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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집
기시 유스케 지음 / 창해 / 2004년 8월
평점 :
읽은 지 1년이 훨씬 넘는 책의 리뷰를 이제서야 쓰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2주쯤 전에 주간 영화잡지를 하나 샀는데, [검은 집]의 촬영 현장 스케치 기사가 있었고, 그 다음 페이지에는 저자인 기시 유스케의 인터뷰가 실려있었다. 작년 9월 이후로 영화 관련 잡지를 모조리 중단한 상태라 오랜만에 사는 잡지다. 그래서 [검은 집]의 영화화 소식을 뒤늦게 접한 나는, 게다가 '한국에서의 영화화'라는 소식에 '정말?'하는 놀라움과 '우와, 잘 됐다!'하는 반가움의 반응을 동시에 보였던 것 같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이거 영상화 하면 진짜 무섭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일본에서는 이미 영화화 된 작품이지만 이왕이면 한국의 실정에 맞춰서 새로 영화화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랬는데 그런 바람이 현실로 나타났다. 오오, 기대되는데? 그래서 생각난 김에 책장 깊숙히 자리한 이 책을 다시 꺼내어 재독했다.
이 책...다시 읽어도 무섭다. 추리 소설은 좋아해도 호러(혹은 공포) 소설에는 별 관심이 없는 내게, 이 소설은 일찍이 이런 느낌을 주는 소설이 있었나 싶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말로 표현하기 참 궁색한데, 한마디로 오감을 동시에 자극하는 소설이라 해야하나. 텍스트 만으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영향을 미친다. 시각이라면 상상력을 발휘하면 그럴 수 있다 쳐도 나머지 감각까지 자극하기란 쉬운 법이 아닌데, 이 소설은 그렇다. 특히 후각적인 자극이 상당한데, 소설에서 묘사되는 '검은 집에 배어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악취'에 대해서는 실제로 그런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 질 정도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코를 막고 있는 내 모습.; 공교롭게도 책을 처음 읽었던 때가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되는 여름(그것도 장마철)이었던 데다 새벽이었어서 그런지, 스윽스윽 하는 칼부림 소리나 어두운 복도를 따라 왼발을 질질 끌며 점점 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도 많이 들었었고, 찝찌름한 피맛이 느껴진다거나 두 팔이 절단된 등장인물의 고통이 느껴지기도 했다. 우연치고는 책을 읽는 환경적 조건이 참 잘 맞아들었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이 책은 호러소설로서 더할 나위 없는 작품이다.
책은 보험회사를 무대로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보험금을 노린 '비속살인사건'의 형태로 극이 전개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예상은 빗나가고, 크고 작은 반전이 더해지면서 흥미를 더해간다. 시간적 배경은 1996년 4월경, 사건이 일단락 되는 것은 8월이다. 약 4,5개월 동안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에는 복잡한 사회 문제와 인간 심리, 내면적 가치의 충돌, 유전적 요인과 환경의 대립, 꿈의 해석 및 정신역학, 생물학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사이코패스'에 관한 대목이다. (책에서는 '사이코파스'라고 씌어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영철 사건'으로 이 개념이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졌는데, 단순히 정신질환의 일종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 개념은 '반사회적 성격 장애'의 특징을 지닌다. 사이코패스는 비도덕적,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두고 유전자 형질의 변이다, 환경적 요인이다, 때로는 복합 작용의 결과물이다 등등 설이 많은데, 소설에서도 역시 그와 관련한 대화들이 오고 간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놓인 그들에 대해, 소설에서는 비관적인 견해를 보이지만 메구미의 대사를 통해 희망의 끈도 놓지 않고 있다.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인 동시에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검은 집]은 각 4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에필로그가 추가되어 있는 게 특징인데, 제 1장이 도입부라고 한다면 제 2장은 사이코패스가 소제목으로 쓰인 만큼 그에 대한 문제 의식이 돋보이는 장이기도 하다. 2장부터 3장에 걸쳐서는 소설의 가장 큰 주축을 이루는 장으로서, 심리학이나 꿈의 해석에 꽤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아주 흥미진진한 장이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장이었다. 4장은 호러소설이란 타이틀에 가장 부합하는 장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스릴감있는 전개 때문에 상상력에 제동이 안 걸리는 바람에 너무 무서워서 클라이막스에서는 작게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그래서 재독할 때는 낮에 읽었다. 그래도 난 무섭더라..;;) 에필로그는 사건을 정리하는 장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장이다. 마침표를 찍었지만, 그 뒤로 주욱 이어져 선이 되는 그런 느낌을 준다.
다 알고 보는데도 이 소설이 주는 느낌은 여전히 신선하고, 스릴있고, 무섭다. 그리고 여전히 가슴 한켠이 무거워진다. [검은 집]이 주는 그런 공포감과 문제 의식을 영화에서도 잘 살려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저자의 인터뷰를 보니 한국판 [검은 집]은 많이 각색된 일본판과 달리 정통 스릴러 장르로써 직구승부가 되지 않을까, 한다는데 소설의 팬으로서 기대가 많이 된다. 사회의 무의식을 건드리는 이 공포소설이 한국적인 영상으로 재현되면 과연 어떤 작품이 탄생할 것인가. 현재 60퍼센트 가량 촬영된 상태라는 걸로 봐서 이번 여름에는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아, 6월 개봉이 목표란다. 올 여름에 관람할 첫 번째 공포영화는 이걸로 점 찍었다.
+) 참고로 한국판 영화 출연진이 황정민, 강신일, 유선, 김서형이란다.
세상에! 출연진 너무 마음에 든다. 내가 생각한 이미지에 거의 완벽히 부합된다.
근데; 강신일이 고모다 역이니까, 아무래도 김서형이 사치코 역일 것 같은데... 각각의 역할에는 정말 잘 들어맞을 것 같긴 한데 나이차는 어떻게 극복할 거지? ;;; 소설의 동갑이라는 설정은 좀 무리지 않나? ;;;
...어쨌든 영화에 대한 기대치는 점점 올라가고 있다. (너무 기대하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데..ㅠ_ㅠ)
++) 나중에 얻은 정보에 의하면 사치코 역은 '유선'이 맡았다고 한다.; 정말 의외다. 어울릴지, 안 어울릴지는 일단 영화를 봐야 판단할 수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