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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구혜영 옮김 / 창해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방과 후가 되면, 선생님의 호통소리와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수다가 마치 악보 기호, decresc처럼 점점 약하게 사그라진다. 그러다 하굣길에 울려퍼지는 하하호호 웃음소리마저 사라지면 학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 속에 잠긴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또 그렇게 학생과 선생님으로 채워지지만 방과 후의 그 고요함과 나른함이란 마치 치열한 전투 끝에 오는 잠시 동안의 휴식시간 같은 그런 느낌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클럽 활동 때문에 바쁠 수도 있겠고, 학원도 가야 하겠고, 해야 할 숙제도 있겠고, 약속이 있어 바쁘기도 할테지만, 어쨌든 방과 후는 학생이나 선생님 모두에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시간. 그런데 어느 날, 방과 후 얼마 지나지 않은 그 평화로운 시간에 한 선생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얼핏 자살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살을 가장한 밀실 살인. 그리고 얼마 후에 또 한 명의 선생이 사고를 당한다. 분위기는 더욱 흉흉해지고, 그전부터 보이지 않는 위협에 종종 시달려 온 마에시마 선생은 범인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한다. 도대체 누가 그 두 선생을 죽였을까? 학생? 아니면 동료 선생? 그것도 아니면 제 3의 인물?
최근 국내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워낙 다작하는 작가이고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긴 하지만, 그동안은 국내에 1년 평균 두어 권 나오는 정도에 불과했는데, 작년에 번역 · 출간된 [용의자 X의 헌신]이 인기를 끌고 그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이 크게 상승하면서, 그의 최근작과 더불어 예전 소설들이 우후죽순 출간되기 시작했다.(여기엔 물론 최근 국내 출판계에 불고 있는 일본 소설 열풍도 한 몫 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책도 그 가운데 하나로, 간략히 소개를 하자면 1985년에 낸 히가시노의 게이고의 데뷔작이자 1987년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인 작품. 한동안 히가시노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가 이번에 데뷔작이 나왔다길래 간만에 집어든 그의 소설은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과 데뷔 소설이라는 풋풋함이 더해져 미스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사과 향기가 날 것 같다. 게다가 표지 일러스트마저 취향. 교복 입은 여학생은 언제 봐도 참 예쁘다니까. (잉? 뭔가 변태 같다.;;;)
20년 전 작품이라고 하지만 전혀 그런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게, 어쩌면 시대를 막론하고 10대의 말투, 행동패턴, 감수성은 보편성을 띠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학교 다니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 모습에 왠지 모를 친근함이 느껴지는 건 절대로 과장이 아니라니까. 선생님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고, 친구와의 관계를 목숨처럼 소중히 하며, 남들 눈을 의식하면서도 가끔은 제 멋대로 살고, 반항을 일삼으며 때로는 수줍음에 말도 제대로 못하는 그런 10대.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그 틈바구니에서 서성이고 있는 그들을 보면, 가끔 '예쁜 상자에 든 유리 인형'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여러 겹으로 포장하고 강한척 애쓰지만 본질은 어쩔 수 없는 유리라서 조금만 상처입어도 균열이 생기고, 심하면 깨지기까지 하는 유리인형.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키려는 것이 조금은 안쓰럽기도 하고.
소설은 그러한 10대 소녀들의 면면이 조각조각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여고생의 섬세한 심리'에 대해 매우 날카로운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걸 보여주는 방식은 어느 순간 다소 뭉툭하게 그려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대전제는 남성 작가 치고 보기 드물게 세심하다. 그걸 바탕으로 곳곳에 깔려있는 복선의 활용, 이중 장치가 된 트릭, 그리고 살인 동기가 드러나는 과정이라든가, 서술 방식, 마지막 나레이션까지.. 데뷔작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굳이 흠을 잡아보라면 못 잡을 것도 없겠으나, 그러한 흠도 20년 전임을 감안한다면 꽤나 신선한 방식. 결국 히가시노가 괜히 인기 작가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만 확고해질 뿐이다.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건, 살해 동기에 관해서인데...이것은 일본 출간 당시에도 꽤 논란이 되었던 사항으로 독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던가 보더라. 그러나 작가가 책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는 '과연 그러한 이유가 살해 동기로 충분하냐, 아니냐' 혹은 '누가 먼저 잘못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마음을 먹을 수도 있는 복잡미묘한 심리에 관한 '이해'에 있다는 것. 그리하여 마지막 챕터에서 마에시마가 이야기하는 '방과 후'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 이 책이 주는 진정한 의미도 가슴에 와닿을 것이다.
덧. 이 책 덕분에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애정이 다시금 퐁퐁 솟아나고 있다. 막 미친듯이 좋진 않아도 언제나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재미를 보장해주시니 정말이지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게다가 이 작가의 책은 이야기의 재미도 재미지만, 스피드 조절이 워낙 능숙해서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가 없어.(세상에 데뷔작부터 이랬다니-_-;) 뭐…잘 됐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사두기만 하고 미뤄두었던 그의 책을 몽땅 꺼내서 읽어버려야지. 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