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닷컴] (글=이동진) 유하 감독의 ‘쌍화점’(12월30일 개봉)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후 작품들 중 개봉 전부터 가장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한국영화일 것이다. 76억원의 순제작비를 들인 외형적 규모도 규모려니와, 조인성 주진모 송지효를 망라한 스타 캐스팅도 화려하다. 게다가 이 작품은 오래 전부터 베드신의 표현방식을 비롯한 갖가지 소문들로 들썩거렸다. 그렇게 숱한 기대 속에 기자 시사회를 통해 뚜껑을 연 ‘쌍화점’은, 순도 높은 멜로 영화였다.






원나라의 압박이 심한 고려 말. 왕(주진모)의 호위를 담당하는 건룡위의 수장인 홍림(조인성)은 왕을 시해하려는 괴한들의 공격을 물리친 뒤 배후를 파헤치려 애쓴다. 왕후(송지효)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없다는 것을 빌미로 원나라가 후계 문제에 대해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하자, 왕은 스스로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인 홍림에게 명을 내려 동성애자인 자신 대신에 왕후와 합궁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합궁 이후 뜻하지 않게 왕후와 홍림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세 사람의 관계는 격랑 속으로 빠져든다.

‘쌍화점’의 베드신 수위는 과연 높다. 초반에 등장하는 동성애 장면은 스타로서 두 배우의 위상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격적이다. 중반 이후 여러 차례 나오는 홍림과 왕후의 동침 장면 역시 강력하다.

하지만 표를 사게 만드는 ‘쌍화점’ 인력(引力)의 일정 부분이 설혹 베드신을 둘러싼 궁금증이라고 해도, 극장을 나서면서 관객의 마음 속에 남게 될 것은 온통 휘몰아치는 영화 속 격정이 남긴 침전물들일 것이다. 이 영화 속 연인들은 욕망의 대로 위에서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며 몸이 이끌어가는 대로 사랑을 하며 열정과 혼돈을 겪는다. 이를 테면 ‘쌍화점’은 뜨거운 몸뚱이를 가진 인간들의 성정이 서로 부딪치며 아우성치는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버티어 서 있으려는 영화다.

이 영화에 정면 클로즈업 쇼트가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하 감독은 그런 감정의 회오리를 정면으로 부릅뜬 채 바라보려 한다. 그러니 여기서 베드신은 단지 눈요기거리나 양념이 아니다.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이기에, 배우들이나 감독 모두 물러설 수 없었을 것이다.

동성애 모티브와 왕실 사극이라는 장르는 이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라 낚시 바늘에 가깝다. 그 둘은 열정이 빚어내는 고전적 비극을 좀더 신선하게 다뤄내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아울러 그것들은 사랑으로 뭉뚱그려진 채 그 속에 뒤섞여 온통 들끓고 있는 요소들을 좀더 극한까지 밀어붙여 살펴보기 위한 감정의 입자가속기 같은 장치이기도 하다. 그 극단적인 전개와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풀어내는 사랑의 양상은 사실 전형적이다. 솟구치는 현재의 격정 앞에서 때때로 사랑의 역사는 초라해진다.

언뜻 이야기의 틀에서 ‘왕의 남자’나 ‘황후화’가 먼저 떠오르고, 특정 모티브는 ‘천국의 나날들’이나 ‘음란서생’을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처음 달려들 때 튀어오른 후 온 몸을 실어 칼을 내리치는 식으로 파워를 강조한 액션 스타일은 ‘트로이’를 참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 정서와 표현방식에서 진짜로 염두에 두고 있는 작품은 ‘색, 계’일 것이다. ‘쌍화점’과 ‘색,계’는 결국 같은 말을 한다.

이 영화의 주연 배우들은 변신의 정도를 넘어서,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걸고서 연기한다. 아마도 이 세 배우의 연기력이 여기서 절정의 기량을 보여줬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되돌아본다고 해도 후회나 부끄러움이 전혀 없을 성실한 연기로 박수가 아깝지 않도록 만든다. 작품 안에서 배우와 감독의 전적인 신뢰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인상적인 일이다.

제작비의 규모를 여실히 드러내는 ‘쌍화점’의 영상은 충분히 매끄럽고 고급스럽다. 멜러로서 극중 인물들의 절실한 감정이 관객의 코 앞에까지 육박해오는 부분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두 시간이 훨씬 넘는 긴 상영 시간 내내 긴장감 넘치지는 않는다. (기자 시사회 후 이 영화는 러닝 타임을 조금 줄이는 방식으로 재편집되었다고 한다.) 극 전체의 리듬을 살리지 못해, 갈수록 고조되어가는 인물들 심리의 궤적에 객석이 고스란히 조응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연출의 세기(細技)에 비해 직접적으로 감정을 확인하는 대사들이 너무 많은 것은 일종의 노파심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영화의 후주(後奏)는 관습적이다. 하지만 ‘쌍화점’만큼 결이 우아하고 감정적으로도 농밀한 멜로를 만나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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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화를 100명이 보면 100개의 감상이 생기고 1000명이 보면 1000개의 감상이 생긴다. 아주 비슷하다 할지라도 똑같지는 않다. 이 것이 내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다. 어떤 영화를 어떤식으로 봐야할 이유가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감독으로부터 떠난 영화는 태생적으로 반이 비어있는 채로 출발해서 관객과 만남으로써 나머지 반을 채우고 완성된다. 개별적인 감응으로 완성된 관객들의 영화에 대한 해석은 좌우는 있을지언정 위아래는 없다. 이 표현이 애매하다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다르다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나를 포함한) 속에 넣어두지 않고 커뮤니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여럿에게 보이는 이유는 "나는 이래. 너는 어때?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 라는 무/의식적 행동이 밑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이엘리를 변호하는 것은 내가 옳다 나를 따르라는 강요가 아니라 다른 해석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느냐라는 약하게는 질문, 강하게 권유정도로 봐줬으면 좋겠다.

우선 이엘리를 변호함에 있어 그 이유를 먼저 밝히는게 도리일 것 같다. 근래, 아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많은 영화를 봐왔지만 이토록 아름답고 매혹적이고 순수한 캐릭터를 본 적이 없다. 코흘리개 오스칼과 또래 아이들과 다른 키치적 정갈함, 12살 아이의 모습으로 표현되지만 깊이있는 말과 행동, 어른과 아이의 모습을 모두 담아 가늠하기 힘들지만 그래서 매혹적인 마스크, 영원을 살기에 다 닳아 없어졌을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영롱하게 빛나는 순수함. 영화 전체적으로도 버릴 컷이 하나도 없을 뿐더러 특히 이엘리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은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어떤 영화에 대해 "갖고 싶다"란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한 애정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이유로 나와 다른 관점으로 이엘리는 보는 사람들에게 내가 보는 이엘리의 이미지에 수렴시키고자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몇가지 해보겠다.

1. 이엘리는 여자인가?남자인가?
이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흔히 뱀파이어물들에 등장하는 일반적인 구도는 뱀파이어 본연의 초인적 능력과 이성에 섹슈얼한 매력에 대한 동경으로 맺어지는 주인공들의 관계이다. 하지만 렛미인은 뱀파이어라는 글자만 남기고 다른 수식어들은 모두 지워버린다. 이엘리는 섹슈얼한 매력은 찾아볼 수 없고 초인적인 능력은 포커스를 벗어나 시야를 벗어난 곳에 가둬둔다(마지막 수영장 시퀀스). 성별을 지움으로써 이성애의 신화로 전락할 이야기를 인간의 본연적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끌어올린다. 그래서 이 같은 맥락에서 이엘리가 남자냐 여자냐는 중요하지 않다. 기원을 밝히려고 원작소설까지 갈 필요는 없다. 영화 렛미인은 소설과는 다른 텍스트다. 포인트는 여자냐 남자냐라는 표면적인 것보다 왜 성별을 알 수 없게 만들었냐에 대한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이 의미있다고 본다.

2. 이엘리는 오스카와 호칸을 이용하려 하는가?
이 글을 쓰게된 계기가 된 것이고 아마 가장 핵심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선 병원에 찾아가 아버지를 찾는다고 말하는 이엘리의 말은 그가 어디있는지 알기위한 거짓말일 뿐이다. 호칸이 체육관으로 가기 전에 오늘밤 만은 소년을 만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과 염산을 얼굴에 부으면서 이엘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면 연인관계임이 틀림없다. 이엘리가 이용하고 호칸이 이용당한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자의가 아닌 타율에 의해서는 이런 행동들이 나올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하는거라면 도망가거나 이엘리가 잠자는 사이에 죽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노인이 될 때까지 계속 같이 있다는 것과 병원에서 피를 기꺼이 주는 것은 자의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호칸은 오스카의 늙은 모습일 수 있다. 시간상으로 호칸과 오스카의 이야기는 이별 후 만남으로 분절돼 있지만 오스카는 호칸의 과거형이며 호칸은 미래의 오스카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이엘리의 집에서 오스카는 반지에 대해 질문한다. 이 반지는 그 동안 많았을 오스카와 호칸을 암시하며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이유는 그 순환고리 속에 다시 들어올 오스카에 대한 연민과 그 들과의 기억에 대한 슬픔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이런 흐름에서 호칸의 끝과 오스카의 시작사이에 시간적 순서은 끝과 새로운시작, 즉 이용하던 것을 버리고 다시 이용할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스카의 시작에서 호칸의 끝으로 재배치함으로써 결국 저렇게 끝날 수 밖에 없는 뱀파이어와 인간의 구구절절한 사랑으로 봐야한다.
그리고 설령 이엘리가 이용하고자 수영장에서 오스카를 구해줬다고 가정하자. 과연 이 것이 노인까지 이엘리에게 이용당해야할 피의 댓가, 그 나이가 되도록 복종해야할 족쇄로 읽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생명의 은인도 돈이면 배신하는 21세기에 이런 12살짜리 코흘리개보다 더 순진한 발상이 어디있는가?
그리고 이엘리는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다. 요케를 덮치는 전략이나 수영장에서 보여준 뱀파이어다운 면모는 누가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음을 증명한다. 다만 외로울 뿐이다.
즉 결론은 이런 일련의 행동들은 오히려 이성애였으면 퇴색해버렸을 원대한 사랑(이성애대한 제한적 사랑이 아니라)의 맥락 속에서 봐야한다고 말하고 싶다.

3. 이엘리와 달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줌마가 의미하는 것은?
요케의 죽음 이후로 이 두 중년부부는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극중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서로에 소통이 단절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내가 이엘리에게 물리고 변해가는데 남편은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꼬마애 때문에 변해간다"라고 말하지만 병원에서도 전혀상관없는 우표얘기를 하며 아내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래서 아내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자살했다고 생각한다. 잔혹한 이엘리와는 다르게 그 동안 지켜왔던 인간성의 고귀함을 지키기위해 순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는 외로움으로 말이다. 이런 의도는 뱀파이어인 이엘리의 모든 것을 안고가는 주인공커플에 비해 통하지 못한 부부의 이야기를 겹쳐놓음으로써 주제를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준다.

영화에 얼마나 흠뻑 빠졌으면 이런 글까지 쓰나 싶어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이렇게 한 영화에 빠져본 적도 없기에 색다른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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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에 대해 제 의견을 올립니다.

저는 이엘리를 위해 살아가는 듯 보였던 호칸의 모습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보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맹목적인 복종으로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살면서 겪는 부정적인 경험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통해 재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있지만 좋은 사람도 있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구요...

제가 보기에 오스카는 부모의 별거, 아버지의 동성애 성향, 학교 폭력등을 통해 인간과 삶에 대한 의문과 부정적인 감정을 많이 갖고 있어 보였고, 특히 주위 사람들과 대화가 거의 없는 모습을 통해 스스로 인간들과의 관계맺기를 잘 하지 못하는 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오스카에게 관심을 보여주고 마음을 열 수 있게 해주었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목숨까지 구해준 이엘리는 그 누구보다도 더 오스카의 마음을 이해하고 지켜줄 수 있는 친구이자 보호자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기에 (그리고 돈도 많기에) 아무런 미련없이 가족과 학교와 마을을 떠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스카에게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신을 힘들게 했거나 오스카와 상관없는 무관심했던 존재였기에 이엘리를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도 죽이고 증거도 인멸하고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주는 호칸의 모습을 보면, 호칸 또한 이엘리를 살리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왔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호칸이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에서 오스카의 미래를 느꼈고, 이엘리는 인간이면서도 인간에 속하려 하지 않는 소외당한 인간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만들어 이용한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보통의 인간은 살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됩니다. 가족, 친구, 연인, 인간...
인간과의 관계맺기를 하지 않는 오스칼에게 사랑을 느끼고 평생 사랑할 존재는 오로지 이엘리 뿐 일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엘리는 인간이 아니기에 보통의 인간이 주고받는 그런 사랑하는데 한계가 있으며 이엘리 또한 그런 사랑이 불가능함을 밝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칼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마도 이미 호칸이 보여준 그런 행동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원대한 사랑이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한 존재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안티고네님의 개인적인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분들의 생각을 '오해', '순진한 발상'으로 규정하시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고, 영화를 본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저 또한 개인적인 생각을 길게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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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엘리가 혼자 있을때 약점이 드러나는 건 영화에서도 보여줬었습니다. 자신이 활동하지 못하는 낮시간에 누군가가 필요하지요.

- 다른 사람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에게 접근(이라고 했지만 꼭 오스칼을 노리고 접근했다고는 보질 않습니다. 오스칼과 이엘리가 만나기 시작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고 봅니다)하고 일련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작업(이런 작업의 절정은 '나를 느껴봐'라면서 뱀파이어의 무언가를 오스칼에게 넘기는 그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뱀파이어의 무언가가 이엘리에게서 오스칼에게 넘어가면서 이엘리는 잠시나마 늙어버리고, 오스칼은 피의 갈증 같은 뱀파이어만이 느낄 수 있는 우울한 감정을 느꼈겠지요)을 처절하게 죽어간 호칸에게도 똑같이 했음을 생각해본다면...
이엘리는 사랑보다는 자신을 보좌할 누군가가 필요할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엘리처럼 불로장생을 하다보면, 어차피 사랑이란게 큰 의미가 있을까싶기도 합니다. 어차피 자신은 남게되고 상대방은 언젠가는 떠나가게 되는데 말입니다.

- 이엘리가 이러한 목적이 담긴 행동에 비해, 호칸과 오스칼을 비롯한 이엘리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거쳐갔을 수많은 남자들의 이엘리에 대한 감정은... 그야말로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영화가 끝나고 계속 떠오르는 호칸의 행동이나 대사 하나하나가 가슴아프게 다가오는 것이 이런 이유때문입니다.

-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사랑을 폄하하고 싶진 않습니다. 필요에 의한 것이든, 무조건적인 것이든 이엘리와 오스칼은 서로 떨어지지 않은채 평생 함께 하게 될 것이니까요.

- 중년의 남녀관계는... (부부라고 생각되어지지는 않더군요) 이엘리와 오스칼의 이야기에 빗대어져서 폄하될 관계라고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주머니가 삐쳐서 나가긴 했지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금방 쫓아가서 사과를 하던 아저씨이고, 아주머니의 치료를 위해 가보처럼 내려오던 우표를 팔아 병원비를 마련할 정도로 그녀를 아꼈습니다. (아무 상관없는 우표는 아니었지요) 그녀가 자살을 택하게 된 건, 피의 갈증에 스스로 변해감을 느끼고 뱀파이어가 되어간다는 것을 알게된 뒤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판단아래 이루어진 것인듯 하고, 자살을 실행하기 전에 아저씨에게 미리 귀뜸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살 전 씬에게 무언가 얘기했음을 보여주죠)

- 그리고.. 영화에서 보여지는 이엘리의 모호한 性의 표현때문에 듀나는 이 영화를 퀴어영화로 얘기하기까지 하던데, 그런 영화에서의 표현들에서 구지 동성애적 코드를 찾는 것 보다는 오스칼의 사랑이 남녀를 가리지 않는 무조건적임을 보여주는 장치라는 생각입니다.

안티고네님의 개인적인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분들의 생각을 '오해', '순진한 발상'으로 규정하시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고, 영화를 본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저 또한 개인적인 생각을 길게 적었습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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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와 이엘리의 관계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보편적인 관계에서 절대로 가치판단할 수 없어요. 내가 여자친구를 사귀면서 다른사람들과는 관계를 닫아버리면 아마도 맹목적인 사랑으로 치부될 수 있죠. 하지만 영화 속 이엘리와 오스카의 관계는 인간의 피를 필요로 하는 뱀파이어와 인간의 절대적이고 특별한 관계에요. 그래서 오스카는 호칸과 마찬가지로 다른사람들과의 관계는 엷어지고 멀리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이런 맥락에서 오스카가 한쪽은 한없이 열지만 한쪽은 한없이 닫는 어쩔 수 없음을 보여주며 오히려 설득력있고 그런만큼 더 슬프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말한 원대한 사랑이란 그 둘의 아기자기한 사랑이라기보단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온전하게 서로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붙인 것이고 오스카로부터 뻗어나가는 다른이들과의 인간관계에 보편적으로 대입할 수 없음을 말하죠. 마지막에 이엘리가 라케를 죽이고 오스카는 집으로 들어가면서 방문을 잠그고 장난감 자동차 문을 닫는 장면은 한쪽은 한없이 열고 한쪽은 닫아버리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죠. 떠날 것을 암시도 하며,
그런데 영화에서는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 인간관계에서도 종종 일어나죠. 누굴 사귀게 되면 친구들과의 관계는 소홀해지는 그런 비교우위에 놓이는 상황이 발생하죠. 오스카아빠의 집에서 오스카가 낙동강오리알 신세가 되는 것을 보면 사실 바를 바 없죠. 한쪽은 열고 다른쪽은 닫는 오스카의 행동은 이엘리가 뱀파이어라는 존재때문에 극단적으로 보여진 장면이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면 그렇게 슬픈 것은 아니라고 봐요.

3번째 중년부부의 이야기는 사실 안쓰려 했는데 내용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 넣어서 조금 얼토당토해요 ㅋㅋ 다만 제가 확실하게 본 것은 둘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거에요. 요케의 죽음이후 아내가 삐쳐서 가는 장면에도 남편이 따라가지만 이엘리에게 당하기전 터널에 들어가는 장면에 잠깐 클로즈업 되는데 남편의 표정은 이해보단 증오가 서려있죠. 병실에 누운 장면에서도 아내의 상태를 물어보기보단 우표를 팔아서 집장만하려는 얘기만 하죠. 결국 아내가 얘기하지만 말이에요. 우선 제 포커스가 이엘리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봤고요 아내가 살고싶지않아라는 대사를 하는 것은 스스로도 뱀파이어의 운명을 직감했기에 했던 말이 아닐까하고 댓글다신분들의 의견에도 동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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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닷컴] (글=이동진) 에드워드 즈윅(‘가을의 전설’ ‘라스트 사무라이’)이라면 독특하고 유장한 소재 앞에서 관객보다 먼저 감상에 젖었을 것이다. 론 하워드(‘뷰티풀 마인드’ ‘파 앤드 어웨이’)라면 1억5000만 달러의 제작비 규모에 들떠 스펙터클한 장면 연출에 좀더 집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데이빗 핀처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2월12일 개봉)를 만들면서 흥분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시간을 거슬러 유영하는 한 남자의 삶이 지닌 결을 고스란히 살려내는데 집중했다.






실크처럼 매끄럽고 벨벳처럼 우아한 이 영화의 질감이 단지 표면적인 스타일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핀처는 무엇보다 이 이야기를 바다에 도달해 소멸하는 강물의 도도한 여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설령 거꾸로 흐른다 해도, 시간은 (그리고 삶은) 여전히 흐른다.

80세 노인의 얼굴을 가진 벤자민은 태어나자마자 버려진다. 양로원에서 일하다가 아기를 발견한 퀴니(타라지 헨슨)는 벤자민을 자식처럼 키운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이를 거꾸로 먹으며 점점 젊어지던 벤자민은 어린 소녀 데이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을 느낀다. 벤자민(브래드 피트)은 선원으로 세상을 떠돌면서도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에게 지속적으로 소식을 띄운다. 전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온 50대 외모의 벤자민은 어느새 성숙한 처녀가 된 데이지와 재회한다.

데이빗 핀처는 항상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만의 폐쇄적인 공간(‘패닉룸’)에서 공상(‘파이트 클럽’)을 하거나 게임(‘더 게임’)을 하는 듯한 그의 영화 세계는 블록버스터 속편(‘에일리언 3’)을 만드는데도 주인공을 죽이는 비극적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경찰의 이야기(‘세븐’ ‘조디악’)를 다룰 때조차 폐곡선 안에서 음울하게 맴돌며 끝을 맺었다.

그런 그의 신작이 유려하고 따뜻하며 관조적이고 낙관적인 동화 한 편이라니! 핀처의 팬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놀라게 될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말하자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핀처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로버트 저메키스의 ‘포레스트 검프’ 같은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이 영화에 착수하기 직전 아버지를 잃었던 핀처 개인의 경험도 크게 작용했다. 감독 이력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색깔을 고려할 때, 데이빗 핀처에게 이 작품이 지니는 의미는 팀 버튼에게 ‘빅 피쉬’가 갖는 의미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점은 80년의 세월을 제한된 상영시간 속으로 압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쇼트와 쇼트, 신과 신 사이를 연결하는 바늘 땀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모든 기술적 요소들은 만남과 헤어짐이 수도 없이 교차하는 벤자민의 삶을 하나의 리드미컬한 흐름으로 멋지게 요약하는데 성공했다.

극 초반 거대한 시계의 바늘이 역방향으로 가면서, 화면도 거꾸로 진행되어 전사했던 아들이 부모 품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에서는 핀처의 화려한 표현력을 확인할 수 있다. 수많은 변수가 작용해 교통 사고가 발생하게 되는 상황을 설명하는 장면은 (비록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 도입부를 떠올리게 하지만) 물 한 방울 새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장악력을 과시한다. 벤자민이라는 특수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머물지 않고 그 여운을 보편적인 영역으로 확장하는 라스트 신의 울림도 크다. 아울러 이 영화의 특수분장은 이토록 기이한 설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만들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하지만 뛰어난 연출력에 비해서 이 영화의 각본은 그리 훌륭하지 못하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모티브가 지닌 강력한 동력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경우에 따라선 좀 지루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것은 166분이나 되는 긴 러닝 타임 때문만은 아니다. 이야기의 틀을 채우는 구체적 에피소드들과 그 에피소드들을 응축하는 대사들이 미진하거나 중언부언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브래드 피트는 충분히 멋지고 성실하다. 그러나 다소 단조로운 톤으로 캐릭터를 소화해낸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브래드 피트가 2월22일 열리는 제8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장에서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받는다면 아마도 고개가 약간 갸웃거려질 것 같긴 하다.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물론 훌륭하다. 하지만 이 시대 가장 재능있는 여배우 중의 하나인 케이트 블란쳇이 이보다 더 뛰어나게 연기한 작품을 꼽아보자면 다섯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영화의 종반부에선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의 딸인 샤일로가 특별출연하기도 한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멜로 영화가 아니다. 그리고 노인으로 태어나 아기로 죽어간다는 모티브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아이디어의 기발함이나 판타지의 대리만족이 아니다. 이것은 헤어짐을 삶의 본질로 이해하게 되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벤자민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보내고 또 떠나 보낸다. 그리고 종국엔 자신이 떠날 준비를 한다. 그렇게 한 인간이 마지막으로 이별하게 되는 것은 결국 시간 그 자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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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닷컴] (글=이동진) 이건 흡사 연기 귀신들의 전쟁터 같다. 당신은 여기서 호랑이와 사자가 좁은 우리에서 맞붙는 듯한 연기 배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우트’(Doubt-2월12일 개봉)가 올 아카데미상 4개 연기 부문 중 무려 3 군데에 후보를 올린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의심’을 뜻하지만, 할리우드가 선사할 수 있는 최상급 연기들이 시종 지속되는 이 향연의 품질에 대해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둬도 된다.






카톨릭 교구 학교의 수녀인 제임스(에이미 애덤스)는 플린 신부(필립 시무어 호프먼)와 12살 소년 도널드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제임스의 말을 듣고 플린 신부의 부적절한 처신을 확신한 교장 수녀 알로이시스(메릴 스트립)는 그를 쫓아낼 계획을 세운다. 알로이시스 수녀가 증거 하나 없이 자신을 거세게 몰아붙이자 플린 신부도 맞서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메릴 스트립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말하고 움직인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같은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 강인하고 냉정한 인물이야말로 스트립이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배역이지만, ‘다우트’에서 그녀가 가장 감탄스러운 순간은 그 사이로 언뜻 약한 부분을 드러내거나 허를 찔리는 모습을 보여줄 때이다.

필립 시무어 호프먼은 아마도 가장 입체적으로 캐릭터를 만드는 배우 중 하나일 것이다. ‘천의 얼굴’이라는 고전적 표현으로 배우를 설명하고 싶을 때, ‘다우트’의 호프먼은 더없이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호프먼과 스트립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이 영화 클라이맥스의 에너지는 실로 굉장나다.

에이미 애덤스만큼 무구한 얼굴을 가진 성인 배우도 드물 것이다. 물러서지 않는 두 명의 강력한 인물 사이에서 삶 전체가 통째로 흔들리는 제임스 수녀 역의 애덤스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그리고 단 두 개의 신(앉아 있는 모습이 아주 짧게 삽입되는 신까지 포함하면 세 개의 신)에만 등장하지만 ‘장면을 훔치는 연기’가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바이올라 데이비스의 모습은 전기가 오를 지경이다.

물론 이 영화의 매력은 연기에만 있지 않다. 동명의 희곡을 쓰고 연출해 토니상까지 받은 존 패트릭 셰인리가 직접 메가폰을 잡은 이 작품은 우아하고 강렬하며 지적이다. (2006년에는 김혜자씨 주연으로 국내 연극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 장면과 장면, 캐릭터와 캐릭터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균형 감각이 탁월한 각본은 시나리오 지망생들이 교본으로 삼을 만 하다. 특정 사실을 직접적으로 지칭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룰 줄 아는 완곡 어법의 마법이 담긴 대사도 훌륭하다.

연극의 연장선상에서 이 작품을 파악하려 들기 쉽겠지만, ‘다우트’는 의외로 매우 영화적이다. 플린 신부가 설교 속 예화를 통해 반격할 때는 두 수녀의 클로즈업 쇼트가 정확한 타이밍으로 편집되어 공격의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알로이시스 수녀가 플린 신부 앞에서 처음으로 의혹을 암시할 때 그녀가 걷은 블라인드 커튼 사이로 내리 쬐는 빛은 그의 얼굴 위에 쏟아지며 코너에 몰린 자의 당혹감을 선명히 비춘다. 극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달을 때는 거센 바람이 인물을 향해 낙엽을 날리며,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에는 온통 눈에 뒤덮인 고요한 거리가 인서트된다. 인물들의 구도를 통해 심리를 말할 줄 아는 카메라는 시종 단아하고 정확하지만, 혼돈된 심리가 극에 달할 때는 사선의 앵글을 구사할 정도로 과감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치열한 이야기가 결말을 열어놓고 끝을 맺은 후 관객은 어떤 판정을 내려야 할까. 알로이시스 수녀와 플린 신부의 대결에서 어느 한 쪽이 선이거나 악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여자와 남자, 가지지 못한 자와 가진 자, 보수와 진보,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욕망과 금욕, 인간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총체적으로 격돌하게 된 상황에 대한 판단이다. 극장을 나서면서 당신이 자신만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당신의 세계관 전체를 샅샅이 복기해봐야만 할 것이다. 아마도 그건 존 패트릭 셰인리가 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쓰게 된 가장 중요한 목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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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를 겨냥한 영화가 줄줄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2009년 골든 글로브 주요 4개부문 노미네이션/작품상,감독상,남우,여우 주연상--케이트 윈슬렛이 최우수 여우주연상 수상이라니 영화를 보고 나니 좀 의외다!! 성공적인 다이어트에 대한 상이라면 모를까..

1950년대 미국 중산층 부부 프랭크와 에이프릴.겉으로보면 평온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있는 부부지만 전직 연극배우 출신이었던 에이프릴은 권태감에 사로잡혀 있다.더구나 조용하기만한 교외 생활도 그녀에겐 맞지 않았고..그래서 그녀가 제안한 파리생활!그러나  누구봐도 비현실적이고 황당하기만 한데.. 

풍만했던 케이트 윈슬렛의 슬림한 몸매가 볼거리라면 볼거다.언제나 날카롭고 비수같이 쏘는 디카프리오의 눈빛과 대사도 일품이고..부부가 으르렁거리고 싸우는 모습도 재미있다. 

임산부역의 윈슬렛이 끊임없이 피워대는 담배와 물처럼 마시는 술은 얼마나 신경을 거슬리는지(사실은 이유있는 행위였지만) 아이엄마로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일탈과 허황된..감상적인 파리에 대한 환상도 전혀 공감하지 못하겠고 죽음에 이르게한 무모한 행동은 더더구나 ..그러나 멋진 집에서 아이를 잘 키우며 남편의 승진이 자신의 사회적 성공인양 행복해 하는 아내가 있는가 하면 평범한 삶보다는  자신의 꿈을 펼치며 이상적인 삶을 사는 것을 더 큰 인생의 가치로 두는 아내가 있을 수 있다. 영화는 인생의 양 갈래길에 처한 부부의 선택의 문제와 소통의 문제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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