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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윤덕주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흔히 '시한부 인생'이라 하면, 흰 가운을 입고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의사에게서 "앞으로 길면 6개월, 짧으면 3개월입니다." 따위의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사망(예정)통보를 받은 환자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의 삶 정도? 다소 가벼운 투로 예를 들고 있지만, 어쨌거나 그건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 아니 실제로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만약 전인류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는다면?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얘기냐고 손사레를 치며 (비)웃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 전환해보면 이것은 마냥 웃어넘길수 만은 없는 얘기다. 여기 픽션이긴 하지만 그 예가 있다.
어느 날, 지구 종말을 운운하는 뉴스가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지구가 머지않아 소행성과 충돌할 것이라는, 마치 90년대 영화같은 내용이 그 이유다. 그리고 뉴스는 점차 종말을 확실시하는 보도를 했고, 결국 세계 멸망이 확실해졌다는 발표가 났다. 지구 종말까지 남은 시간은 8년. 이 어정쩡한 시간 앞에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어마어마한 소식에 얼이 빠져 있던 사람들은 8년이라는 구체적인 수치가 나오자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약탈과 살인, 방화와 폭력, 강도가 들끓고 피난 행렬이 줄을 지었다. 어차피 소행성이 충돌하게 되면 어디로 도망치든 마찬가지일 텐데도 사람들은 부지런히 짐을 싸고 허둥지둥 차를 몰아 도망가기에 바빴다. 폭동이 일어나고 차와 건물들이 불에 탔다. 이러다가는 소행성이 충돌하기도 전에 세상이 끝장나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은 격앙돼 있었다. 그렇게 5년여의 세월이 흘러 이제 남은 시간은 3년. 불안과 공포는 여전하지만 세상은 묘하게 차분하다. 아마도 잠시 소강기에 접어든 것일 게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치 수능 D-100일을 세는 것처럼, 종말의 그날을 향해 카운트다운을 세기 시작한 지구. 이 SF 블록버스터급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속수무책이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차 안정을 찾아간다. 종말이 임박해 오면 또 어떻게 불안을 표출할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닥치지 않은 현실에 일일이 반응하기엔 사람들은 너무 지쳤다.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던 것 처럼, 사람들도 각자가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저마다의 사과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왜 사과 나무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사과 나무를 심었다'는 행위 그 자체일테니까. 종말이 오더라도 연애를 하고, 아이를 낳고, 복싱연습을 하고, 어차피 종말이 오면 저절로 해결될텐데도 복수를 계획하고, 자살을 꿈꾼다. 그러면서 용서하고, 이해하고, 화해하고... 그리고 가슴속에 '어쩌면...'이라는 조그마한 희망을 품고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역시 판도라의 상자속에 마지막 남은 건 희망이야. :)
유사한 설정을 지닌 영화 '아마겟돈'과 '딥 임팩트'는 애초에 어렵긴 해도 해결법이 제시됨으로써 영웅 탄생과 그로 인한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영화였고, 그것이 목적인 영화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관객은 고비가 있을 때마다 긴장은 될 지언정, 지구가 멸망할까봐 노심초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이런 유의 영화야 힘든 고비와 여정 뒤에 찾아오는 극적 해결이 관건이니까. 그런데 똑같은 설정인데도 포커스를 달리 맞추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고만다. 즉, <종말의 바보>는 위기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영웅들의 일대기가 아닌, 힘도 빽도 없는 소시민들에게 포커스를 맞춘 이야기라는 뜻이다. 긴장과 스릴은 온데간데 없지만, 대신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이웃들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책은 센다이 힐즈 타운을 무대로 총 8가지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에피소드마다 이사카 고타로 특유의 기법이랄까, 특징이 고스란히 나타나서 읽다가 조금 웃었다. 이 작가는 아무래도 이야기의 구성 인물들을 거미줄 치듯이 연결시키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인 것 같다. '러시 라이프'나 '사신 치바'에서도 그랬는데, 예를 들면 한 에피소드에서 중심인물, 즉 주인공이었던 사람이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조연급, 혹은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것이다. 그래서 짤막한 단편성 이야기라도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하나의 큰 틀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것이 반복 되다보니 독자의 입장에서 또 하나의 재미가 되어버렸다. 텍스트로나마 아는 인물이 또 다른 이야기에 슬쩍 얼굴을 내미니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좀 우습지만 뜻밖의 장소에서 아는 얼굴을 만났을 때와 같은 느낌이랄까. 괜히 반가워서 씨익- 웃게 된다. 그 외에도 '이사카'스러운(?) 것은 많다. 분명히 무거운 소재인데 발랄하고 코믹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려낸다는 점, 인생의 긍정적인 면을 끊임없이 부각시킨다는 점, 그러면서도 책을 덮을 때엔 잠시나마 숙연하게 인생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 비교하자면 '정극'이라기 보다 '시트콤'인 셈이다. 지나치게 쿨하고 담백해서 자칫 가벼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인생의 짐이란 누구에게나 무거운 법. 이 책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그 짐을 내려놓는 것도 좋을 듯 싶다.
덧) <종말의 바보>를 읽으면서 난 끊임없이 '만약에 정말로 지구 종말이 온다면?'을 생각했던 것 같다.
음... 그렇다면 나는 역시 4번째 에피소드가 마음에 든다. :)
<동면의 소녀>에 나오는 '다구치 미치'처럼 서재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사두기만 하고 미뤄두었던 책들을 번호 매겨가며 읽고 기록을 남기는 거다. 년/월/일/시까지 꼼꼼히 체크해가며 열심히 읽어야지. 그건 굉장히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아- 그런 생각을 하니까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더 생각할 것 없이 오늘부터 시작해야지. 아, 기분좋은 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