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 최영미 산문집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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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일기는 밀린 숙제같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긴 방학이 끝날무렵이면 밀린 방학 숙제들 사이로 제일 처치 곤란이었던 밀린 일기는 날씨를 지어내기도 힘들고 때로는 모아둔 신문을 쌓아놓고 날씨를 체크해가며 글짓기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던 그런 숙제.  그런 일기가 나이를 먹어 사춘기가 되었을 즈음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를 품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도 해마다 적는 다이어리라는 노트에 마음을 토해내고는 하지만 가끔 어린 시절 글짓기처럼 누가 훔쳐보는 것도 아닌 그 노트에도 글짓기를 하고 있는 절 보기도 합니다.  '이랬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사항이 가장 크겠죠?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 소망,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내 마음들.  혹여 누군가 보게 된다면 부끄러울지도 모를 그런 유치한 글 들까지도 품어주는게 '일기장'이 아닐까요?  책을 구입한지는 꽤 된것 같은데 읽어야지 하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봄바람 불던날 꺼내보았어요. 

 

 

해외에 사는 동포가 모국에 방문한다면 대한민국 입국신고서를 제대로 쓸 수 있을지 나는 의문스럽다.  외국을 드나들 때마다 출입국 신고서의 빈칸을 채우는 게 내겐 스트레스다. /p29

 

 

마흔을 넘기면서 나는 사회의 상식을 존중해야 살기 편하다는 이치를 터득했다.  존경받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욕을 먹지 않기 위해서는 나이에 걸맞은 처신을 해야 한다.  그런데 남들처럼 말하고 행동하려 조심하다보니, 도가 지나쳐 병이 날 지경이었다. 도가 지나쳐 병이 날 지경이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 /p67

 

 

최영미 시인이 여러 지면에 기고한 칼럼과 수필, 그리고 2000년에 출간된 산문집을 모아 재 출간된 책이라고 합니다.   책을 읽다보면 '이 작가의 다른 글은 어떤 느낌일까?'하고 궁금해 지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소설이나 에세이가 아닌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이 작가의 시는 어떨까? 라는 궁금증을 갖게 되었습니다.   출입국 신고서 에피소드를 읽으면서는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라는 위안과 동시에 '이 사람도 그런 고민을 하는구나. 그럼 다른 사람들도..?' 하며 웃기도 했습니다. 

 

 

서른 살은, 특히 한국에서 여자 나이 서른 살은 단순한 나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강이다.  아직 젊음의 불꽃이 남아 있을 때 있는 힘을 다해 생을 한번 뒤집어볼 수 있는, 도박을 할 수 있는 나이.  주사위는 던져졌고, 당신은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야 한다.   /p149

 

 

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은, 독신으로 늙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흔히들 추측하듯 외로워서라기보다 가족 중심으로 편성된 사회에서 살며 알게 모르게 받는 불이익과 생활의 불편함이 크기 때문이다.  /p167

 

 

한국처럼 획일적인 삶을 강요하는 꽉 막힌 사회에서는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건 하나의 형벌일 수도 있다.  /p176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았던 작가의 삶이 어쩌면 다른 이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며 더 많은 시련과 생각을 하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라는 무게, 그리고 한국에서 독신여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독백은 그러한 삶을 먼저 살아보았고 자신이 터득한 노하우(?)를 재치있게 이야기하며 웃어넘기는 그를 보며 그렇게 되기까지 마음다지기를 얼마나 했을까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가볍게 읽어낼 수도 있었을 책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제 나이보다 조금 더 먼저 살아낸 언니의 삶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더니 언니가 끄적여놓은 글들을 읽어본 듯 하기도 했습니다.  짧지만 한 권의 책을 통해서 앞으로의 길을 조금이나마 본 것 같아 아끼고 또 아껴두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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