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닷컴] (글=이동진) 에드워드 즈윅(‘가을의 전설’ ‘라스트 사무라이’)이라면 독특하고 유장한 소재 앞에서 관객보다 먼저 감상에 젖었을 것이다. 론 하워드(‘뷰티풀 마인드’ ‘파 앤드 어웨이’)라면 1억5000만 달러의 제작비 규모에 들떠 스펙터클한 장면 연출에 좀더 집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데이빗 핀처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2월12일 개봉)를 만들면서 흥분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시간을 거슬러 유영하는 한 남자의 삶이 지닌 결을 고스란히 살려내는데 집중했다.
실크처럼 매끄럽고 벨벳처럼 우아한 이 영화의 질감이 단지 표면적인 스타일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핀처는 무엇보다 이 이야기를 바다에 도달해 소멸하는 강물의 도도한 여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설령 거꾸로 흐른다 해도, 시간은 (그리고 삶은) 여전히 흐른다.
80세 노인의 얼굴을 가진 벤자민은 태어나자마자 버려진다. 양로원에서 일하다가 아기를 발견한 퀴니(타라지 헨슨)는 벤자민을 자식처럼 키운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이를 거꾸로 먹으며 점점 젊어지던 벤자민은 어린 소녀 데이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을 느낀다. 벤자민(브래드 피트)은 선원으로 세상을 떠돌면서도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에게 지속적으로 소식을 띄운다. 전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온 50대 외모의 벤자민은 어느새 성숙한 처녀가 된 데이지와 재회한다.
데이빗 핀처는 항상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만의 폐쇄적인 공간(‘패닉룸’)에서 공상(‘파이트 클럽’)을 하거나 게임(‘더 게임’)을 하는 듯한 그의 영화 세계는 블록버스터 속편(‘에일리언 3’)을 만드는데도 주인공을 죽이는 비극적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경찰의 이야기(‘세븐’ ‘조디악’)를 다룰 때조차 폐곡선 안에서 음울하게 맴돌며 끝을 맺었다.
그런 그의 신작이 유려하고 따뜻하며 관조적이고 낙관적인 동화 한 편이라니! 핀처의 팬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놀라게 될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말하자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핀처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로버트 저메키스의 ‘포레스트 검프’ 같은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이 영화에 착수하기 직전 아버지를 잃었던 핀처 개인의 경험도 크게 작용했다. 감독 이력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색깔을 고려할 때, 데이빗 핀처에게 이 작품이 지니는 의미는 팀 버튼에게 ‘빅 피쉬’가 갖는 의미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점은 80년의 세월을 제한된 상영시간 속으로 압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쇼트와 쇼트, 신과 신 사이를 연결하는 바늘 땀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모든 기술적 요소들은 만남과 헤어짐이 수도 없이 교차하는 벤자민의 삶을 하나의 리드미컬한 흐름으로 멋지게 요약하는데 성공했다.
극 초반 거대한 시계의 바늘이 역방향으로 가면서, 화면도 거꾸로 진행되어 전사했던 아들이 부모 품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에서는 핀처의 화려한 표현력을 확인할 수 있다. 수많은 변수가 작용해 교통 사고가 발생하게 되는 상황을 설명하는 장면은 (비록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 도입부를 떠올리게 하지만) 물 한 방울 새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장악력을 과시한다. 벤자민이라는 특수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머물지 않고 그 여운을 보편적인 영역으로 확장하는 라스트 신의 울림도 크다. 아울러 이 영화의 특수분장은 이토록 기이한 설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만들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하지만 뛰어난 연출력에 비해서 이 영화의 각본은 그리 훌륭하지 못하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모티브가 지닌 강력한 동력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경우에 따라선 좀 지루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것은 166분이나 되는 긴 러닝 타임 때문만은 아니다. 이야기의 틀을 채우는 구체적 에피소드들과 그 에피소드들을 응축하는 대사들이 미진하거나 중언부언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브래드 피트는 충분히 멋지고 성실하다. 그러나 다소 단조로운 톤으로 캐릭터를 소화해낸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브래드 피트가 2월22일 열리는 제8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장에서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받는다면 아마도 고개가 약간 갸웃거려질 것 같긴 하다.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물론 훌륭하다. 하지만 이 시대 가장 재능있는 여배우 중의 하나인 케이트 블란쳇이 이보다 더 뛰어나게 연기한 작품을 꼽아보자면 다섯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영화의 종반부에선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의 딸인 샤일로가 특별출연하기도 한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멜로 영화가 아니다. 그리고 노인으로 태어나 아기로 죽어간다는 모티브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아이디어의 기발함이나 판타지의 대리만족이 아니다. 이것은 헤어짐을 삶의 본질로 이해하게 되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벤자민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보내고 또 떠나 보낸다. 그리고 종국엔 자신이 떠날 준비를 한다. 그렇게 한 인간이 마지막으로 이별하게 되는 것은 결국 시간 그 자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