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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ㅣ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1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인간의 생명을 다룬다는 점에서 의료현장은 어쩌면 소설(특히 미스터리)의 배경으로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곳일지도 모르겠다. 그곳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기도 하지만, 언제 어떻게 죽어나가도 이상할 게 없는 무시무시한 공간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이 씨실과 날실 교차하듯 얽혀있는 의료현장은 그래서 그 어느 곳보다 치열하고 드라마틱한 공간이다. (물론 세상사가 다 그렇겠지만) 어떤 면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휴먼 드라마가 창출되기도 하고, 살벌한 정치판이 벌어지기도 하며, 무시무시한 공포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병원은 언제나 '가깝고도 먼 당신'. 여기 그러한 병원을 무대로 한 꽤 흥미로운 소설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알게 된 사실 하나, '일본에서는 소아 심장 이식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래서 확장형 심근증을 앓는 아이들과 그 부모는 치료에 애를 먹고 있다. 이에 심장 이식 대체수술로 주목 받기 시작한 게 '바티스타 수술'이라는 것인데, '바티스타 수술'이란 간단히 말하면 비대해진 심장을 잘라내 작게 만든다는 매우 단순한 발상에서 착안한 수술로, 정식 명칭은 '좌심실 축소 성형술(Partial Left Ventriculectomy)'이지만 창시자인 R.바티스타 박사의 이름을 딴 속칭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바티스타 수술의 대가로 '기류 교이치'란 남자가 도조 대학 병원에 초빙되어 오는데, 기류는 미국 유학파로 병원에 오자마자 최강의 수술팀을 구성, 주위의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는 실력과 성과를 거두며 일약 대스타로 발돋움 한다. 병원의 명성은 높아만 가고, 어린 새싹들에게도 희망이 보인다며 미디어는 흥분을 했다. 그런데 수술 성공률 100%로 이른바 글로리어스 세븐이라 불리며 명성을 떨치던 기류 팀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한 건 케이스 27부터. 처음으로 수술 중 사망이 발생했다. 애초에 리스크가 큰 수술이었으므로 수술 중 환자가 사망한다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케이스 28을 제외한 29, 30에서도 연달아 환자가 사망하자 위기감을 느낀 기류와 다카시나 병원장은 자체 내부 감사를 의뢰하기로 한다. 공식 리스크 매니지먼트의 가동이 아닌 자체 내부 감사를 의뢰하기로 한 것은, 이 사건이 의료 미스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한 악의적인 사망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행동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다구치 고헤이가 내부 감사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홍보 문구를 보니, 제 4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대상 수상작이라는 그럴듯한 메인 타이틀에, 주간문춘 선정 <2006 걸작 미스터리 베스트10> 3위 입상작이라는 부가 타이틀까지 획득한 책이란다. 업계에서는 쟁쟁한 선배들을 제친 무서운 신인 작가가 탄생했다며 그를 반겼고, 독자 반응도 매우 좋아서 신인 작품 치고 이례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는데... 그런 만큼 일단 대중적인 재미에 있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읽어보니 이거이거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데다 묘하게 취향에 맞기까지 해서 뜻밖에 횡재한 기분. 그리고 의외였던 건 책을 다 읽고 지은이 소개를 보다가 발견한 것인데, 이 책을 쓴 '가이도 다케루'의 직업이 전업 작가가 아닌 현역 의사라는 사실이었다. 헛, 뭐야 이 사람! 의사 선생님이 글 쓰는 재주까지 출중하잖아!? 내용이 내용이니 만큼 병원 사정을 그림 그리듯이 묘사하는 게 매우 탁월해서, 책을 처음 읽을 때부터 작가가 의료계 종사자거나 그 비슷한 분야에서 일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현역 의사라니 도대체 그 바쁜 와중에 글은 언제 쓴 거래? 일본은 한국 의료계 사정과는 달리 여유가 좀 있는 걸까? 어쨌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처럼 보이는 투잡족의 저자를 보니 약간의 부러움과 질투가 나기도.
(역자 후기에서도 언급하는데) 사실 이 책은 미스터리 소설로 분류된다고는 하지만, 실은 잘 만들어진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의 기능이 더 훌륭하다. 그래서 미스터리의 분위기만을 한껏 기대하다가는 자칫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흐름 자체가 긴장감 보다는 적정 수준의 호기심 유발에서 그치고, 범인과 범행 이유가 밝혀지는 일련의 과정도 조금 성급해서 그간의 사건을 마무리 한다고 보기엔 다소 미흡한 감이 있지않나, 하는 생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약점을 덮어줄 수 있는 반짝반짝한 매력 -다구치가 내뱉는 서술어들이나 인물들의 대사는 순간순간 놀랄 만큼 예리하고 흡인력이 강하다- 이 소설 곳곳에 포진해 있어서 다 읽고 나면 개인적인 취향과는 상관 없이 최소한 '재미는 있었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책이니 적어도 돈이 아깝지는 않은 작품. 특히 병원이라는 소사회를 배경으로 하다보니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나오는데, 그걸 동물이나 곤충에 비유하는 다구치의 방식이 참 재미있어서 몇 번이나 키들거리고는 했다. 때로는 얼굴 찌푸려지고, 때로는 공감하게 되는 그런 인간 군상들을 한 큐에 설명하는 비유법. (과연 나는 어떤 동물에 비유할런지 물어보고 싶군.)
이 밖에도 작품의 매력을 꼽자면, 작가는 화자인 다구치 외에 또 한명의 주연급 주인공을 배치하고 있는데, 그의 이름은 '시라토리 게이스케'. 이 소설의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 싶다. '후생노동성 장관 관방 비서과 부속 기술관'이라는 정말로 있는지 어떤지 모를 직함을 가진 공무원, 시라토리. 아르마니를 입고 있지만 딱히 품위가 있어보이지는 않고, 기름을 발라 뒤로 빗어넘긴 머리때문인지 그의 이미지는 한 마리의 바퀴벌레. 일부러 잘난 체를 하는 건지 원래 그런 건지 알 수 없는 말투에, 상대방이 말끼를 못 알아 듣는다 싶으면 가차없이 면박을 주고, 그래놓고 칭찬인지 뭔지 모를 말을 허허거리며 내뱉는 남자. 비상한 머리와 집요함, 타고난 배짱으로 웬만한 탐정 저리가라,하는 인물. 사실 화자가 '다구치'이기에 2부에서야 나타나는 '시라토리'에게 왠지 모를 적개심(?)을 느꼈더랬다. 게다가 좀 특이해야 말이지. 첫 만남부터 '난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늘어놓는 말들이나 일본인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직설화법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그러면서도 후일담에서 다구치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 내용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의바르고 단정한 느낌을 주는 것을 보면, '이 사람 어쩌면 의외로 수줍은 성격일지도 모르겠군!' 하는 생각이 들기도. 일종의 '츤데레' 타입이라고나 할까? 훗. 여튼 작가 소개에 따르면 이 소설 이후, 독자들의 끊임 없는 요청으로 시라토리가 등장하는 다른 소설도 몇 권 출간했다고 하니, 확실히 인상에 남는 캐릭터이기는 한 모양.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고 싶다.
뜨거운 여름 날, 더위도 식힐 겸 책은 읽고 싶은데 뭘 읽어야 좋을지 모를 때, 출세에는 관심 없고, 외따로 떨어진 외래진료소에서 환자를 돌보며, 쉬는 시간에 커피나 마시며 인생을 즐기는 게 낙인 만년 강사, 다구치와 안하무인인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사람 좋은 시라토리의 콤비 플레이(과연..;)가 보고 싶다면, 이 소설 추천한다. 그러고보니 표지에 그려진 인물들... 다 아는 사람이잖아? 으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