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닷컴] (글=이동진) 유하 감독의 ‘쌍화점’(12월30일 개봉)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후 작품들 중 개봉 전부터 가장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한국영화일 것이다. 76억원의 순제작비를 들인 외형적 규모도 규모려니와, 조인성 주진모 송지효를 망라한 스타 캐스팅도 화려하다. 게다가 이 작품은 오래 전부터 베드신의 표현방식을 비롯한 갖가지 소문들로 들썩거렸다. 그렇게 숱한 기대 속에 기자 시사회를 통해 뚜껑을 연 ‘쌍화점’은, 순도 높은 멜로 영화였다.
원나라의 압박이 심한 고려 말. 왕(주진모)의 호위를 담당하는 건룡위의 수장인 홍림(조인성)은 왕을 시해하려는 괴한들의 공격을 물리친 뒤 배후를 파헤치려 애쓴다. 왕후(송지효)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없다는 것을 빌미로 원나라가 후계 문제에 대해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하자, 왕은 스스로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인 홍림에게 명을 내려 동성애자인 자신 대신에 왕후와 합궁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합궁 이후 뜻하지 않게 왕후와 홍림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세 사람의 관계는 격랑 속으로 빠져든다.
‘쌍화점’의 베드신 수위는 과연 높다. 초반에 등장하는 동성애 장면은 스타로서 두 배우의 위상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격적이다. 중반 이후 여러 차례 나오는 홍림과 왕후의 동침 장면 역시 강력하다.
하지만 표를 사게 만드는 ‘쌍화점’ 인력(引力)의 일정 부분이 설혹 베드신을 둘러싼 궁금증이라고 해도, 극장을 나서면서 관객의 마음 속에 남게 될 것은 온통 휘몰아치는 영화 속 격정이 남긴 침전물들일 것이다. 이 영화 속 연인들은 욕망의 대로 위에서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며 몸이 이끌어가는 대로 사랑을 하며 열정과 혼돈을 겪는다. 이를 테면 ‘쌍화점’은 뜨거운 몸뚱이를 가진 인간들의 성정이 서로 부딪치며 아우성치는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버티어 서 있으려는 영화다.
이 영화에 정면 클로즈업 쇼트가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하 감독은 그런 감정의 회오리를 정면으로 부릅뜬 채 바라보려 한다. 그러니 여기서 베드신은 단지 눈요기거리나 양념이 아니다.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이기에, 배우들이나 감독 모두 물러설 수 없었을 것이다.
동성애 모티브와 왕실 사극이라는 장르는 이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라 낚시 바늘에 가깝다. 그 둘은 열정이 빚어내는 고전적 비극을 좀더 신선하게 다뤄내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아울러 그것들은 사랑으로 뭉뚱그려진 채 그 속에 뒤섞여 온통 들끓고 있는 요소들을 좀더 극한까지 밀어붙여 살펴보기 위한 감정의 입자가속기 같은 장치이기도 하다. 그 극단적인 전개와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풀어내는 사랑의 양상은 사실 전형적이다. 솟구치는 현재의 격정 앞에서 때때로 사랑의 역사는 초라해진다.
언뜻 이야기의 틀에서 ‘왕의 남자’나 ‘황후화’가 먼저 떠오르고, 특정 모티브는 ‘천국의 나날들’이나 ‘음란서생’을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처음 달려들 때 튀어오른 후 온 몸을 실어 칼을 내리치는 식으로 파워를 강조한 액션 스타일은 ‘트로이’를 참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 정서와 표현방식에서 진짜로 염두에 두고 있는 작품은 ‘색, 계’일 것이다. ‘쌍화점’과 ‘색,계’는 결국 같은 말을 한다.
이 영화의 주연 배우들은 변신의 정도를 넘어서,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걸고서 연기한다. 아마도 이 세 배우의 연기력이 여기서 절정의 기량을 보여줬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되돌아본다고 해도 후회나 부끄러움이 전혀 없을 성실한 연기로 박수가 아깝지 않도록 만든다. 작품 안에서 배우와 감독의 전적인 신뢰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인상적인 일이다.
제작비의 규모를 여실히 드러내는 ‘쌍화점’의 영상은 충분히 매끄럽고 고급스럽다. 멜러로서 극중 인물들의 절실한 감정이 관객의 코 앞에까지 육박해오는 부분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두 시간이 훨씬 넘는 긴 상영 시간 내내 긴장감 넘치지는 않는다. (기자 시사회 후 이 영화는 러닝 타임을 조금 줄이는 방식으로 재편집되었다고 한다.) 극 전체의 리듬을 살리지 못해, 갈수록 고조되어가는 인물들 심리의 궤적에 객석이 고스란히 조응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연출의 세기(細技)에 비해 직접적으로 감정을 확인하는 대사들이 너무 많은 것은 일종의 노파심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영화의 후주(後奏)는 관습적이다. 하지만 ‘쌍화점’만큼 결이 우아하고 감정적으로도 농밀한 멜로를 만나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