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신검시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선정작품이라고 광고를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스터리로서의 대단함만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공산이 크다. 미스터리의 신비함이나, 긴장감, 스릴을 기대하기엔 너무나 따뜻하고, 인간적이니까. 장르의 구조를 착실히 따르면서도 그 안에 감도는 분위기는 기존 미스터리의 그것과는 달리 훈훈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띠지에 큼지막하게 쓰여진 "영미추리소설에는 없는 따뜻함이 있는 소설"이란 문구가 좀 상투적이긴 해도 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미스터리'와 '따뜻함'이 쉽게 어울릴 법한 말이었던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사실 '미스터리'라고 하면 싸늘하고, 어두우며, 약간 비린듯한 냄새가 풍겨야 제 맛이이지 않나? 그런데 따뜻함이라니...이 오묘한 이질감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소설이 여기 있다.

구라이시 요시오, 52세.
'L현경 수사과 검시관'이란 직함을 가진 이 남자는 다년간의 현장 경험과 뛰어난 검시 능력으로 '종신검시관'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이 분야에서는 자타공인 최고다. 창처럼 가는 몸으로 예리한 눈빛을 반짝이는 그는 실력대로라면 출세도 탄탄대로였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은 모양. 야쿠자 같은 말투, 조직의 위계 따위 쌈박하게 무시하는 태도, 동료 및 후배에게는 무뚝뚝, 상사에게는 거침없이 막말, 그러면서도 바른 말을 일삼아 윗 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그의 행동은 조직에 머물러 있기에는 껄끄러운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실력은 (특히 시체감정에 있어서) 감히 '감식계의 총아'라고 할 만큼 대단한 것이어서, 심지어는 그를 '교장'이라 부르며 따르는 추종자까지 생겨나기에 이른다. 이쯤 되면 호기심이 슬쩍 고개를 든다. 이 사람 대체 뭐야?

[종신검시관]은 8개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형식 소설로, 사건과 사체, 감식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나 전체를 아우르는 큰 스토리가 없다는 점에서 그다지 유기적인 구성이라고는 볼 수 없고, 각각의 단편에 '구라이시'라는 검시관이 등장하여 크고 작은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 정도가 공통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 소설이 구라이시의 활약상을 집중 조명한 '영웅 일대기'식인가,하면 그건 또 아니다. 각각의 단편에서 구라이시가 나오는 부분을 되짚어 보면, 오히려 조연에 가깝지 않나, 싶을 만큼 이야기의 변방에 자리하는데, 그런 조건에서도 구라이시가 돋보이는 이유는 역시 캐릭터 자체의 비범함과 함께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보는 이의 마음에 와닿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말하는 '괴짜'형 인간인 구라이시는, 주위의 시선 따위 안중에도 없는 인물로, 그가 믿는 것은 오직 장인 기질에서 오는 투철한 직업 정신과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배려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트릭이나 원인을 파헤치는데 심혈을 기울이면서도 그 속에 인간이 있음을 잊지 않는 인물이다. 이는 구라이시 캐릭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자 이 소설이 가진 '따뜻함'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 책의 최대 매력이자 구라이시가 소설 속 후배나 동료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일테지.

8개의 단편들은 유기성이 약한 대신 각각의 이야기가 매우 독립적으로 기능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완성도 면에서도 뛰어나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글쎄… 조금 회의적이다.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나 스토리 자체는 매우 흥미로운 반면, 구성이 다소 산만한 경향이 있어 전체적으로 응집성이 조금 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몇몇 이야기는 디테일을 강화해서 장편화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짧은 분량 안에 최대한 많은 얘기를 담아내고 싶었던 탓인지 늘어놓은 이야기에 비해 마무리가 조금 미진한 느낌도 들고. 이는 캐릭터나 사건 자체는 돋보일 수 있어도, 간결하고 깔끔한 뒷맛이 생명인 '단편 소설'의 속성을 생각해보면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에피소드가 쉬이 잊혀지지 않고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래도 작가의 소재 발굴 능력과 캐릭터의 매력, 그리고 앞서 얘기한 '따뜻함'과 '인간애'라는 키워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로 담아내기에는 어딘가 추상적이고 진부할지는 몰라도 그것이 마음을 울리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더라. 실제로 내 경우는 책을 읽으면서 결국 티슈까지 뽑아 들어 눈물을 닦았으니 말이다.

[종신검시관]은 장르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독자의 감성까지 건드린다는 면에서 무척 매력적인 소설이다. 그러고보면 이 책은 일종의 '휴먼 미스터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매우 마음에 든다. 얼핏 안하무인에 가까운 행동에 딱히 자상하거나 사근사근한 맛도 없는 고집 센 말라깽이 경찰 아저씨, 구라이시! 그래도 이 사람이라면 의지가 된다. 사건이 발생하면 앞뒤 잴 것 없이 무조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 한 달여의 짧은 기간이었다 하더라도 어찌됐든 부하였던 고인을 위해 완벽했던 자신의 업적에 흠집을 남기면서까지 수사를 하는 구라이시의 모습은, 저런 사람이 내 상사라면 (좀 과장해서) 목숨 바쳐 일할 수 있겠다는 각오까지 들게 했다. 이것이 내 얄팍한 감수성 때문이라 할지라도 그 때의 솔직한 내 느낌은 그랬다. 그래서일까, 그의 깡마른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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