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세스 28
한승원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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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 (드디어) 아이들이 자랐어요!

길었다. 정말로 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끝난 게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느낌!?
이슈 창간호가 언제였더라? 1996년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물론 중간에 잠시 연재 중단을 했던 적도 있지만;)줄창 연재해오고 있는 한승원의 프린세스. 예전 같으면 단행본 나오는 날 체크해서 득달같이 사가지고 와서 읽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시들해지더니 이제는 나왔는지도 별 관심도 없고-_-; 웹서핑하다가 한번씩 생각날 때 나왔나, 안 나왔나 검색해주는 정도? (나도 지친거지;) 암튼 그렇게 해서 오늘에서야 28권을 읽었다. 감상? 위의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겠다. 드디어 '프리'가 (쬐끔) 자랐어요! ToT 아아, 길기도 하여라. 근데 별로 좋아할 것도 없는 게, 겉모습은 한 18살쯤 돼 보이는데, 극 설정상 12살이란다. 맙소사. 그럼 얘네 언제 커서 나라 되찾고, 언제 사랑을 하고, 언제 행복하게 되는 거야? 앞으로 또 10년 기다려야 되는 거 아닐까, 하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다 드는 28권이었다.; 그치만 프리는 예뻤다. 비욘과 비이를 똑 닮은 얼굴을 하고, 또 두 사람의 장점만 쏙 뽑아놓은 성격으로 해맑게 웃는데..아, 예쁘구나! 한승원 식 여주인공 특유의 그 눈웃음이라니.. 너무 오랜만이라 순간 내 기분도 좋아졌다. '나 순정만화예요!'라는 티를 팍팍 내주는 한승원의 그림이 그립기라도 했던걸까? 음, 그럴 수도 있겠다. 취향은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향수가 묻어나서 좋은 걸.

28권의 포인트는 딱 2가지다. 첫 번째는 아이들이 자랐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아이들이 운명의 궤도에 올랐다는 것. 즉, 우연이든 필연이든, 알든 모르든 서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프리, 히스, 시벨, 베아트리스, 아레아, 리라.. 과연 이 아이들의 앞날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이대로라면 재회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감격! ToT) 물론 그 전에 부모 세대들의 질기고 안타까운 인연부터 청산해야겠지만, 어쨌든 이제 아이들도 자랐고.. 본격적으로 3세대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전망. 근데 아직도 이야기 진행은 이리 더디기만 하니, 완결은 언제 볼 수 있을지…. 내가 이 만화를 보는 동안 시간은 잘도 흘러 그동안 나는 중학교도 졸업하고,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대학도 졸업했다. -_- 결혼만 빨리 했더라면 애가 '어린이 집'에 갈 나이라고. 바라건대, 계란 한판 채우기 전에는 완결 봤으면 싶다.(근데 별로 희망적이지 않다..;) 그래서 감히 예측하건대, 이 만화.. 잘 하면 '열혈강호'보다 더 길게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흐하, 그럼 순정만화 사상 '최강 장편 서사 만화'가 되는 건가? (뭐 어느 의미로든 대단하구나!; 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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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구혜영 옮김 / 창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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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방과 후가 되면, 선생님의 호통소리와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수다가 마치 악보 기호, decresc처럼 점점 약하게 사그라진다. 그러다 하굣길에 울려퍼지는 하하호호 웃음소리마저 사라지면 학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 속에 잠긴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또 그렇게 학생과 선생님으로 채워지지만 방과 후의 그 고요함과 나른함이란 마치 치열한 전투 끝에 오는 잠시 동안의 휴식시간 같은 그런 느낌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클럽 활동 때문에 바쁠 수도 있겠고, 학원도 가야 하겠고, 해야 할 숙제도 있겠고, 약속이 있어 바쁘기도 할테지만, 어쨌든 방과 후는 학생이나 선생님 모두에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시간. 그런데 어느 날, 방과 후 얼마 지나지 않은 그 평화로운 시간에 한 선생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얼핏 자살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살을 가장한 밀실 살인. 그리고 얼마 후에 또 한 명의 선생이 사고를 당한다. 분위기는 더욱 흉흉해지고, 그전부터 보이지 않는 위협에 종종 시달려 온 마에시마 선생은 범인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한다. 도대체 누가 그 두 선생을 죽였을까? 학생? 아니면 동료 선생? 그것도 아니면 제 3의 인물?

최근 국내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워낙 다작하는 작가이고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긴 하지만, 그동안은 국내에 1년 평균 두어 권 나오는 정도에 불과했는데, 작년에 번역 · 출간된 [용의자 X의 헌신]이 인기를 끌고 그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이 크게 상승하면서, 그의 최근작과 더불어 예전 소설들이 우후죽순 출간되기 시작했다.(여기엔 물론 최근 국내 출판계에 불고 있는 일본 소설 열풍도 한 몫 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책도 그 가운데 하나로, 간략히 소개를 하자면 1985년에 낸 히가시노의 게이고의 데뷔작이자 1987년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인 작품. 한동안 히가시노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가 이번에 데뷔작이 나왔다길래 간만에 집어든 그의 소설은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과 데뷔 소설이라는 풋풋함이 더해져 미스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사과 향기가 날 것 같다. 게다가 표지 일러스트마저 취향. 교복 입은 여학생은 언제 봐도 참 예쁘다니까. (잉? 뭔가 변태 같다.;;;)

20년 전 작품이라고 하지만 전혀 그런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게, 어쩌면 시대를 막론하고 10대의 말투, 행동패턴, 감수성은 보편성을 띠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학교 다니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 모습에 왠지 모를 친근함이 느껴지는 건 절대로 과장이 아니라니까. 선생님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고, 친구와의 관계를 목숨처럼 소중히 하며, 남들 눈을 의식하면서도 가끔은 제 멋대로 살고, 반항을 일삼으며 때로는 수줍음에 말도 제대로 못하는 그런 10대.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그 틈바구니에서 서성이고 있는 그들을 보면, 가끔 '예쁜 상자에 든 유리 인형'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여러 겹으로 포장하고 강한척 애쓰지만 본질은 어쩔 수 없는 유리라서 조금만 상처입어도 균열이 생기고, 심하면 깨지기까지 하는 유리인형.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키려는 것이 조금은 안쓰럽기도 하고.

소설은 그러한 10대 소녀들의 면면이 조각조각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여고생의 섬세한 심리'에 대해 매우 날카로운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걸 보여주는 방식은 어느 순간 다소 뭉툭하게 그려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대전제는 남성 작가 치고 보기 드물게 세심하다. 그걸 바탕으로 곳곳에 깔려있는 복선의 활용, 이중 장치가 된 트릭, 그리고 살인 동기가 드러나는 과정이라든가, 서술 방식, 마지막 나레이션까지.. 데뷔작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굳이 흠을 잡아보라면 못 잡을 것도 없겠으나, 그러한 흠도 20년 전임을 감안한다면 꽤나 신선한 방식. 결국 히가시노가 괜히 인기 작가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만 확고해질 뿐이다.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건, 살해 동기에 관해서인데...이것은 일본 출간 당시에도 꽤 논란이 되었던 사항으로 독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던가 보더라. 그러나 작가가 책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는 '과연 그러한 이유가 살해 동기로 충분하냐, 아니냐' 혹은 '누가 먼저 잘못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마음을 먹을 수도 있는 복잡미묘한 심리에 관한 '이해'에 있다는 것. 그리하여 마지막 챕터에서 마에시마가 이야기하는 '방과 후'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 이 책이 주는 진정한 의미도 가슴에 와닿을 것이다.


덧. 이 책 덕분에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애정이 다시금 퐁퐁 솟아나고 있다. 막 미친듯이 좋진 않아도 언제나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재미를 보장해주시니 정말이지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게다가 이 작가의 책은 이야기의 재미도 재미지만, 스피드 조절이 워낙 능숙해서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가 없어.(세상에 데뷔작부터 이랬다니-_-;) 뭐…잘 됐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사두기만 하고 미뤄두었던 그의 책을 몽땅 꺼내서 읽어버려야지.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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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1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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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명을 다룬다는 점에서 의료현장은 어쩌면 소설(특히 미스터리)의 배경으로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곳일지도 모르겠다. 그곳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기도 하지만, 언제 어떻게 죽어나가도 이상할 게 없는 무시무시한 공간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이 씨실과 날실 교차하듯 얽혀있는 의료현장은 그래서 그 어느 곳보다 치열하고 드라마틱한 공간이다. (물론 세상사가 다 그렇겠지만) 어떤 면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휴먼 드라마가 창출되기도 하고, 살벌한 정치판이 벌어지기도 하며, 무시무시한 공포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병원은 언제나 '가깝고도 먼 당신'. 여기 그러한 병원을 무대로 한 꽤 흥미로운 소설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알게 된 사실 하나, '일본에서는 소아 심장 이식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래서 확장형 심근증을 앓는 아이들과 그 부모는 치료에 애를 먹고 있다. 이에 심장 이식 대체수술로 주목 받기 시작한 게 '바티스타 수술'이라는 것인데, '바티스타 수술'이란 간단히 말하면 비대해진 심장을 잘라내 작게 만든다는 매우 단순한 발상에서 착안한 수술로, 정식 명칭은 '좌심실 축소 성형술(Partial Left Ventriculectomy)'이지만 창시자인 R.바티스타 박사의 이름을 딴 속칭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바티스타 수술의 대가로 '기류 교이치'란 남자가 도조 대학 병원에 초빙되어 오는데, 기류는 미국 유학파로 병원에 오자마자 최강의 수술팀을 구성, 주위의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는 실력과 성과를 거두며 일약 대스타로 발돋움 한다. 병원의 명성은 높아만 가고, 어린 새싹들에게도 희망이 보인다며 미디어는 흥분을 했다. 그런데 수술 성공률 100%로 이른바 글로리어스 세븐이라 불리며 명성을 떨치던 기류 팀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한 건 케이스 27부터. 처음으로 수술 중 사망이 발생했다. 애초에 리스크가 큰 수술이었으므로 수술 중 환자가 사망한다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케이스 28을 제외한 29, 30에서도 연달아 환자가 사망하자 위기감을 느낀 기류와 다카시나 병원장은 자체 내부 감사를 의뢰하기로 한다. 공식 리스크 매니지먼트의 가동이 아닌 자체 내부 감사를 의뢰하기로 한 것은, 이 사건이 의료 미스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한 악의적인 사망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행동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다구치 고헤이가 내부 감사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홍보 문구를 보니, 제 4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대상 수상작이라는 그럴듯한 메인 타이틀에, 주간문춘 선정 <2006 걸작 미스터리 베스트10> 3위 입상작이라는 부가 타이틀까지 획득한 책이란다. 업계에서는 쟁쟁한 선배들을 제친 무서운 신인 작가가 탄생했다며 그를 반겼고, 독자 반응도 매우 좋아서 신인 작품 치고 이례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는데... 그런 만큼 일단 대중적인 재미에 있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읽어보니 이거이거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데다 묘하게 취향에 맞기까지 해서 뜻밖에 횡재한 기분. 그리고 의외였던 건 책을 다 읽고 지은이 소개를 보다가 발견한 것인데, 이 책을 쓴 '가이도 다케루'의 직업이 전업 작가가 아닌 현역 의사라는 사실이었다. 헛, 뭐야 이 사람! 의사 선생님이 글 쓰는 재주까지 출중하잖아!? 내용이 내용이니 만큼 병원 사정을 그림 그리듯이 묘사하는 게 매우 탁월해서, 책을 처음 읽을 때부터 작가가 의료계 종사자거나 그 비슷한 분야에서 일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현역 의사라니 도대체 그 바쁜 와중에 글은 언제 쓴 거래? 일본은 한국 의료계 사정과는 달리 여유가 좀 있는 걸까? 어쨌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처럼 보이는 투잡족의 저자를 보니 약간의 부러움과 질투가 나기도.

(역자 후기에서도 언급하는데) 사실 이 책은 미스터리 소설로 분류된다고는 하지만, 실은 잘 만들어진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의 기능이 더 훌륭하다. 그래서 미스터리의 분위기만을 한껏 기대하다가는 자칫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흐름 자체가 긴장감 보다는 적정 수준의 호기심 유발에서 그치고, 범인과 범행 이유가 밝혀지는 일련의 과정도 조금 성급해서 그간의 사건을 마무리 한다고 보기엔 다소 미흡한 감이 있지않나, 하는 생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약점을 덮어줄 수 있는 반짝반짝한 매력 -다구치가 내뱉는 서술어들이나 인물들의 대사는 순간순간 놀랄 만큼 예리하고 흡인력이 강하다- 이 소설 곳곳에 포진해 있어서 다 읽고 나면 개인적인 취향과는 상관 없이 최소한 '재미는 있었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책이니 적어도 돈이 아깝지는 않은 작품. 특히 병원이라는 소사회를 배경으로 하다보니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나오는데, 그걸 동물이나 곤충에 비유하는 다구치의 방식이 참 재미있어서 몇 번이나 키들거리고는 했다. 때로는 얼굴 찌푸려지고, 때로는 공감하게 되는 그런 인간 군상들을 한 큐에 설명하는 비유법. (과연 나는 어떤 동물에 비유할런지 물어보고 싶군.)

이 밖에도 작품의 매력을 꼽자면, 작가는 화자인 다구치 외에 또 한명의 주연급 주인공을 배치하고 있는데, 그의 이름은 '시라토리 게이스케'. 이 소설의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 싶다. '후생노동성 장관 관방 비서과 부속 기술관'이라는 정말로 있는지 어떤지 모를 직함을 가진 공무원, 시라토리. 아르마니를 입고 있지만 딱히 품위가 있어보이지는 않고, 기름을 발라 뒤로 빗어넘긴 머리때문인지 그의 이미지는 한 마리의 바퀴벌레. 일부러 잘난 체를 하는 건지 원래 그런 건지 알 수 없는 말투에, 상대방이 말끼를 못 알아 듣는다 싶으면 가차없이 면박을 주고, 그래놓고 칭찬인지 뭔지 모를 말을 허허거리며 내뱉는 남자. 비상한 머리와 집요함, 타고난 배짱으로 웬만한 탐정 저리가라,하는 인물. 사실 화자가 '다구치'이기에 2부에서야 나타나는 '시라토리'에게 왠지 모를 적개심(?)을 느꼈더랬다. 게다가 좀 특이해야 말이지. 첫 만남부터 '난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늘어놓는 말들이나 일본인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직설화법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그러면서도 후일담에서 다구치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 내용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의바르고 단정한 느낌을 주는 것을 보면, '이 사람 어쩌면 의외로 수줍은 성격일지도 모르겠군!' 하는 생각이 들기도. 일종의 '츤데레' 타입이라고나 할까? 훗. 여튼 작가 소개에 따르면 이 소설 이후, 독자들의 끊임 없는 요청으로 시라토리가 등장하는 다른 소설도 몇 권 출간했다고 하니, 확실히 인상에 남는 캐릭터이기는 한 모양.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고 싶다.

뜨거운 여름 날, 더위도 식힐 겸 책은 읽고 싶은데 뭘 읽어야 좋을지 모를 때, 출세에는 관심 없고, 외따로 떨어진 외래진료소에서 환자를 돌보며, 쉬는 시간에 커피나 마시며 인생을 즐기는 게 낙인 만년 강사, 다구치와 안하무인인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사람 좋은 시라토리의 콤비 플레이(과연..;)가 보고 싶다면, 이 소설 추천한다. 그러고보니 표지에 그려진 인물들... 다 아는 사람이잖아? 으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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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신검시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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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선정작품이라고 광고를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스터리로서의 대단함만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공산이 크다. 미스터리의 신비함이나, 긴장감, 스릴을 기대하기엔 너무나 따뜻하고, 인간적이니까. 장르의 구조를 착실히 따르면서도 그 안에 감도는 분위기는 기존 미스터리의 그것과는 달리 훈훈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띠지에 큼지막하게 쓰여진 "영미추리소설에는 없는 따뜻함이 있는 소설"이란 문구가 좀 상투적이긴 해도 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미스터리'와 '따뜻함'이 쉽게 어울릴 법한 말이었던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사실 '미스터리'라고 하면 싸늘하고, 어두우며, 약간 비린듯한 냄새가 풍겨야 제 맛이이지 않나? 그런데 따뜻함이라니...이 오묘한 이질감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소설이 여기 있다.

구라이시 요시오, 52세.
'L현경 수사과 검시관'이란 직함을 가진 이 남자는 다년간의 현장 경험과 뛰어난 검시 능력으로 '종신검시관'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이 분야에서는 자타공인 최고다. 창처럼 가는 몸으로 예리한 눈빛을 반짝이는 그는 실력대로라면 출세도 탄탄대로였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은 모양. 야쿠자 같은 말투, 조직의 위계 따위 쌈박하게 무시하는 태도, 동료 및 후배에게는 무뚝뚝, 상사에게는 거침없이 막말, 그러면서도 바른 말을 일삼아 윗 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그의 행동은 조직에 머물러 있기에는 껄끄러운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실력은 (특히 시체감정에 있어서) 감히 '감식계의 총아'라고 할 만큼 대단한 것이어서, 심지어는 그를 '교장'이라 부르며 따르는 추종자까지 생겨나기에 이른다. 이쯤 되면 호기심이 슬쩍 고개를 든다. 이 사람 대체 뭐야?

[종신검시관]은 8개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형식 소설로, 사건과 사체, 감식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나 전체를 아우르는 큰 스토리가 없다는 점에서 그다지 유기적인 구성이라고는 볼 수 없고, 각각의 단편에 '구라이시'라는 검시관이 등장하여 크고 작은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 정도가 공통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 소설이 구라이시의 활약상을 집중 조명한 '영웅 일대기'식인가,하면 그건 또 아니다. 각각의 단편에서 구라이시가 나오는 부분을 되짚어 보면, 오히려 조연에 가깝지 않나, 싶을 만큼 이야기의 변방에 자리하는데, 그런 조건에서도 구라이시가 돋보이는 이유는 역시 캐릭터 자체의 비범함과 함께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보는 이의 마음에 와닿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말하는 '괴짜'형 인간인 구라이시는, 주위의 시선 따위 안중에도 없는 인물로, 그가 믿는 것은 오직 장인 기질에서 오는 투철한 직업 정신과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배려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트릭이나 원인을 파헤치는데 심혈을 기울이면서도 그 속에 인간이 있음을 잊지 않는 인물이다. 이는 구라이시 캐릭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자 이 소설이 가진 '따뜻함'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 책의 최대 매력이자 구라이시가 소설 속 후배나 동료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일테지.

8개의 단편들은 유기성이 약한 대신 각각의 이야기가 매우 독립적으로 기능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완성도 면에서도 뛰어나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글쎄… 조금 회의적이다.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나 스토리 자체는 매우 흥미로운 반면, 구성이 다소 산만한 경향이 있어 전체적으로 응집성이 조금 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몇몇 이야기는 디테일을 강화해서 장편화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짧은 분량 안에 최대한 많은 얘기를 담아내고 싶었던 탓인지 늘어놓은 이야기에 비해 마무리가 조금 미진한 느낌도 들고. 이는 캐릭터나 사건 자체는 돋보일 수 있어도, 간결하고 깔끔한 뒷맛이 생명인 '단편 소설'의 속성을 생각해보면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에피소드가 쉬이 잊혀지지 않고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래도 작가의 소재 발굴 능력과 캐릭터의 매력, 그리고 앞서 얘기한 '따뜻함'과 '인간애'라는 키워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로 담아내기에는 어딘가 추상적이고 진부할지는 몰라도 그것이 마음을 울리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더라. 실제로 내 경우는 책을 읽으면서 결국 티슈까지 뽑아 들어 눈물을 닦았으니 말이다.

[종신검시관]은 장르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독자의 감성까지 건드린다는 면에서 무척 매력적인 소설이다. 그러고보면 이 책은 일종의 '휴먼 미스터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매우 마음에 든다. 얼핏 안하무인에 가까운 행동에 딱히 자상하거나 사근사근한 맛도 없는 고집 센 말라깽이 경찰 아저씨, 구라이시! 그래도 이 사람이라면 의지가 된다. 사건이 발생하면 앞뒤 잴 것 없이 무조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 한 달여의 짧은 기간이었다 하더라도 어찌됐든 부하였던 고인을 위해 완벽했던 자신의 업적에 흠집을 남기면서까지 수사를 하는 구라이시의 모습은, 저런 사람이 내 상사라면 (좀 과장해서) 목숨 바쳐 일할 수 있겠다는 각오까지 들게 했다. 이것이 내 얄팍한 감수성 때문이라 할지라도 그 때의 솔직한 내 느낌은 그랬다. 그래서일까, 그의 깡마른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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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당신의 드라마다 - Heroine 김윤진의 할리우드 도전기
김윤진 지음 / 해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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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초에 읽은 책 ::

내가 느낀 김윤진의 이미지는 어떠냐면, 널리 알려진 '쉬리'의 여전사 이미지 보다는, 드라마 '예감'에서의 커리어우먼 이미지가 더 강했다. 97년에 방영한 미니시리즈 '예감'은 당시 굉장한 인기 드라마였고, 나 역시 꼬박꼬박 시청했던 드라마 중 하나였는데, 내용은 여자 주인공(이혜영)의 성공스토리와 사랑이야기다. 지금이야 그런 스토리가 흔하지만 그때에는 여주인공을 (거의) 원톱으로 내세운 드라마가 별로 없을 때여서 굉장히 신선했었다.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이혜영이 죽자사자 뛰어다니는 모습이다. 드라마 한 회당 평균 15~20분은 뛰는 장면이었던 것 같다. 당시엔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사회생활을 '진짜 발로 뛰어다니는 모습'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걸까.;;; 암튼 이 역동적(?)인 화면들 속에 잠깐씩 등장하는 '김윤진'은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오는 이혜영과 반대로 이미 어느 정도의 커리어를 쌓은 인물로 잡지식 표현대로라면 '쿨하고 시크한 전문직 여성'의 대표적인 모습이었다. 직함도 무려 '실장님'. (우리나라 드라마계에서 '실장님'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이미지가 바로 그려진다.-_-;) 한 마디로 김윤진은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초반에는 꽤 멋있게 나왔다. 후반부에 질투에 눈이 먼 못된 마녀 캐릭터로 전락해서 아쉬웠지만; 하여간 그 전까지는 주인공이 동경의 대상으로 삼을 만큼 멋진 인물이어서 약간의 호감을 가졌더랬다. 첫인상이 그래서일까? 나는 '실제 김윤진도 장실장님 이미지일 것 같아!'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해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지난 달 말에 김윤진이 출연한 모 토크쇼를 보게 되었다. '로스트' 촬영으로 인해 까맣게 탄 피부에 발그레한 얼굴로 시종일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잘 나가는 대스타답지 않은 소탈한 면모와 말투, 딱딱하진 않지만 똑 부러지는 생각과 편안한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연륜에서 오는 푸근함도 좋았고, 대범하고 낙관적인 성격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그녀가 현재까지 이루어 온 커리어까지 더 해지니 플러스 알파가 되고도 남는다. 와, 정말 멋진데!?

김윤진의 책이 나온다고 했을 때, 나는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했다. 기대는 '오오, 그럼 할리우드 도전기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거야?' 하는 마음에서였고, 실망은 '과연 뜨긴 떴군! 책 내는 것 보니… 근데 좀 성급한 거 아닌가?' 하는 약간 회의적인 생각에서였다. 그래도 [세상이 당신의 드라마다]라는 제목 하나는 참 마음에 들더라. 세상이 나의 드라마라니… 아, 뭔가 로맨틱하고 격정적이다. 나는 '드라마'라는 말을 좋아한다. 흔하디 흔한 일상이 특별함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왠지 모를 짜릿한 흥분이 느껴지는 단어다. 그런 드라마를 세상을 무대로 펼친단다. 일단 읽어봐야겠다.

부제가 'Heroine 김윤진의 할리우드 도전기'이다. 그런 만큼 할리우드 진출을 결심한 때부터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알려져 있다시피 김윤진은 2002년 '밀애'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배우로서 정상을 경험한 그 때에 더 높은 곳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게 뭐?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라고 할 수도 있는데, 내가 보기엔 이거 엄청 대단해 보인다.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이면 그 이후의 배우 활동은 거의 '탄탄대로'이지 않나. 다음 영화들이 줄줄이 망하지 않는 이상 지금까지보다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캐스팅도 잘 될테고 말이다. 실제로 김윤진이 "저 할리우드로 진출하고 싶어요."라고 말했을 때, 매니저와 소속사의 반응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이 시나리오가 가장 많이 들어오는 타이밍인데 미국 진출이라뇨? 미국 가면 회사에서는 아무 도움도 줄 수가 없어요. 혼자 가서 무조건 시작한다는 건 맨땅에 헤딩하는 거라구!" 그래도 김윤진은 밀어부쳤단다. 지금 아니면 어린 시절의 꿈이었던 할리우드 문은 평생 두드리지도 못할 것 같다고, 지금처럼 배우로서 가장 인정받고 있을 때가 기회이고, 이 자신감과 믿음이 깨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며 도전은 지금이어야 한다고, 도와달라고 했단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에서 '펜던트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는 이게 굉장히 마음에 와닿았다. 99년 '쉬리' 이후, 한창 바쁘게 일할 때 선물 받은 펜던트가 있었는데, 그 안에 짧은 메모를 적어두었단다. '3년, 정상, 그리고 돈. - 1999년 11월 3일 2:39am.' 한국에서의 바쁜 생활에 할리우드 도전을 포기하게 될까봐 두려워서 적어놓은 소원이라고 한다. 그 후, 그녀는 정말 열심히 일했고, 딱 3년이 되는 2002년 겨울, 청룡영화게 여우주연상을 타면서 목표를 달성했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펜던트를 청소하면서 찾아낸 후, 그 안에 적힌 소원을 다시 보게 되면서 거부할 수 없는 징조 같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새로운 목표를 적어 넣은 후, 도전하기로 마음 먹었단다. '할리우드 정상, 결혼, 행복'

물론 실제보다 다소 미화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에서 김윤진의 열망이 느껴져서 좋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 곳 브로드웨이에서 경험을 쌓으며 연기자의 꿈을 키운 김윤진에게 할리우드는 단순한 동경의 대상을 넘어서는 것일테지. 그걸 잊지 않고 찾아가는 모습에 괜히 내 마음이 찡하다. '레터맨 쇼' 출연 당시의 에피소드에도 나오는데, 대학시절 그 스튜디오 근처에 살던 그녀는 그 곳을 바라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기에 출연할거야!'라는 꿈을 꾸었단다. 그래서 그 꿈이 이루어졌을 때의 흥분은 말도 못할 정도였다고. 그러고 보면 그녀가 두 번째로 펜던트에 적어 넣은 소원도 점점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소원 메모'가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걸까? 언제나 그렇지만 꿈을 실현해 가는 사람들을 보면 반짝임이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보는 사람의 자극도 이끌어내지. 나도 꿈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 밖에도 책에는 할리우드로 진출하면서 겪은 크고 작은 사건들, 그때 그때 느꼈던 감정들과 생각이 씌어져 있는데, 특히 할리우드 진출 초반에 '구안와사'로 고생한 경험담이라든가, 이름 때문에 겪은 에피소드, 적지 않은 나이와 동양인이라는 단점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로스트  관련 이야기를 중심으로 미국 연예계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부터 그 곳의 드라마 제작 구조, 배우 캐스팅, 촬영 현장 이야기까지 내게는 전체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라 재미있게 읽었다. 무엇보다 문장 호흡이 짧고 꾸밈이 없는 편한 글들이라 마치 지인의 경험담을 듣는 것 같아 즐거웠다. 간간히 실려있는 사진들 때문에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고. 하여간 마음에 든다.

위에서도 얘기 했지만 꿈이 있는 사람은 참 아름다워 보인다. 그래서 묵묵하게 목표를 향해 한발짝 한발짝 나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보기 좋다. 앞으로도 이런 좋은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문득 영화 '귀여운 여인'의 마지막 나레이션이 생각난다.

할리우드로 오세요.
여러분의 꿈은 뭔가요?
모두 할리우드로 오세요.
여기는 꿈의 전당 할리우드!
꿈이 실현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죠.
하지만 이 곳은 할리우드.
계속 꿈을 꾸세요.
시간은 충분하니
계속 꿈을 꾸세요..

그래, 꿈 꿀 시간은 충분하다.
필요한 건 용기와 도전, 그리고 노력 뿐!
나도 언젠가 멋지게 펼쳐질 나의 드라마를 꿈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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