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책에서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저자(와 때론 역자)의 말까지 끝난 뒤엔 보통 뭐가 남아있을까? 인문과학서적을 읽는 분이라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친절함이 넘치는 책이라면 용어 해설이 실린 경우도 있지만 보통 주석, 참고문헌, 찾아보기(인덱스)가 실려있다. 이것은 인문과학서적의 기본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주 드물게 참고문헌 목록에 실린 책중 한국어 번역본이 있는경우 한국어 제목과 원서 제목을 같이 적어두는 번역서도 있는데 출판사가 그 책에 들인 정성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예전에 과학 번역서를 다 읽은 후 순전히 재미삼아 참고문헌중에 한국어 번역본이 있는지, 있다면 제목이 뭔지 찾아본적이 있는데 5줄을 채 못 넘기고 포기했었다. 내가 요령이 부족한 탓도 있었겠지만 보통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 아니었고, 우리나라 과학서적 판매량에 그 중 참고문헌 페이지를 꼼꼼히 읽을 사람이 몇이나 될지 더해 생각해보면 숭고하지만 보람없는 노력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확실히 참고문헌과 찾아보기 페이지는 책 본문에 비해 독자의 눈길이 덜 닿는부분이다. 그렇긴 해도 나는 찾아보기에는 꽤 집착하는 편인데, 책을 읽다가 잘 모르는 용어가 나오거나 앞에서 분명히 언급된 내용인데 기억이 잘 안날 때, 그리고 제일 중요한 ‘책 다 읽고 키워드 복습’용으로 찾아보기 페이지를 쏠쏠히 보기 때문이다. ‘책 다 읽고 키워드 복습’은 말은 거창하지만, 그저 책을 다 읽은 후에 찾아보기를 보면서 ‘ㄱ’부터 순서대로 실려있는 용어의 의미와 인명의 업적, 그리고 그것들이 책의 어떤 부분에서 어떤식으로 언급 됐는지를 떠올려 보고 기억이 잘 안나면 해당 쪽으로 돌아가 다시 읽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책을 읽을 때 문장의 흐름에 휩쓸려 이해한 것으로 착각했던 용어들을 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종종 깨달을 수 있다)

그렇기에 도서관에서 빌린 ‘생명, 경계에 서다’를 읽다 ‘비편재화’라는 용어를 찾기 위해 찾아보기 부분을 처음 펄쳤을 때 몹시 당황했다. ㅂ 부분에 ‘비편재화’라는 단어가 없었다. 나는 그렇다면 ‘편재화’는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전자 비편재화’는? 없었다. 심지어 ‘전자’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경악스럽게도 ‘생명, 경계에 서다’의 찾아보기에는 과학 용어는 단 하나도 실려있지 않았다. 오직 인명과 책 제목 뿐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다른 찾아보기가 있으리라 믿었다. 어떤 책들은 인명 찾아보기와 용어 찾아보기를 따로 싣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다른 찾아보기는 없었다.
과학책인데? 찾아보기에 용어가 없다고?
이건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나는 한 번 더 마음을 가라앉히고 원서가 문제일 가능성을 떠올렸다. 원서의 찾아보기가 원래 ‘그딴식’이었다면 번역서 출판사는 원서를 충실히 따른 죄밖에 없다. 나는 구글 북스에 들어가서 ‘생명, 경계에 서다’ 원서를 찾아 index를 검색해봤다. 그러자 용어가 아주 충실히 실린 인덱스 페이지가 검색되었다.
그렇다는건 원서에 있던 말짱한 인덱스를 한국 출판사가 완전히 무시하고 편집과정에서 잘라냈다는 이야기다.
아니 왜?

이 책은 글항아리의 과학 전문 브랜드 ‘글항아리 사이언스’의 첫 책이다. 출판사의 흥망이 달린 첫 책이라면 보통 정성에 정성을 다해 준비하리라. 나도 그런것을 기대하고 책을 읽었다. 책의 내용은 비교적 새로운 분야라 할 수 있는 양자 생물학이란 무엇인지, 양자 생물학의 과학적 예측과 그 예측의 검증과정,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을 충분히 잘 다루었다. 입문서로써는 망설여지지만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충분히 추천할 만한 책이었다. 그런데 부실한 찾아보기 때문에 이 책 전체의 완성도가 신뢰할 수 없는 수준으로 붕괴되어 버렸다.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출판사를 실컷 욕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일어날법한 일이 아니다. 용어가 실리지 않은 찾아보기라니? 그것도 과학책에? 자신들이 과학책을 만든다는 자각이 있는 출판사라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 사태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렇다. 내가 도서관에서 빌린 ‘생명, 경계에 서다’는 용어가 실린 찾아보기 페이지와 용어가 실리지 않은 찾아보기 페이지가 양자 중첩상태로 있었다. (어쩌면 여기에 더해 아예 찾아보기가 없는 상태도 있는, 즉 페이지의 삼중항 상태였을지도 모른다)그러나 나의 관찰로 인해 양자 결맞음이 무너져 용어가 실리지 않은 찾아보기 상태로 붕괴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 양자적 움직임이 증폭되어 거시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만 것이다. 그러니 이젠 돌이킬 수 없다.
부디 또 다른 우주에 살고 있을 나는 용어가 실린 찾아보기 상태로 붕괴된 ‘생명, 경계에 서다’를 읽고 행복하기를. 이 세계는 이미 글렀으니. 너만이라도 STAY......


PS. 이 글에서 ‘삼중항’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생명, 경계에 서다’에서 ‘삼중항’이란 용어가 사용된 부분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책 속에서 이 용어를 찾으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왜냐고? 찾아보기에 안 나와있으니까!!
휴, 누굴 원망하랴. 양자 뽑기에 실패한 자신을 탓해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