열사>와 당시에 日帝에 의해 고문을 당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선생도 <추악하고 더러운 왜놈>들에 의해서 고문을 당하면서 <한 쪽 가슴을 잃어야> 했고 <여성의 상징을 인두로 지짐 당하는> 천하가 공노할 고문을 당했던 수치심에 스스로 여성으로서 떳떳함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을 생각해서도 <한국인이라면> 저 <일본놈>들을 <왜놈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을 공감할 것으로 생각하고, 저 <강도에다, 저질의 족속이며, 천박한 난쟁이>들을 영원히 증오하는 것이 마땅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이 땅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친일(親日) 쓰레기>들은 모두 불에 태워서 소각시켜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반성은 커녕 오히려 이 나라를 다시 손아귀에 넣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저 <더러운 강도 왜놈들>을 보면서 가슴 깊이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너무도 <소박한 원함><가장 최소한의 우리의 자존감>을 위한 것으로, 다시 그 <인간 말종>들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짐승들>의 손에 의해 온갖 <욕보임>을 다시 당하지 않기 위함인 것이다. 그래서 <안창호 선생>은 생전에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10명만 있었더라면 한국은 벌써 독립이 되었을 것!>이란 말을 남겼다고 하고, 그리하여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라는 선생의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져서, 우리 후손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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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英雄)을 필요로 하는 나라는, 불행(不幸)하다>

 

 

  

 

 베르톨트 또는 베르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1898년 2월 10일부터 1956년 8월 14일)

 그는, 20세기에 활동했던 독일의 극작가(劇作家), 시인(詩人), 연출가(演出家)였고, 본명은 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 바이에른 주(州-Freistaat Bayern), 남서(南西)부의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출신의 사람이었다. 뮌헨대학시절부터 문학 활동을 시작했고, 1922년에 상연(上演)되었던 <밤의 북소리 또는 밤에 울리는 북소리-Trommeln in der Nacht>로 일약(一躍) 각광(脚光)을 받았다. 대표작으로는 <서푼짜리 혹은 싸구려 오페라-Die Dreigroschenoper-1928년>와 <간(肝) 큰 또는 여장부(女丈夫) 어머니와 그의 자식들 또는 아이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1939년> 그리고 <갈릴레이의 생애(生涯) 또는 일생(一生)-Leben des Galilei-1939년> 등, 많은 작품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세계 제2차 대전 때에는 나치스를 피해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망명생활을 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동(東)독일로 돌아가서 <베를리너앙상블(Berliner Ensemble)>을 설립(設立)했으며, 그곳을 죽을 때까지 활동거점(活動據點)으로 삼았다.

 그리고 또 그는, 정치(政治)와 마르크스주의(Marx主義)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해서, 감정이입(感情移入)을 기초로 했던 종래(從來)의 연극을 부정(否定)했으며, 그래서 가능한 사물(事物)을 객관적이면서도, 비판적으로 볼 것을 관객(觀客)들에게 요구했던 <서사적(敍事的)인 연극(演劇)>을 제창(提唱)했다. 그래서 또 그 방법으로는, 우리들이 흔히 만날 수 있는 일상적(日常的)인 것들에 대해서 <기이(奇異)하다> 또는 <불편(不便)하다> 또는 <뭔가 이상(異常)하다> 또는 <소격(疏隔)>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했던 <이화효과(異化效果=Verfremdungs-effekt)> 또는 <이상화(異常化)> 또는 <탈자동화(脫自動化)>로 불렸던 연극(演劇)이론(理論)을 만들기도 했으며, 그것으로 전후(戰後)의 연극계(演劇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참고: 그러나 이화효과(異化效果)는, 위의 브레히트(Brecht)가 주장했던 연극기법으로, 관객과 무대 사이에 일정한 지적(知的)인 거리를 둠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사고와 양식, 이성을 잃지 않고, 극적사건을 인식하여 비판할 수 있게 했던 수법이기는 했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처음으로 제창(提唱) 또는 관념화(觀念化)시켰던 사람은, 소련의 언어학자, 문예평론가, 작가였던 빅토르 시크로브스키(1893년 1월 24일부터 1984년 12월 6일)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친숙한 일상적인 사물들을 기이(奇異)하게 보이게 함으로 해서, 비(非)일상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하고, 그것으로 또 지각(知覺)의 자동화(自動化)를 피해보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앞으로는 그에 대해서 소개할 일이 거의 없을 것 같아서 이참에 그의 약력(略歷)도 조금 살펴보면, 그의 아버지는 당시 바이에른왕국에서 제지(製紙)공장의 지배인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프로테스탄트였던 그의 어머니에 의해서 세례(洗禮)를 받았다. 그리고 4년제였던 소학교(小學校)를 졸업한 후, 1908년에 9년제의 실과(實科)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시(詩)와 논평 등을 썼으며, 1914년의 아우크스부르크신보(新報)에 그의 시(詩)가 게재(揭載)되기도 했다(당시16세).

 그리고 또 당시, 그러니까 16세 때, 성서(聖書)에도 관심을 가져서 성서(聖書)란 희곡(戱曲)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1917년에 그는 뮌헨대학 철학부에 입학했으며, 그 뒤에 의학(醫學)부로 옮겼다. 그리고 한때 아우크스부르크와 뮌헨을 통학하면서 문학과 음악 그리고 무대예술에 심취했으며, 1918년에는 무뢰(無賴) 시인(詩人)을 주인공으로 했던 처녀(處女) 희곡(戱曲) <바알(Baal-神)>을 집필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육군병원 위생병(衛生兵)으로 소집 받았지만, 그 1개월 후에 1차 대전이 끝났다. 그리고 그 다음해 1월, 베를린에서 독일공단당의 전신(前身)이었던 스파르타쿠스단(Spartakus團=Spartakusbund)의 봉기(蜂起)가 일어나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와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후술 또는 생략)가 학살(虐殺)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또 그는 그 2월에 그 사건을 제재(題材)로 했던 희곡 <스파르타쿠스>를 집필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나중에 <밤의 북소리 또는 밤에 울리는 북소리>가 되었다. 그래서 또 그는, 그 시기에 <좌파(左派)독립사회당(USPD)>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어서 7월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던 의사(醫師)의 딸, 파울라(paula 또는 폴라, 愛稱을 비-라고 불렀다고 함)와의 사이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파울라와 결혼하지 않았고, 그 아이도 다른 남자와 결혼했던 파울라가 데려갔다.

 그 후, 그는 소설 등, 집필을 계속했으며, 1920년 봄과 1921년 가을에 베를린을 방문해서 표현주의(表現主義) 작가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리고 1922년 여름에는 <밤에 울리는 북소리>가 뮌헨의 실내극장에서 초연(初演)되었으며, 그러자 그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고, 그러자 또 그해 그것으로 그는 클라이스트 상(賞-Kleist-Preis)을 수상(受賞)하면서 일약(一躍) 각광(脚光)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말에 그는 마리안느(Marianne)란 여자와 최초로 결혼을 했으며, 그 다음해 딸 한네(Hanne-나중에 女優가 됨)을 낳았지만, 그러나 그 마리안느와는 1927년에 이혼했다.

 그리고 1923년에는 <도시(都市)의 정글(jungle)>을 왕궁(王宮)극장에서 상연(上演)했으며, 그 당시에 두 번째의 부인이자 생애의 반려자가 되었던 헬레네 바이겔(Helene Weigel)과 만났다. 그리고 1924년에는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의 희곡 <에드워드 2세>의 연출(演出)을 맡아서 뮌헨의 실내극장에서 상연했다. 그리고 또 1923년 9월에는 독일극장(Deutsches Theater)의 문예부원으로 채용되어 뮌헨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10월에는 국립극장에서 <에드워드 2세>와 <도시의 정글>이 상연되어서, 그의 지명도(知名度)는 높아졌다. 그리고 그 11월에는 아들 스테판(stefan 또는 슈테판, 나중에 演出家)이 태어났다.

 그리고 1926년부터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자본론(資本論)>을 열독(熱讀)했다. 그리고 그해 시집(詩集) <가정용설교집(家庭用說敎集-Die Hauspostille-惡魔의 祈禱書라고도 불렸음)>을 출판했으며, 그것으로 시인으로서의 평가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는 많은 여자들(Elisabeth Hauptmann, Margarete Steffin, Ruth Berlau 등)과 만나서 불륜을 저질렀으며, 그 중에는 그의 아들을 낳았던 여자(Ruth Berlau)도 있었다. 그리고 또, 1928년에는 <싸구려오페라>의 집필을 시작했으며, 그해 8월에 초연(初演)을 했던 후, 아주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후 <싸구려오페라>는 세계 각지에서 상연되었으며, 그 후로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한스 아이슬러와 함께>

 

 

 1930년경, 그는 새로운 연극을 모색해서 <교육극(敎育劇-Lehrstück-Theater)>이란 제목으로 일련의 작품을 발표했고, 그 과정에서 작곡가였던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와 공동 작업을 했는데, 그 협력관계는 그가 죽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1932년에는 막심고리키(Максим Горький)의 <어머니>를 개작(改作-Die Mutter-1931년)해서 상연했지만, 상연 중지되었으며, 그것은 또 그의 망명 전, 최후의 출연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1933년, 힌덴부르크(Paul Ludwig Hans Anton von Beneckendorff und von Hindenburg)대통령이 히틀러를 수상(首相)에 임명했고, 그리고 <국회의사당방화사건>이 일어나서 사회민주당원 등, 공산주의자들이 그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명령이 내려지자, 그 다음날이었던 2월 28일에, 수술을 하기 위해서 입원했던 병원에서 그는 탈출했다. 그리고는 유대인이었던 아내 바이겔과 장남 슈테판을 데리고 프라하 행 열차에 올랐다. 그 후, 그들은 프라하, 빈, 취리히를 경유해서 덴마크로 향했고, 그 도중에 작업동료들과 합류한 후, 덴마크에서 5년 정도 체재(滯在)했다. 그러자 1933년 5월에 나치당정부는 그의 저작들의 간행을 금지했고, 그것들은 또 분서(焚書)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그 1935년부터 38년 사이에, 연작극(連作劇) <제3제국의 공포(恐怖)와 비참(悲慘)-Furcht und Elend des Dritten Reiches-1937년>이란 글을 썼으며, 그것으로 나치정권 하에서 공포에 떨던 소시민(小市民)들의 모습들을 풍자(諷刺)형식의 콩트수법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1939년 4월, 그는 덴마크를 떠나서 스톡홀름(Stockholm)으로 이주했으며, 그러자 또 그곳에서 여성조각가였던 셋틴슨이라는 여성의 호의(好意)를 받아서, 스톡홀름 바다 위의 작은 섬, 린디게의 아틀리에(atelier)를 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우(女優)였던 라이너와 대화를 나누던 중, 여성알코올중독상인(商人)의 이야기를 듣고 영감을 받아서 <간(肝) 큰 또는 여장부(女丈夫) 어머니와 그의 자식들 또는 아이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1939년>을 2개월 정도 써서 끝냈다. 그리고 1940년 4월에 나치스가 그곳까지 침공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 헬싱키로 도망쳤다.

 그리고 1941년에는 가족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서 미국으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는 캘리포니아 주(州)의 산타모니카로 이주했다. 그리고 또 그는, 그곳에서 할리우드에 각본(脚本)을 팔 생각이었지만, 그러나 여러 가지의 사정이 여의치가 못해서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고, 그러자 또 그는 런던과 파리, 뉴욕 등을 돌아다니면서 몇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또 그 사이, 그는 영화각본도 집필했으며, 그래서 <사형집행인(死刑執行人) 역시도 죽었다-Hangmen also die>가 1943년에 공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였던 그에게 미국도 그렇게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결국, 1947년 10월 30일에 미국에서 심문(審問)을 받았고(非美활동위원회=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그러자 또 그는 뉴욕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애-Das Leben des Galileo Galilei>의 초(初) 공연 중이었던 데도 불구하고, 10월 31일에 파리를 경유해서, 다시 취리히로 도망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간(肝) 큰 또는 여장부(女丈夫) 어머니와 그의 자식들 또는 아이들>을 초연(初演)했으며, 하지만 그 후에 서(西)독일의 입국이 거부되었기 때문에, 그는 다시 그곳에서 1년간 체재(滯在)했다. 그리고 또 그때,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했으며, 그러자 1949년 초에, 그는 프라하를 경유해서,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넘었고, 이어서 동(東)독일에 도착했다. 그리고 동(東)베를린에 자리를 잡았던 그는, 그곳에서 베를리너앙상블(Berliner Ensemble)을 결성했고, 동년 11월에는 제1회공연을 실시했다.(푼틸라 주인과 하인 마티-Herr Puntila und sein Knecht Matti-1940년) 그리고 1950년대부터는 고전(古典)의 개작(改作)에 착수했으며, 1955년에는 스탈린국가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1956년 8월 14일, 그는 심장발작으로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그러자 그의 유언에 따라서 유체(遺體)는 석관(錫棺)에 안치되었으며, 베를린시립(市立)묘지에 묻혔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연극을 <서사적(敍事的)인 연극(Episches Theater)>이라고 불렀고, 그것으로 종래의 연극(劇的演劇-Dramatisches Theater)과 구별하려고 했다. 그래서 또 그는, 그 서사적(敍事的)인 연극을, 배우(俳優)가 무대(舞臺)를 통해서 어떤 사건을 설명(demonstration) 또는 소개를 하고, 그것으로 관객들에게 비판적인 사고(思考)를 하게 함으로 해서, 그 사건의 본질(本質)로 이끌려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래서 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悲劇)에 의한 카타르시스에 반(反)하는 <반(反)아리스토텔레스적(的)>인 것이 <서사적(敍事的)연극>이라고 주장했으며, 그래서 또 종래의 연극(劇的演劇)을 <현실을 외면한 미식적(美食的)인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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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無知)를 면하려거든, 무지(無知)를 고백하라>

 


 

 

 

 몽테뉴(Montaigne Michel Eyquem de-1533년 2월 28일부터 1592년 9월 13일)

 그는 사상가 수필가였으며, 16세기 르네상스기의 프랑스를 대표했던 철학자였다. 그리고 대표적인 도덕주의자(moralist)로 회의론(懷疑論)을 기조(基調)로 해서 종교적인 교회도 이성적인 학문도 절대시하는 것을 배격했고, 인간으로서 현명하게 살 것을 권장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저서였던 <수상록(Essais)>을 통해서 프랑스에 모럴리스트의 전통을 구축했으며, 17세기 이후의 프랑스와 유럽 문학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페리골(Périgord-현재의 Dordogne지방) 지방의 보르도(Bordeaux)에서 가까운 몽테뉴 성(城)에서 유대계 프랑스인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상인(商人)으로 부유하게 살았으며, 정치에도 열성을 보여서 보르도의 시장까지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려부터 학문적인 혜택을 많이 받고 자랐으며, 나중에는 법학을 배워서 법관이 되었다. 그리고 1565년에 결혼을 해서 여섯 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그러나 그 중에서 성인(成人)이 되었던 아이는 단 한명 뿐이었다. 1568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그는 그 성(城)을 상속받았다. 그리고 1570년에는 법관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그 후였던 1572년에 수상록(隨想錄)의 집필을 시작해서 1580년에 보르도에서 초판(初版)을 간행(刊行)했다.

 그 후, 그는 여러 나라를 여행했으며, 샤를 9세 등을 모시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때 보르도의 시장(市長) 직을 맡기도 했으며, 프랑스 종교전쟁<위그노(Huguenot)전쟁-1562년부터 1598년, 新舊敎徒전쟁. 후술 또는 생략> 때는 로마가톨릭의 입장이었지만, 그러나 양파(兩派)의 융화에 노력했다. 그리고는 1592년에 세상을 떠났다.


 ※ 위의 내용과 비슷한 말은 공자(孔子)의


 子曰(자왈) 由(유) 誨女(=汝)知之乎(회여지지호) 知之爲知之(지지위지지) 不知爲不知(부지위부지) 是知也(시지야)

 즉, 유(由-子路)야, 내가 아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해주마.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라.
 그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니라.

 

 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것을 보더라도 성인 또는 위대한 인물들의 생각은 서로 비슷한 부분이 많은 것으로 생각되고

 그것으로 또, 뛰어난 인물들의 관심사는 많은 부분 비슷하다거나, 겹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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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노량해전-이순신 장군 전사> 

 

 <이순신(李舜臣-1545년 4월 28일부터 1598년 12월 16일) 장군>은 중국의 대 명장(名將) 한신(韓信-상세한 것은 본인의 中國 참조)과 함께, 소개가 더 필요 없을 정도로 세계적인 무장으로 알려진 분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聖雄 이순신>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 선조 때의 무신이었고, 시호는 충무(忠武), 한성(현재의 을지로) 출신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구(倭寇)의 침략을 맞아 국난(國難)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분이다. 그래서 조선(朝鮮)은 그 분에게 아주 큰 빚을 졌는데, 그래서 더욱 귀하게 모셔져야 했던 분이었음에도 <그 분>의 생(生)은 다른 위대한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다시 <그 분>의 발자취를 간략하게 더듬어보고자 한다.

​ <이순신 장군>은 문반(文班) 가문의 출신이었으며, 선조 9년(1576) 32세 때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정(李貞),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 卞氏)였고, 4형제(위로부터 羲臣、堯臣、舜臣、禹臣)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자식은 이회(李薈), 이열(李䓲), 이면(李葂), 이훈(李薰), 이개(李藎) 등이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영의정이 되는 3세 연상의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자랐으며, 그래서 유성룡은 자신의 저서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 장군>의 성품에 대해서 기록을 해두었는데, 그것으로 보아서 <이순신 장군> 역시도 타고난 영웅이었으며, 혁명적인 기질이 강했던 분이란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그 분>의 어린 시절을 보고 <용맹과감(勇猛果敢)한 성격을 지녔던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28세(1572년-선조 5년) 때 <훈련원별과(訓錬院 別科)>에 응시했지만 말에서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 그래서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하고 시험을 끝냈지만 낙방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정도로 <그 분>은집중력이 강한 분이셨고, 고난에 쉽게 굴복하지 않았던 것이 <그 분>의 성격이자 인품(人品)이었다. 그래서 그 4년 뒤였던 32세 때 처음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 분>의 어머니의 실가(實家)가 있었던 충남 아산 <현충사>의 자료에 의하면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무과내과사위합격총29명중12위(武科丙科四位合格総合格者29人中12位)>라고 되어 있고 <현직군관(現職軍官)이 아닌 자 중에서는 2위>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때부터 <이순신 장군>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으며, 그래서 많은 영웅들처럼 <자신 스스로의 극복 문제>보다 자신을 해치려는 적들 중에서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처음 발생했던 고난이 <녹둔도 전투>였는데, 그것은 또 1587년(선조 20년)에 <이순신 장군>이 함경도에서 여진족의 방어를 맡던 중에 여진족의 침략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9월1일). 그러자 <이순신 장군>은 열심히 싸웠지만 오히려 상관이었던 <이일(李鎰)>의 모함을 받고 백의종군(白衣從軍-1차)하게 되었던 것이다.


 

​    

            

      ​   <녹둔도- 두만강 하구에 있었던 섬. 그 후에 육지가 되어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이후 조선이 몇 차례 항의하였으나 러시아는 무시하였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가 찾아야 할 땅 중 하나다>

 

 그 후 <장군>은 다시 이광(李洸) 등의 도움을 받으며 여러 직을 전전했고, 그러던 1591년 47세 때 <정3품 당상>에 해당하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수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또 바로 그 다음 해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터졌고, 그래서 또 그때 문제가 되었던 사람이 바로 <원균(元均)>이었다. <원균>은 전쟁 중에 이순신과 계속해서 대립했으며, 결국 1592년 8월 27일 <칠천량해전>에서 패하고 거제도로 퇴각한 후 왜적에게 사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에는 일부 다른 견해도 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전세는 계속해서 불리하게 돌아갔는데, 그래서 <선조>가 몽진을 갔느니 하던 중에도 <이순신 장군>은 계속해서 승전했다. 그래서 왜구(倭寇)는 그 때문에 애가 타서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 많은 조선의 의병들이 각지에서 궐기해서 왜구(倭寇)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그에 대한 내용은 본인이 쓴 <성녀이야기>에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으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하시길 바라며, 어쨌든 그러자 일이 풀리지 않던 것에 조급함을 느꼈던 <도요토미히데요시>가 다시 조선을 침략했는데, 그것이 또 1597년 8월부터 시작해서 1598년 12월까지 계속되었던 정유재란(丁酉再亂)이었다. 그리하여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고, 그러던 중에 <이순신 장군>은 다시 한 번 백의종군했다.

 

 그런데 또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던 1598년 8월 19일(일본은 8월 18일), 임진왜란의 원흉(元兇)이었던 <멍청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급사(急死)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독살(毒殺)설 등이 있었는데, 그러자 왜구(倭寇)는 완전히 전의(戰意)를 상실했고, 그때부터 도망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한 놈도 살려서 보내지 않는다(片帆不返)>는 단호한 의지를 내보였고, 그것은 또 너무도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러자 왜구(倭寇)도 사생결단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며, 그러자 또 <이순신 장군>도 <죽으려는 자는 살고, 살려는 자는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출전 吳子兵法, 마가복음8장35절 외 다수)>는 의지를 내보이며 왜구(倭寇)의 소탕에 힘을 썼다.

 

 그런데 또 그 10월에 <이순신 장군>은 사랑하던 아들 <이면>이 왜구(倭寇)와 싸우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병세(病勢)가 더욱 심해지던 중에 노량해전(露梁海戰. 1598년12월16일)에 임하게 되었고, 그 전투에서 유탄(流彈)을 맞고 서거(逝去)하셨다. 그리하여 <일본을 대표>할 수 있는 <도요토미히데요시>란 <미친 놈>이 일으킨 <미친전쟁>도 모두 다 끝이 났고 <이순신 장군>은 그 <죽음의 대가>로 <정1 품 우의정>에 증직되었으며, 1604년에 선조는 좌의정을 가증했다. 그리고 1643년 인조 때 <충무>란 시호가 내려져서 지금까지 우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큰 별, 불멸(不滅)의 이순신>이 탄생했으며, 그 때문에 이 나라와 국민들은 <장군>으로부터 <영원히 추종할 수 있는 큰 인물을 받들게 되었다>는 큰 은혜를 입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도 이 나라의 사람들은 그 많은 위인들 중에서도 <이순신 장군>을 제1로 뽑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장군의 깊은 뜻은 <그런 순차(順次)에 관계없이 나라를 지키는 데는 지위의 高下가 필요 없으며,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필코 완수해내야 하는 필명(必命)>이란 것을 후손들에게 깊이 각인시켜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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