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썼다. 지금 필체를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최대한 글자를 작게 썼다. 종이가 떨어질까 두려웠다. 일기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다. 내게 밀려든 현실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며 종이에 몇 마디 긁적인 것 뿐이다. 침춤 호가 가라앉고 일주일쯤 후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었다. 일기에는 날짜나 순서를 적은 숫자가 없다. 지금 보니 시간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알겠다. 며칠, 몇주일이 한 장에 기록되어 있다. 뭘 기대하고 있는지 적혀 있다. 일어난 일과 느낌에 대해, 뭘 낚시했고 뭘 놓쳤는지에 대해, 바다와 기후에 대해, 문제와 해결책에 대해, 리처드 파커에 대해, 하나같이 굉장히 현실적인 내용이다.

( 38페이지 중략)

소용없다. 오늘 난 죽는다


오늘 죽을 거야.

난 죽는다.


이게 마지막 일기였다. 그후에도 계속 버텼지만 기록하지는 못했다. 일기장의 구석에 지렁이같이 눌린 자국이 보이는지? 나는 종이가 모자랄 걸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먼저 떨어진 것은 펜이었다.


<파이 이야기 / 얀 마텔>


4월에는 운동을 한 달 정지시켰다. 그리고 5월부터 다시 갔다. 5월 첫 주는 연휴가 있어서 이래저래 못 가고 지난주 수, 금요일에 가자 싶어서 예약을 해두었다. 수요일에 첫 출석을 했다. 이번 달에는 총 9일 출석 계획을 세웠다. 금요일 오후에 필라테스에서 전화가 와서는 오늘 예약자가 나 혼자 뿐이어서 수업이 취소되었다고 했다. 이런 게 계약서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러라고 했다. 어차피 수업료가 지나치게 저렴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원이 적었기에 내 사업장도 아닌데 걱정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운동은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생존을 위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기에 내가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타당한 이유는 언제나 대환영이기도 해서 예약 취소를 당해도 딱히 불쾌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필라테스 센터에서 문자가 왔는데 이번 달 말부터 운영방법을 바꾼다고 했다. 그 방법은 무인 필라테스였다. 잔여 회원권은 무인필라테스로 전환 또는 환불해 준다고 했다. 선생님이 있는 수업도 간신히 가는 내가 무인 필라테스를 하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환불받아야겠다. 


나는 내가 먼저 지쳐서 수업 횟수를 다 못채우게 될 줄 알았는데, 필라테스 센터가 먼저 경영난을 겪게 될 줄은 몰랐다. 


<파이이야기>는 어느 문장 하나 버릴 것이 없지만, 일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부분도 강렬했다. 종이를 아꼈는데 펜잉크가 먼저 닳아버리는 상황이 너무 인생 같아서. 살아오면서 이 에피소드를 종종 떠올린다. 지금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의외로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진짜 문제는 내가 미처 걱정하지 못한 것에서 올 것이다라고. 


그랬기에 오늘 필라테스 센터가 경영난으로 환불을 해준다고 했을 때, '아 종이보다 펜이 먼저 떨어졌구나.' 하면서 <파이이야기>를 떠올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